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내 성향은 정치는 중도보수요, 노오오오력만 하면 그래도 살만하다고 생각하던 자수성가 꼰대기질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성공해 본 경험도 있고,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나아질 수 있는지,
머릿속에 사업아이템들이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내 나라를 떠나서 살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고, 돈 버느라 바빠서 해외여행도
아이 돌이 지나서야 어머니 모시고 간 오키나와가 처음이었다.
영어도 "아.. 아이 엠.. 어 스튜던트"에서 어가 들어가는지 안들어가는지도 가끔 헤깔렸고
그나마 어릴 적 윤선생 영어라도 꾸준히 해서 그런지 귀는 좀 뚫렸지만 영어가 목구멍앞에서 턱하고 걸려
입 밖으로 나오길 극구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내가 이민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세월호 사건이었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내 가게의 로고에는 모두 노란 리본이 들어간다.
정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면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는 DJ의 말씀을 따라
잊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내 가게 물건 보고
"이거 혹시 세월호 리본이에요?" 하고 한 번이라도 더
그들을 기억하길 바라기 때문에.
아직도 그 날이 기억난다. 여느때와 같이 수업하고 있었는데 (박씨 당선되고 나서 뉴스 안봐서 사고 난줄도 모름)
중1짜리 아이가 나한테 "쌤 막 배 가라앉아서 수학여행가던 애들 빠졌대요" 소리를
"야 ,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수학 한 문제나 더 풀어. 핸드폰 내놔. "로 응수했었던 그 날을.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애가 날 얼마나 속물로 봤을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겐 '비행기가 추락한 것도 아니고 배가 기울었다는데 설마 구조도 못하겠어?'라는 알량한 믿음이 있었다.
대한민국이 설마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닐거라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구조자 수는 0에서 변하지 않았고, 오래간만에 본 뉴스에선 하루 종일 세월호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지만
결국 그 아이들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차가운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멘붕.
배가 기울어도 구조도 못해줄 정도로 이 나라가 엉망이었어? 하는 실망과 뒤이어 있었던 지방선거 투표율이 50% 대인 것을 보고 한 번 더 멘붕,
새누리당 압승 결과에 두 번 더 멘붕..
이 나라는 .. 안 바뀌겠구나.
사회시스템에 대한 실망. 그것이 첫번째.
그리고 그 즈음.. 난 쌍둥이 유산 후 하루 쉬고 이어지는 수업으로 한 달 넘게 하혈을 하고 있었다.
애들 시험기간이라 쉴 수도 없었고.. 그 뒤로 3달을 생리를 안하더니 10kg가 갑자기 늘었다.
오랜만에 통화한 동생과의 전화..
"누나 나 낼부터 휴가야,."
"응 그래.. 며칠이나 쉬니?(한 2~3일 쉬나보다)"
"4주...."
"헉.."
"원래 6주인데.. 여기가 해변가라 축제때문에 2주는 겨울에 따로 쉬어.."
"유급이니...?"
"유급이고.. 놀러가라고 보너스도 줘.."
경쟁에서 이기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는 내가, 갑자기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애들 시험기간이라고 매일 12시까지 수업하고 주말에도 수업하고
유산해도 하루도 제대로 못 쉬고 수업하고.. 아들 얼굴도 시험 기간엔 한 달에 한 번 볼까말까 한 내가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이게.. 사람의 삶이야?'
내 새끼 내 손으로 품어 키우지도 못하고 아파도 못쉬고 하루하루 수명 깎아서 돈 벌어
월 1000 벌어도 이게 성공이라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사는게 맞는거고, 그게 맞다고 가르치고 있었으니까.
너희도 나처럼 살어.
공부해.
경쟁해.
이겨.
그래야 나처럼 성공하지.
처음으로, 삶에의 회의가 들었었다.
그리고 그 즈음.. 아이가 이상했다.
80일부터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주일에 한 번, 시험 기간엔 한 달에 한 번 만나
돌 지나서까지도 내가 엄만줄도 몰랐던 내 아들과 의사소통과 아이컨텍이 안된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그 즈음.
근처 치료 센터에 데려갔지만.. 자폐 스펙트럼이 의심되나 아이가 아직 어려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어렵다.
솔직히 해 줄게 없다. 요맘때 애들 이런 애들 많다.. 그 때 내 아들 22개월이었다.
당연히 잘 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열심히 돈 벌어서 좋은 분유, 좋은 옷, 좋은 장난감 사다 주면
입고 먹고 놀고 알아서 잘 클 거라고, 어차피 주 양육자는 외할머니니까, 엄마인 난 좀 안 친해도.. 할머니랑 애착 좋으면 됐지..
좀 두고 보기로 했었다.
그러면서..
"자폐는 아닐거야. 자폐 애들이 하는 것도 하지만 안하는 것도 하는데? 얘는 경계성일거야.
