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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괴담] 미지의 상쇄 (도미지 연작 1)
게시물ID : panic_877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환상괴담
추천 : 14
조회수 : 224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5/10 19:06:35
'아, 긴장하지 말자! 그전부터 수십번 연습해왔던 일이야, 그냥 연습대로만 하면 문제없다고.'

자신을 독려하는 말과는 달리 상당히 얼어붙은 한 남학생의 어깨가 우물쭈물거리고 있다.
잠시 뒤에 있을 깜짝 고백을 위해 준비한 편지와 선물을 앞으로 들었다가, 뒤로 감췄다가,
조금이라도 멋진 장면을 연출해보고자 애쓰는 연출가가 되어 예비 공연에 열중하는 모습.
슬쩍 손목시계를 쳐다보니 약속 시간까지 10분 남짓 남았다, 시간이 모자란지, 충분한지 몰라도
한숨을 푹푹 쉬는 입술이 질끈 깨물었다 풀리기를 계속하며 초침처럼 째깍거린다.

'현애야, 우리 이제 친구하지 말자.. 왜? 하고 현애가 말하면.. 친구말고 애인하자..
아씨, 이건 너무 오글거리는데.. 고백을 해봤어야 알지,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원도 없고.'

수십번을 상상 속에서 성공시킨 고백이었겠지만 누구라도 상상 속에서 육상 세계 신기록 정도는 갈아치워 본
적이 있는 법, 백 번의 다짐도 소용없다는 걸 아는데는 아까운 나머지 10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떡하지? 그냥 저번에 빌려준 5천원이나 달라고 하고 끝낼까? 오늘은 날이 아닌가?
날씨도 꿀꿀하고.. 분위기 잘못 타면 완전 쪽박 차는 거 아냐?'

나무 바닥에 사뿐한 발소리가 실려온다, 토요일 방과 후 이 시간에 이 교실에 올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현애♡진우 커플의 1일이 되기를 바라며 진우가 떨리는 만큼 선물을 꽉 쥐었다.

...

" 아. "
" 어... "

놀란 눈동자가 서로 마주보며 멈춰서있다, 서로에게 뜻밖이었다는듯.
발걸음의 주인이 현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란 점에서 예상은 한 번 비틀어졌다.

" 박진우? 우리 같은 학년 맞지? 2학년 교실은 몇 층이야? "

살갑게 말을 걸어오지만 분명 처음 보는 남남, 진우는 이름 모를 여학생이 자신의 초록색 이름표를 보고 자신의
이름과 학년을 알았단 걸 짐작했다. 같은 학교를 다니면 이름이라도, 얼굴이라도 알 법 하지만 전혀 새로운 만남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2학년 교실이 몇 층인지도 몰라서 토요일 방과 후에 으슥한 빈 교실까지 찾아온다니.

" 바로 윗층인데.. 잘못 왔나보네. 여긴 빈 교실이야. "
" 그럼 넌 여기 왜 있는데? "

짖궂게 질문한 여학생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허리를 앞으로 숙여 한 발짝씩 다가왔다.
진우의 허리 뒤에 숨긴 편지와 선물이라도 채갈듯이 점점.

'아, 벌써 약속시간 3분 지났는데 좀 있으면 현애가 오는데.. 얘 뭐야?'

" 청소 구역이 여기라서 그래. 무슨 2학년이 2학년 교실도 모르냐? "
" 으응. 전학 왔거든. 이 학교 교복 입어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야, 안내를 듣긴 들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괜찮다면 네가 안내 좀 해줘. "
" 그럴 시간 없어. 지금 바빠. "
" 그럼 청소 도와줄게, 이 학교 와서 처음 만난 2학년이 너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
" 혼자 해도 괜찮으니까 나가, 같이 할 필요는 없어. "
" 청소 끝나고 잠시는 괜찮지? 첫 날이라 좀 도와줘, 그럼 기다릴게. 꼭 와줘? "
" 무슨 소리야, 그냥 내일 다른 여자애들한테 말해, 야! "

