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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어느 왕족의 인생 롤러코스터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21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5
조회수 : 110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16 16:18:28

여기 곤장을 맞고 있는 사내가 있습니다. 곤장이 한번 떨어지고 다시 올라올 때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관아를 울리고 어느덧 엉덩이 피멍이 들고 어느새 피범벅이 됩니다. 곤장을 다 맞고 절뚝거리며 나온 그는 훌쩍거리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비정한 현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누구하나 하소연할 때도 없었습니다. 그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순간 곤장이 아닌 형장의 칼날이 그의 목숨을 가져갈테니깐요. 그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거리로 나갑니다. 고된 머슴살이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행상이나 하면 나을 줄 알았지만 고된 현실은 그를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을불. 한 때는 왕족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일반 평민보다도 못하고 오히려 목숨마저 쫓기는 도망자일 뿐이었습니다. 평범하게 호의호식하면서 걱정 없이 살 수도 있었던 그의 인생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은 그의 백부인 봉상왕이었습니다. 백부인 봉상왕은 자신의 숙부이고 전쟁 영웅인 안국군 달가의 인기를 두려워하며 292년 죽입니다. 한번 표출된 봉상왕의 이러한 의심병은 더욱 심해져 293년에는 자신의 동생인 돌고에게 반역 혐의가 있다하고 그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을불의 나이가 그 때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여튼 세상물정 모르던 젊은 왕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도망치던 을불은 촌구석이나 다름없는 수실촌의 음모(..)라는 부잣집에 머슴으로 살게 됩니다. 남을 시켜보기만 해봤지 아랫것들이나 하는 일은 전혀 해본 적도 없던 을불은 갖은 수모와 고생을 당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여름에는 주인집 연못의 개구리가 시끄럽다고 주인이 달달 볶아서 밤새 개구리 울음 소리가 안 나게 연못에 돌을 던지는 일도 하고 춥디 추운 겨울에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고 정말 지금 기준으로도 고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을불은 1년만에 그의 집에서 도망쳐 나와 역시 고생은 하지만 그래도 돈은 좀 벌 수 있는 소금장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금장수가 된 이후에도 그에게 고난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압록강변의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집주인 할머니는 그에게 원래 숙박비보다 더 많은 소금을 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성격이 원리원칙주의자였는지 아니면 그 할머니가 너무 강짜를 부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매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단호박도 아니면서 을불에게 너무 단호하게 거절당한 그 집주인 할머니는 앙심을 품고 을불이 가지고 온 소금가마니에 신발을 넣고 곧장 다음날 관아로 가서 을불을 절도범으로 고발합니다. 순식간에 현행 절도범이 된 을불은 곤장을 맞고 벌금으로 소금까지 몰 수 당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호의호식하던 왕족이 이제는 도망자에 현행 절도범까지 된 것입니다. 이 때 쯤되면 그가 자기를 왕족이라고 주장해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형법상 절도범은 훔친 물건의 12배(?!!)를 벌금으로 내야하는 일책십이법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무려 약 7년간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그 사이에 봉상왕이 보낸 추격대에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간신히 목숨이나 연명하고 힘들게 살고 있을 무렵 그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그것은 당시 국상(지금으로 말하자면 국무총리?)인 창조리가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도 고된 일을 당하고 사람에게 배신도 당한 을불은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고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그리고 창조리를 진짜로 만나면서 그의 의심은 떨어져나갔습니다.

 

 

창조리는 봉상왕 3년에 국상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봉상왕의 폭정을 이리저리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봉상왕은 들어쳐먹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리와 우박으로 농사가 개판이 됬는데도 불구하고 궁실을 증축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그 사이에도 지진, 가뭄 등으로 농사가 개판이 됐는데도 그는 별로 신경쓰지도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참다참다 못한 창조리는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봉상왕을 몰아내기로 하고 결국 폭군의 끝이 그러하듯 유폐되고 그는 유폐된 상태에서 태자와 함께 자살을 합니다.

 

 

봉상왕이 죽고 을불은 드디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무려 7년간의 고난 속에서 그는 스스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무수히 했을 것입니다. 그를 항상 위협하는 봉상왕의 마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비루한 삶 등등 하지만 그는 그것을 이겨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 그에게 빅곤장을 먹인 압록강변 집주인 할머니가 코로 소금을 먹었던가 안 먹었다가 ... )

 

 

왕위에 오른 그는 잠시 봉상왕의 폭정으로 인하여 엉망이 된 고구려 내부를 정비합니다. 그리고 내정을 정비한 그는 칼날을 꺼내들고 정력적인 정복 전쟁에 임합니다. 게다가 봉상왕 때 본진을 바로 치는 러쉬를 감행해서 봉상왕도 수도를 버리고 신성으로 부리나케 도망가게 만든 모용외의 모용선비(물론 그 때 신성태수 고노자의 도움으로 모용외는 개발살이 납니다만 이 사건은 모용선비가 고구려도 간신히 막아낼 정도로 커졌음을 의미합니다.)를 견제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미천왕 3년 현도군 침략을 시작으로 미천왕 12년에는 서안평을 점령하고 14년에는 낙랑군을 축출하고 14년에는 대방군을 축출하고 16년에는 현도성을 공격하고 19년이 되는 해에는 평주자사 최비의 계책으로 우문선비, 단선비 등과 연합하여 모용선비를 공격하여 그 땅을 분할하려는 작전에 참여합니다. 연합군은 모용선비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했지만 모용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그의 계략으로 연합군의 공격은 실패로 끝납니다. 이 공격이 성공했다면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보다 더 일찍 요동에 진출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요동은 모용선비가 냠냠하고 미천왕 사후에는 다들 아시듯 고구려 역사상 최대 치욕들 중 하나를 안겨줍니다. 이 작전 실패 이후에도 모용외와 미천왕은 자주 충돌하였지만 양측은 결정적인 승기는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후조 등에 사신을 보내어 모용선비를 견제하는 등에도 힘썼지만 큰 성과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외정에 힘쓰던 그는 재위 30년 5개월만인 331년 2월 죽음을 맞이합니다. 우리 역사상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겪어본 왕은 없었을 것입니다. 왕족에서 머슴이자 도망자로 그리고 다시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고난을 겪었고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었습니다. 백성들의 어려움 삶을 함께 체험을 했으니 내정분야에서도 잘 했을 거라 추정이 됩니다만 안타깝게도 삼국사기에는 그의 내정기록은 없다시피한게 조금 아쉬울 뿐입니다.

 

 

여담 : 을불을 왕위에 올린 1등 공신인 창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1등 공신으로써 대접받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왕마저 갈아치우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였으니 어쩌면 토사구팽 당했을 수도 .... (미천왕 초창기 기록에 괴이한 기록들이 이를 암시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어찌됬든 추측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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