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에 모든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을파소 고국천왕 13년(191)에 국상에 임명되어 산상왕 7년(203)까지 국상을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을파소는 유리왕 시절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이었지만 을파소 무렵에는 가문 자체가 많이 몰락했는지 압록곡 좌물촌에서 밭을 갈며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오래 살아서 이제는 나이도 상당히 먹은 노인이었지만 그의 지혜와 사려깊음은 꽤나 알려진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그렇게 밭이나 갈다가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기만성형의 인물들이 삶이 그러하듯 시대는 그를 압록곡 좌물촌이 아닌 세상 밖으로 끌어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 시작은 고국천왕 12년(190)에 시작된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패자 좌가려의 반란이었습니다. 이 둘은 왕후의 친척으로써 왕후의 빽만 믿고 온갖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간신계의 스타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좌가려와 어비류가 나쁜 짓을 많이해서 고국천왕이 빡쳐서 이들을 죽이라 했다고는 나옵니다. 하지만 원래 나쁜 놈들은 처음부터 나쁜 짓을 했으니 그들의 악행은 이미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국천왕도 처음에는 왕후의 빽이 부담스러워 이들의 만행을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자 이들에게 지옥행 급행열차표를 줄 것을 명합니다.
고국천왕이 친히 지옥행 급행열차표를 끊어준다고 하면 그냥 곱게 목욕제계하고 갈 준비나 할 것이지 이 개념을 밥말아 먹은 두 사내는 네 연나와 함께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의 반란은 상당히 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해인 고국천왕 13년(191)에는 왕도를 위협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고국천왕 역시 재위 6년에 한나라 요동태수의 군대를 좌원에서 개발살낸 경험이 있는 매우 만만치 않은 인물. 이들은 개발살나고 그들은 그렇게 지옥행 급행열차를 올라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고국천왕은 안 그래도 콧대 높은 귀족놈들을 개발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신하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근래에 총애 받는 바에 따라 관직이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으로 승진되지 않으니,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우리의 왕실을 흔들고 있다. 이것은 과인이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희 4부에 명령하니, 각각 자신의 아래에 있는 현명하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라!”
산천초목조차 부들부들 떨게 만든 왕의 추상같은 명령에 4부에서는 의견을 모아 동부의 안류를 추천하였습니다. 왕은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안류는 이를 공손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디 큰 정사에 참여하기 부족합니다. 서쪽 압록곡(鴨淥谷) 좌물촌(左勿村)에 사는 을파소(乙巴素)라는 사람은 유리왕(琉璃王)의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으로, 성질이 강직하고 굳세며 지혜롭고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 등용되지 않아 힘써 밭을 갈며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고국천왕은 즉시 압록곡 좌물촌으로 사신을 보내어 을파소를 초빙하였고, 을파소에게 중외대부의 벼슬을 주고 거기에 우태의 작위를 삼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외람되게 선왕의 위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있으나 덕이 없고 재주가 짧아 정치에 미숙하다. 선생은 재능을 감추고 총명을 숨기면서 궁색하게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려 왔다. 이것은 나만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마음을 다하여 주기 바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정도에도 아이구 감사라 하며 일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에 나오는 훌륭한 인물들이 그렇듯 을파소는 이 정도 자리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 생각하고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느리고 둔함으로는 감히 임금의 엄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대업을 달성하게 하십시오.”
보통의 왕이었다면 <이놈이?>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고국천왕은 오히려 을파소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내 을파소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국상의 자리를 덜컥 내주고 국정을 돌보게 합니다. 기존의 왕족들이나 귀족들은 놀라 자빠지고 있었습니다. 저런 밭에서 농사나 짓던 촌동네 노인에게 중외대부의 자리를 내준 것도 가당찮는데, 아니 국상이라니 국상이라니?
멍청하고 능력도 없는 소인배들의 하는 행동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왕족들과 귀족들은 고국천왕에게 을파소가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조정을 이간질한다는(누가 도대체 이간질을 하는 것인지..) 소리를 대놓고 말하며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매우 짧은 교서를 통해 그들의 Shut up 시켰습니다.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멸하리라. (을파소에게 개기는 것 = 곧 왕인 나에게 개기는 것)”
(삼국사기에는 왕들의 말들이 많이 나오지만 저 말만큼 매우 간결하게 자신의 뜻을 잘 표현한 말은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교서 하나로 모든 상황은 정리가 되고 왕족들과 귀족들은 여전히 을파소를 미워했지만, 묵묵히 을파소가 하라는 대로 따랐습니다. 을파소 역시 이러한 왕의 신임에 너무 감사해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한 도리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옛날의 은거를 생각하겠느냐!”
그러면서 전혀 교만하지 아니하며 지성으로 왕을 도와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고국천왕은 뛰어난 국상을 얻게 해준 안류도 대사자로 삼았습니다. 안류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안 나오지만 을파소 못지않은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자신이 부족함을 알고 더 뛰어난 인물을 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이후 을파소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의 사관들 역시 이러한 고국천왕과 을파소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는지, 고국천왕과 을파소를 유비와 제갈공명, 전진의 부견과 왕맹의 사이로 비교하며 높게 평가하였습니다(에이 그렇다고 고국천왕과 부견은 좀 아니지... 초창기 시절의 부견이라면 모를까). 특히 김부식은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에 일이 없었다."라는 찬사를 늘어놓을 정도로 그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재상이었기에 그는 살아서는 왕의 신임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죽어서는 당당히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아 훌륭한 정치가들 중 한 사람으로서 남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담 : 흔히 사람들이 을파소하면 진대법, 진대법하면 을파소라고 생각하는데 실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편을 보면 전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진대법 제정과정에서 을파소는 나오지 않고 고국천왕이 주도적으로 이 법을 만든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압록곡 좌물촌에서 오랫동안 밭을 갈며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한 을파소도 이 법을 만들 때 큰 도움을 주었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