충분히 들릴만한 거리였는데도 의문의 전학생은 대꾸없이 교실을 나가고,
운명의 장난처럼 준비할 새도 없이 현애가 불쑥 들어섰다.
한 눈에 보기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 너 표정이 왜 그래? "
" 어? 아.. 집에 빨리 오래서..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데 크게 다치진 않아서 일반 병실에 계신대.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용건만 간단히 하자, 왜 불렀어? 아까 '야' 하고 소리 지른 거 너야? "

수 백 개 준비했던 오글거리는 고백 멘트는 기억 속에서 구겨져 다시 펼 수 조차 없고,
현애가 먼저 걸어놓은 대화의 모래시계가 빠른 속도로 모래를 쏟아내고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 하길 원하는
다급한 표정의 현애에게 무슨 고백을 성공시킨단 말인가?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다는데!

" 그.. 그거 나 아냐, 왜 불렀냐면.. 그.. 그게.. "
" 빨리- 나 가봐야 한다니까.. "
" 앗, 그, 저번에 너한테 빌려준 오천원 있잖아, 네가 나한테 생일 선물 줬었잖아, 그냥 그거랑 퉁치자고. "
" 그 얘기 하려고 부른거야? 너도 참 너다. 그정도는 그냥 문자로 해도 돼, 오천원 그거 뭐라고 남자애가
쪼잔하게. 나 빨리 가봐야겠다, 으유 뭘 그런걸로 사람을 왔다갔다하게 만들어, 강아지 훈련 시키냐? 갈게. "

'아.. 씨, 악재가 겹치네, 분위기도 안 도와주고 날도 안 도와주네, 다음에 어떻게 또 기회를 만들어.'

편지와 선물을 가방에 쑤셔넣은 뒤 책상 밑에 쭈그려앉아 한참을 속썩이던 진우의 머릿속에 가볍게
들어넘겼던 누군가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 잠시는 괜찮지? 그럼 기다릴게, 꼭 와줘 -

' 성격이 털털한거야.. 아니면 철이 없는거야? 초등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이나 되가지고..
외국에서 전학 왔나? 그럴수도 있겠다. 처음 보는 남학생한테 무슨 학교 안내야. 영어 교과서냐? '

고백의 기회를 허탈하게 날려버린 진우의 어깨가 꺼질듯 기운 채로 힘없이 계단을 올라 2학년 교실에 정말
혼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전학생에게로 향했다. 골똘히 생각해보면 전학생의 얼굴이 꽤나, 아니..
꽤나 수준이 아니라 학교에서 손에 꼽는 '얼짱'들과 비교해봐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목적도 있었다.

" 진우야! "

전학생이 교실 한 편에 다소곳이 앉아있다가 진우가 들어서자 몹시 반기며 달려왔다.
초록색 이름표에 적힌 '도미지'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 야, 지금 늦었는데 무슨 학교 안내야, 월요일에 애들 다 오면 어차피 같이 다니다가 배우면 되잖아. "
" 그래도 와줄거라고 생각해서 기다린건데, 부탁이야. "

고백은 현애한테 하려고 한건데, 설레는 표정은 미지가 짓고 있었다.
사심없이 간절하게 바라는 눈동자. 기다란 속눈썹 아래 맑은 눈이 깜빡이는 법도 잊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여자의 이런 표정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배운 적 없는 진우는 시선을 바로 마주하지도 못 했다.

' ... 어떡하지. '

가방 속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현애를 향한 선물과 편지가 더욱 의식되면서도,
'어차피 사귀는 것도 아닌데 현애 눈치를 볼 필요가 뭐 있냐'라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언제 현애를 향해 사랑을 키웠냐는듯 마음 한 구석에 새로운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 친하게 지내자니깐! "
" 아. 응. "

거리를 두기는 커녕 미지의 손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아직 현애와는 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이, 어쩌다 한 번 실수로 스쳤던 경험을,
그때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멋쩍어했던 찰나를 씨앗으로 삼아 싹 터온 사랑을 아까까지만 해도 품고 있었는데
반나절만에 새싹이 뜯겨나가고 처음 보는 나무가 땅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씨앗도, 새싹도 필요없이 질긴 뿌리부터 구석구석.

