<성호사설> 17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일본은 비록 해도(海島)에 있으나 개국한 지가 오래고 전적(典籍)도 다 갖춰졌다. 진북계(陳北溪 북계는 호. 이름은 순(淳))의 《성리자의(性理字義)》와 《삼운통고(三韻通考)》에는 우리가 왜국[倭]으로부터 전적을 구하였고, 우리나라의《이상국집(李相國集)》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산실되었으므로, 다시 왜국으로부터 구해 와서 세상에 간행했다 하였는데, 대개 왜판(倭板)의 글자는 자획이 정제하여 우리나라 것과 비교가 되지 않으니 그 풍속을 알 수 있다.대마도(對馬島) 사람은 간사하기가 특히 심하다. 그러나 그곳에도 두메의 풍속은 충실하고 고지식하여 비록 국중의 비밀이라도 은휘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교활한 풍습은 우리나라가 더욱 심한가 보다. 요동(遼東)ㆍ심영(瀋陽) 사람의 말에, “세상의 모든 물건은 길들이지 못할 것이 없다. 사나운 금수도 또한 길들일 수 있으나 오직 고려(高麗) 사람은 길들일 수 없다.”고 한다. 대마도에 간사한 사람이 많은 것은 서쪽이 가깝기 때문이다. 또 땅에 오곡(五糓)이 없고 상업으로 생업을 삼으니, 어떻게 순후(淳厚)한 성질을 보전할 수 있으랴?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징험하여도 깊은 산협은 반드시 순박하고 서울에 가까울수록 투박하니,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일본은 법을 세움이 심각하여 우리나라의 서적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으나 그곳의 문자는 금하여 나올 수 없으니 영(令)이 엄한 까닭이다. 근래에 듣건대 그곳 충의(忠義)의 인사가 동무(東武)의 웅강(雄强)함과 서경(西京)의 쇠약함을 분개하여 일을 하려고 하나, 명망과 지위가 높지 못한 필부로서 시행할 바가 없었다고 한다. 서경은 왜황(倭皇)이 있는 곳이고, 동무는 관백(關白)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산암재(山闇齋)와 그 문인 천견재(淺見齋)란 자가 있는데, 그들의 의론이 과격하여 허노재(許魯齋)가 원(元) 나라에 벼슬한 것을 그르다고 하니, 대개 까닭이 있어서 한 말이다. 위의 두 사람은 일찍이 그 나라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또 천견(淺見)의 문인으로 성은 약(若), 이름은 신요(新饒), 자는 중연(仲淵), 호는 수재(修齋)란 자가 있는데 학문이 정명(精明)하고 대의(大義)에 대한 말을 좋아하였다. 스스로 악 무목(岳武穆 송(宋) 나라 충신, 이름은 비(飛))ㆍ방손지(方遜志 명(明) 나라 학자)에게 견주고 항상 서경을 흥복(興復)할 뜻을 품으니 실로 훌륭한 선비이다.관백은 가장 동쪽 끝에 있으면서 일찍이 왕(王)이라고 일컫지 않고 정이 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동북쪽에는 하이국(蝦夷國)이 있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 돌아 흑룡강(黑龍江) 밖에까지 연접하였고, 사람들은 심히 영악(獰惡)하고 독살스러워 제어하기 어렵기가 흑룡(黑龍)의 대비달자(大鼻撻子 서북변의 오랑캐)와 같다. 그 정이(征夷)라고 한 것은 이 따위를 진압하기 위함이니, 중국이 연경(燕京)에 도읍함과 같다.왜황(倭皇)이 실권(失權)한 것이 또한 6~7백 년에 불과한데 국민의 원하는 바가 아니다. 차차 충의의 인사가 그 사이에 생겨서 천황을 복권시킨다는 명의가 정당하고 말이 옳으니, 뒤에는 반드시 한번 성공이 있을 것이다. 만일 하이(蝦夷)를 연결한 다음 그 천황을 끼고 제후에게 호령한다면 반드시 대의를 펴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66주의 태수(太守)들이 어찌 서로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일 이렇게 되면 저편은 천황이요 우리는 왕이니,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죽은 아들 맹휴(孟休)가 일찍이 말하기를, “통신사(通信使)의 경우, 그 서ㆍ폐(書幣)와 문자에 있어 우리의 대신으로 하여금 항례(抗禮 동등한 예절)로 함이 가한데 나라일을 계획하는 자가 먼 생각이 없고 목전의 미봉책만 하였으며, 또 관백이 왕이 아닌 줄 알지 못하고 이에 이르렀으니, 몹시 애석하다.” 하였다.
요약하자면
'쇼군의 막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덴노의 조정을 허수아비로 만든 상황인데 막부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토막파(討幕派) 라고도 합니다.)이 막부를 몰아낸다면 (명목상)저쪽은 황제이고 우리는 왕이니 일본이 우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단순히 태정봉환과 무진전쟁까지만 예견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 이후에 조선을 침략할 것까지 예측했다는데서 소름이 쫙 돋습니다.
어떻게 일본 내 토막파의 존재를 알았는지가 궁금해지는데 조선통신사들을 수행하던 일본인들 중에 그런 사상을 품은 인물들이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막부에게 걸려서 바로 모가지였을 것이니 입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이었을텐데 외국인이고 막부에게 압력을 받을 일도 없는 조선통신사들을 대나무숲 비슷하게 생각하고 심경을 털어놓았고, 조선통신사로 갔던 인물들 중 일부가 그들이 말한걸 기록으로 남겼던 모양입니다(대표적으로 남옥(南玉)의 <일관기(日觀記)>가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서 느끼는건, 조선의 선비들중엔 공자왈맹자왈 하는 백면서생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예리한 안목과 통찰력을 가진 인물들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꽉 막힌 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는게 서글퍼진다는 겁니다.
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이 놀랍도록 다채로운 사상들을 펼쳐놓았음에도 결국 동양사상은 유가 일변도로 흐르게 된 과정이 떠오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