" 여기가.. 교무실.. 교무실은 알지? "
" 알아도 가르쳐줘. 전부 다. "

홍당무처럼 붉어진 자신의 손이 뜨거워서 희고 보드라운 손이 그 열기를 달래주는건지,
아니면 긴장해서 차게 식어버린 자신의 손을 포근한 손이 달래어 열기를 보태주는건지,
맞잡은 손과 손 사이에 진우를 짜릿하게 만드는 정전기가 달려들었다.

" 여긴 양호실. 별건 없어.. 그냥 대일밴드랑 빨간약 정도? "
" 그래? 너 더워? 땀 흘러, 기다려봐. "

물어보지도 않은 시덥잖은 이야기까지 꺼내며 어느새 큐레이터라도 된듯 아예 학교를 해설하고 있다.
보통은 자신의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눈치채고 체면을 차렸겠지만 옆에서 '우와' '와'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랑스러운 이성을 둔 채라면 체면이 대수는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이 뭐라고 떠드는지도
모를 정도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진우의 이마를 달콤한 향기와 시원한 감촉이 순간 덮었다.

" 아. 고마워. "
" 더워? "

은은한 향기의 손수건이 이마를 쿡쿡 찍어대고, 눈앞을 가린 손수건이 들썩이면 그 너머로
안쓰러워 내려간 긴 눈썹과 삐죽이는 입술이 한 점의 조각처럼 또렷이 보였다.

" 이제 시원해? 응? "

이미 땀은 몇 번이고 닦아져 마른 손수건만 붙었다, 뗐다를 맴도는데 진우는 그 향기에 열사병이 걸린듯
묵묵히 손수건 너머로 보이는 미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길고 가느다란 다섯 손가락이 진우의 눈 앞에서 휙, 휙 오가자 그제서야 '아' 하고 바보처럼 진우가 초점을 찾았다.

" 뭐해? "
" 아.. 아니, 잠시 딴생각.. "

확실히 현애가 심어놓은 씨앗은 온데간데 없었다.
제대로 자리 잡은 나무뿌리가 그 흔적을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 되자 2학년 도미지의 정식 등교일 첫 날부터 학교는 소란에 쌓였다.
빼어난 미모가 가십거리가 되어 쉬는 시간마다 미지를 보기 위한 시선들이 몰려들었다.

" 야, 진우야, 넌 관심 없냐? 전학생 보러 안 갈래? "
" 무슨 유난을 떨어.. 그냥 전학 올 수도 있지. "
" 오- 완전 일편단심이네? 니 여신은 현애냐? "
" 미쳤냐,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
" 너 저번 주에 고백한다더니? 했냐? "
" 고백은 무슨 고백이야. 전학생이나 보러 가세요 그냥. "

'병-신들,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쉬는 시간마다 아주 전교 단위로 난리냐.
난 벌써 손까지 잡았다고. 아무나 손 잡고 다니는게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 진우야! "

남녀합반도 아닌데 자신을 부르는 여자 목소리에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진우가 화들짝 고개를 돌리자
밝게 웃는 예쁜 얼굴 뒤로 우글거리는 남학생들의 시선이 함께 쏟아지고 있었다.

" 어, 어.. 미지야.. 아니, 도미지. 왜..? "
" 몇 반인지 물어보는 걸 까먹어서 너 찾으려고 2학년 반 다 돌았어, 여기였구나? "

'저 찌질이는 뭔데 쟤랑 벌써 달라붙냐?'
'존나 나대네'
'야 저 새끼 이름 뭐야? 쟤랑 아는 사이냐?'
'쟤 중학교 때도 공부만 하던 놈인데'
'저거 그 2학년 여자 중에 김현애라는 애하고 친할건데?'
'새끼 아무데나 집적대는가보네'

뜻밖의 군중에게 보여지는터라 예민해진 신경이 듣지 말았으면 좋을 소리까지 제대로 포착하고 있었다.
평범의 오차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는 진우가 미의 여신과 함께 있단 것만으로 신들의 성역을 탐낸 죗값을
치뤄야 할 상황이다. 덕분에 말을 얼버무리며 반가운 티도 못 내고 쉬는 시간이 몽땅 흘러갔다.

' 미치겠네.. 좋은건지 나쁜건지.. '

물리 교과서를 무심코 몇 장 넘기다 교과서 귀퉁이에 쓰여진 '현애'를 보곤 짐짓 놀라 줄을 벅벅 그어버린다.
집에 포장 그대로 놔둔 선물과 편지가 생각이 나자 마침내 머릿속도 줄을 벅벅 그어버린다.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일들의 연속.
미처 잊기도 전에 몇 페이지 더 가지 않아 현애가 고백을 받아준다, 받아주지 않는다를 두고 점쳐본
낙서가 쏟아진다.



김현애 17:51
[ 진우야 이번 주 영화 같이 보러가자 ]

진우에게 현애가 먼저 영화를 보러가자고 제의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불과 수 일 전까지의 진우였다면
환호를 지르며 기뻐해야 마땅했겠지만 혼란으로 가득찬 지금의 진우에겐 답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현애와 남녀 사이의 친구로 지내며 조금씩 키워온 사랑을 고백하기 직전 멈추고 집에 가져다 놓은 편지와 선물,
그리고 좀 더 가까이 한 발 다가오는 현애, 그러나 변수로 등장한 미지.
현애를 생각하면 두근거렸던 가슴이 미지를 생각하면 벌컥거리니 머리보다 빠른 심장 덕분에 찾아온 혼란이
진우의 머릿속을 어두운 밤으로 이끌었다. 어떻게 답해야할지가 문제다.

" 문자? 누구랑? "

진우의 어깨에 미지가 턱하니 얼굴을 올리자 긴 생머리가 하늘하늘거리며 스마트폰 화면까지 닿았다.

" 아. 친구. "
" 그렇구나. "

현애는 야자를 하는 반면 진우와 미지는 야자를 하지 않았고, 그덕에 미지는 자주 진우에게 함께 가기를
제안했다. 진우로선 거절할 구실도 이유도 없었다.

" 우리 집.. 왔다갈래? "
" 집..? 집? 부모님 안 계셔? "
" 늦게 오셔. "

초등학생 때 반 친구 생일파티를 제외하곤 여학생의 집에 가본 적 없는 진우였기에 크게 당황스러웠지만
잠시야 뭐 어떻겠냐고 여기며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영화 보러가자는 현애의 문자엔 답변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있는 집에 가자는 미지의 요구엔 응하는 자신이
어딘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 열쇠도 안 걸어놓고 다녀? "
" 깜빡하고 안 잠궜나봐. "
" 바보야, 요즘 얼마나 사건사고가 많은데. 문단속 잘 해. "
" 걱정해주는거야? 후후. 조금만 기다려, 나 땀을 너무 흘려서 샤워부터 해야겠다. "

'샤.. 샤워?'

무슨 망상을 하는건지 속으로 자신을 타이르며 진우는 책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소파 외엔 특별한 가구가 없다.. 식기대에 설거지한 그릇 정도는 말려지고 있을 법도 한데
주방부터 거실까지 텅텅 빈 것이 사람 셋이 사는 집이라고 믿기엔 너무도 허전했다.

' 무슨 집에 텔레비전도 없냐.. 수도승인가 무슨. '

그 와중에 쏴아, 하고 들리는 물소리가 야릇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물줄기가 곡선을 타고 내려가는 상상을 하자 집안의 살림살이는 속세의 이야기일뿐,
여자와 단둘이 있는 집에서 그녀의 샤워 소리를 듣는 지금 상황이야말로 궁리할만한 주제가 아니겠냐며..

눈을 꼭 감고 살색 상상 속을 헤매던 진우가 수건소리에 감은 눈을 번쩍 뜨자,
상상하던 살색이 눈 앞에 천연색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 으앗! "

자신의 앞에 다소곳이 선 채 머리를 한 쪽으로 늘어뜨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있는 미지.
어깨에서 허리, 허리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휘어지는 곡선을 채 다 훑기도 전에 진우는 바짝 엎드렸다.

" 이러면 안 돼? "
" 무.. 무슨 말이야? "
" 내가 이러는게 싫어? "
" 싫, 싫다는 것보다, 왜 벗고 있는거야? "
" 빨래가 덜 말라서 입고 있을 옷이 없는걸. 속옷은 입었어, 눈 떠도 괜찮아. "

그 말에 '야호!'하고 눈을 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면 안 돼?'라는 말이 몇 번이고 다시 들려왔다.

'이러면 안 돼냐고? 그럼 자기가 그러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일부러? 이게 무슨..'

" 진우야. 나 쳐다봐. "
" 옷.. 입었지? "

설마 속옷 차림이겠냐며 진우가 눈을 뜨자,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로 자신을 향해 두 팔을 살짝 벌린 미지가 눈 앞에 서있었다.

" 히익! "
" 내가 이러는게.. 싫어? "

충격에 익숙해진 탓인지 진우는 점점 미지를 똑바로 마주하는 게 쉬워졌다.
대담하게도 미지의 얼굴부터 목선을 따라 전신을 똑똑히 쳐다봤다.

" 진우야. 나.. 너 좋아해. "

진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제 겨우 한 달 된 사이에, 사귄 것도 아닌데, 이래도 되는거야?'

" 나는 이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이야. 안아줘. "

몇 년을 덤덤하게 지내다 손끝 한 번 스치면서 겨우 서로를 이성으로 인식했던 현애와의 일이 바보 천치로
느껴질만큼 과감한 고백이었다.

" 미, 미지야, 우린 아직 어려. "
" 후후후. "

진우가 앉은 자리 옆에 다리를 기울인 채 나란히 앉은 미지가 진우의 어깨에 늘 해왔듯 얼굴을 올렸다.
그리곤 속삭였다.

" 나 샤워할 때, 무슨 생각 했어? "

'니 벗은 몸!'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진우는 필사적으로 다른 주제를 떠올리려 애썼다.

" 그.., 이 집 왜 소파 밖에 없어? 다른 가구는 안 보이는데.. 큰방에 있는거야? "

그러자 미지의 표정이 성난 살쾡이처럼 일그러졌다.

" 내 전부를 앞에 두고 그런 헛소리 하기야? "

미지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넋을 잃은 진우가 그녀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흠모하는 마음이 뒤죽박죽 섞인 채로
쳐다보았다. 양처럼 고분고분, 더우면 차게, 졸리면 눕게 해주던 그녀의 여태까지 모습에선 볼 수 없었던 반전이었다.

미지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점점 다가왔다.
두 손가락으론 지도 위의 컴퍼스를 놀리듯 쿡, 쿡, 찍어가며 점점 허벅지로부터 진우의 가슴팍을 향해갔다.
공포와 환희, 절규와 환호, 손가락의 남북극이 좌표를 찍을 때마다 희노애락이 피부를 뚫고 전해졌다.
진우의 머리가 아찔해지며 어떻게 되든 될대로 되라고 여길 무렵,

- 띵동 !

" ...? "

카카오톡 소리, 진우도 미지도 그 소리에 교복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진우가 살며시 핸드폰을 꺼내 비밀번호를 풀고 문자를 열자 잽싸게 미지가 낚아챘다.

김현애 19:35
[ 꼭 영화 아니라도 좋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 얘.. 너랑 소문이 좋게 나고 있더라..? "
" 내 핸드폰 돌려줘! "
" 좋아, 줄게. 대신 얘하고 만나지 마. 문자로 보내. 들을 말 없다고. "
" 그건 안 돼, 억지잖아. "
" 날 옆에 끼고서.. 다른 여자도 마음 속에 품고 있단거야? "
" 너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너 제정신이냐? 나 갈게. "

진우가 거세게 밀어붙이자 그래봤자 여학생에 불과한 미지가 힘없이 핸드폰을 빼앗겨버렸다.

" 진우야. 진우야- "

진우가 다급히 집을 나서버리고, 속옷 차림의 미지만이 집안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 호호호. "

아무 일도 없었지만 모든 일에 만족한 것처럼 미지가 웃음을 감추질 못 했다.
소파 밖에 없는 집안에 높은 웃음소리가 공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구미호가 아홉꼬리를 살랑이듯 거리의 네온사인이 휘둥그레,
도깨비불이 되어 세상을 적시러오듯 진우에게로 달려든다.

" 헉, 헉, "

고개를 세차게 저어대자 겨우 빛무리가 '24시간 찜질방'이니, '궁전모텔'이니 하는
활자가 되어 모든 게 허상이었다고 고백한다.

" 우웩. "

' 모든 게 비틀어졌어, 몇 년간의 짝사랑이 틀어지더니, 두 보름에 걸친 사랑도 불장난이야,
도미지, 뭐하는 애지? 첫 만남부터가 의문투성이였어. '

세상이 다시 일그러진다.
지나다니는 짧은 치마 입은 여자들 골반에 아홉 개의 꼬리가 돋아난다.
눈 밑에 시뻘건 화장을 귀까지 늘어뜨린 채로 진우를 향해 입맛을 쩍쩍 다신다.

' 내가 왜 이러지, 여우에 홀린다는 게 이런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

밤거리의 네온사인은 도깨비불이 되어, 여자들은 구미호가 되어,
그 아홉꼬리에 도깨비불이 묶여 사방팔방으로 쥐불놀이가 시작된다.
시선을 둘 곳조차 없고 멀미는 더욱 심해진다.
속을 몇 번이고 게워내도 마찬가지..
마침내 의식이 없다.

김현애 20:49
[ 예, 아니오라도 답해줘 ]



진우가 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병원에 급히 실려간 뒤 퇴원까지 했지만 학교는 나갈 수 없었다.
원인 불명의 고열과 두통이 몸을 지배하는 탓에 학교에 차마 갈 수 없었다.
물론 현애의 문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진우는 여전히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환영에 시달리고 있었다.

긴 생머리, 순진한 미소로 웃으며 천천히 손을 흔드는 한 여자,
바람이 불어오고, 긴 생머리가 한 번 얼굴을 덮었다가 드러낼 즈음이면
두 눈은 시뻘건 적빛으로 번져 광채가 양옆을 지나 솟아나온다.

' 나를 사랑하게 한 건 너 자신이야, 네가 사랑했던만큼 나도 널 사랑해줘야하고,
네 사랑에 갚아주는만큼 너도 날 사랑해야해, 그때만큼은 날 아낌없이 베어물어가,
너의 사랑만큼 난 생존할 수 있고 나는 다시 그 사랑만큼의 사랑을 주는거야,
상쇄, 상쇄란 말이야! 어느 한쪽이 벗어나려거든 용서 못 해,
내게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야.. 사랑없이 생존할 수 없는 나에게,
네 생존을 줘.. '

' 마지막 기회야, 지금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날 사랑해주지 않으면 상쇄하지 못 해,
그럼 내가 가져갈 건 하나 밖에 안 남았겠지? '

네, 사랑을 드려야죠, 당연히 드려야죠!
사랑한다구요, 사랑한다구요!

" 으아악-! "
" 진우야, 열이 아직 끓어, 진정하렴! "
" 만나야 해, 만나야 해, 아직 있을거야, 상쇄, 상쇄해야해! "
" 제발 그 놈의 상쇄 소리 좀 그만해, 그게 대체 뭔데! "
" 제기랄, 비키라고! "

앓아누웠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완력으로 어머니를 내팽개친 진우가 집밖으로 뛰쳐나왔다.

" 진, 진우야! "

진우의 충혈된 동공이 씰룩거렸다. 눈 앞에 서있는 건 현애였다.

" 학교를 통 안 나와서, 전화해보니까 어머니께서 너 아프다고 하시길래.. 병문안 왔어. 몸은 좀 어때? "
" 비켜. "
" 얘기 좀 해.. 너 지금 괜찮은거야? 눈이 빨개, 열은 왜 이렇게 많이 나? "
" 비키라고! 비켜! "
" 아얏, "

현애 역시도 진우의 완력에 그 자리에 넘어졌으나 현애의 손이 진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균형을 잃고 진우가 제자리에 쓰러졌다.

" 어디 간다는거야, 너 아프잖아, 내 말 좀 들어! "
" 상쇄해야해, 상쇄해야해! "
" 혹시 미지한테 가는거니? 미지라면 학교 안 나온지 오래 됐어, 너 학교 안 온 뒤로 줄곧!
혹시 너희 그동안에도 만난거야? 그러지마, 미지가 온 뒤로 너 정말 이상해졌어! "
" 미, 미지가 없어? 그럴리가 없어! 상쇄하지 못 하면! 씨발, 이거 놔! "

발목을 꼭 붙잡은 현애의 팔뚝을 진우의 이빨이 물어뜯었다.

" 아흑! "
" 놔, 상쇄해야해! 시간이 없단 말이야! "
" 절대 안 보내, 나 사실 너 많이 좋아해, 사랑해, 그래서 더 못 보내! "
" 집어치워, 난 가야한다고! "

진우의 주먹이 현애의 얼굴을 때릴 때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녀린 목이 춤을 추었다.

" 진우야, 정신 좀 차려, 응? 우리 예전처럼 돌아가자, 내가 먼저 말할게, 내가 더 사랑한다고! "
" 정신 나간 년. 꼴깝 떨고 있네! 잡아뜯어버리기전에 비켜어어어 "

현애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진우가 자신이 환영 속에서 본 쥐불놀이처럼
현애의 머리를 사방팔방으로 흔들어댔다. 현애는 비명과 함께 구미호가 추던 춤을 춘다,
현애를 사랑하던 애틋한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편지에 써내려가던 그 손이,
현애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고백을 연습했던 그 입이,
그녀를 헐뜯으며, 그녀를 쥐어뜯고 있는 별천지.

결국 현애가 제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진우는 다시 몸이 기억하는대로 미지의 집을 향해갔다.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 구미호와 쥐불놀이의 환상 속에서 더듬더듬거리며.

짤깍짤깍, 처음 왔던 날처럼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 왔어, 왔다고, 사랑해, 진짜 사랑한다고! 상쇄하자, 응? "

... 아무 것도 없었다.
딱 하나, 소파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건 여전했다.

" 도미지! 어딨어? 사랑해, 진짜야! "

없을게 뻔한 소파 밑부터 시작해서 아무 것도 없는 방을 미친듯이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

" 사, 사사,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니까! 왜 안 보여! 왜! 으아악!
나 죽을거야. 나 이대로 죽는거라고! 상쇄하지 못 한다면.. 내 목숨이.. 갸아아아아아! "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진우의 세상에 다시 어둠이 내렸다.




ㅡ ...


평범한 교실의 아침.
아침 조회를 위해 들어서는 담임 선생 옆에 퀭한 눈을 한 누군가 함께 들어온다.

" 진우야! "
" 어 박진우! "
" 야, 몸은 괜찮아? "

영문을 모르겠어.
어째서 내가 살아있는거지.
그 모든 건 꿈이었던걸까?

" 조용히 해, 음.. 진우가 많이 아파서 학교를 빠졌었는데 오늘부터 다시 나오게 됐다.
진우야, 자리에 들어가 앉아라. 그리고 너희들 수업시간에 떠들지 마라. 지금 학교 분위기 엉망이야.
그 전학생 실종부터 시작해서.. 어제 2학년 여학생 중에 현애라는 친구가 자살했다.
원인은 불명인데, 책상에서 유서가 발견됐고 내용은 아직 파악 중이라는구나.
하여간 그런 관계로 웃고 떠들 분위기가 아니니까 조심해라. 그 반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 1교시지?
1교시에 내가 들어올거니까 그렇게 알고 입 다물고 자습 준비나 하고 있어. "



저기 어딘가,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생기 넘치는 얼굴로 싱긋 웃고 있다.

"목숨값은 대신 받았으니 상쇄는 이룬 셈 칠게.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을 주는 사람의 목숨값을 대신 받기도 하거든.. 아아, 이 생명력.. 이 감칠 맛..!"






ㅡ 미지의 상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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