그래도 성격이 특이한 편이니까 한국에서는 키우기 어려울 거 같아. 그리고 크면 군대 보내야 하는데 그건 싫어!
학교 가면 왕따 당해서 자살할거고 군대가면 구타당해서 의문사 당할거야.
또 세월호 같은 일이 생기면 나라는 내 편이 아닐거고!"
이런 생각을 했고, 다행히 남편도 내 생각에 동의해 줬다.
그 뒤로 1년 이상 주말마다 이민박람회, 유학박람회, 이민 카페 여러군데를 돌아다니고 설명회 나가고 하는 생활이었다.
원래는 캐나다로 갈 생각이었고, 수소문해서 남편을 병아리 감별사 학원까지 보냈었다.
결국 다른 이민 에이전트한테 병아리 감별로는 이민도 안되고, 차라리 이민 가려면 변두리 모텔 같은데 부부가 관리자로 취업해
2년 살다 영주권 신청한 뒤 공부하는게 낫다는 조언을 듣고 캐나다 이민은 보류했었다.
그 즈음 뇌졸증 자가치료 하신다고 캐나다, 동남아, 뉴질랜드, 호주 등등 돌아다니셨던 울 아부지와 상담,
"너 캐나다 가면 얼어 죽어!" 라는 아버지 말을 듣고 "갈거면 뉴질랜드 가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뉴질랜드로 급 전환..
호주,캐나다, 미국같은 메인 국가들보다는 뉴질랜드를 다루는 유학원이나 카페가 극도로 적어
정보를 찾기도 힘들었고.. 구글 검색한 것보다 더 모르는 관련 에이전시들 때문에 실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드디어 뉴질랜드 통을 한 명 찾아서.. 그 분을 통해 남편 유학 후 이민 진행중이다.
남편이 전공에 맞는 경력이 있고 그 직종이 이민 카테고리에 있으면 좋을 텐데
음대 나와서 롯데제과 다닌 경력, 학원에서 영어 가르친 경력으로는 이민 불가..
그래서 가장 영어 장벽 낮고 영주권 잘나온다는 요리로 남편 먼저 보내고
남편이 잡서치 비자를 받고 취업을 하면 나오는 배우자 오픈 워크 비자 받고
내년 출국 예정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아이 학비는 무료이다. 의료도 무료이고.
원래는 내가 가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디자인 업계 3D업종이라 웹 디자이너 월급 200도 못 받는거 부지기수라고 하지만
뉴질에서 웹 디자이너 평균 연봉 8만불 보고 국비로 웹 디자인 배웠는데
작년 9월에 임신.. 그래서 급하게 남편으로 바꾸고..
이번엔 꼭 낳고 싶어서 수업도 안하고 꼼짝없이 누워만 있었는데..
6주에 아이 심장이 안 뛰어 계류유산 판정 받았다.
2년 연속된 유산으로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애들 가르치는 스트레스 때문에 호르몬 이상으로 조기폐경, 사실상 불임 진단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아이도 결국 자폐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참 힘든 인생이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견딜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철없이 자기 인생 낭비하던 남편 뉴질랜드 가서 잘 하고 있다는 소식 들을 만 하고,
아이도 작년부터 시작한 치료 덕에 이제 어지간한 말은 다 알아듣고, 화장실도 소변은 이제 거의 완벽하게 가린다.
작년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1시간 동안 계속 쳐다보고
"안돼" 라는 말에 분노발작해서 자해하고..
말 한 마디도 안하고 어디 데리고 다니기 너무 힘들었던.. 자기 손으로 음식도 먹어본 적 없었던
그냥 한 마리 어린 짐승같던 아이였는데
이제 "자자" 하면 놀던 장난감 제자리에 정리하고 불 끄고 문 닫고 누워 나를 쳐다보며 씨익 웃는 내 아이.
너를 위해서라면 뉴질랜드 아니라 칼림도어라도 못가겠느냐는 어미 마음이 그렇다.
학원 접은 이유가, 임신으로 쉬고 싶어 그런 것도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애들에게 거짓말을 하기가 싫었던 이유가 가장 크다.
"선생님, 공부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죠?" 라는 물음에
"아니. 그냥 영어 열심히 해서 외국나가. 그게 빨라." 라고 차마 말해 줄 수가 없어서..
시끄럽다고 당연한 이야길 하냐고 호통치는 양심이 많이 괴로웠었다.
이미 SKY 정원보다 특목고 자사고 정원이 넘쳤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 해봤자 인하대 수시 겨우 써줄 거고
니가 그 경쟁 다 이기고 SKY나와도 어차피 60%는 비정규직일거라고.
그거 안되면 그냥 최저임금 언저리로 받으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할거라고.
그 말, 차마 해 줄 수가 없었다.
9살때부터 가르쳐 벌써 23살이 된 제자가 있다.
고3때부터 바리스타 아르바이트 해서 학비도 제가 내고 다니던 똑똑한 녀석이었는데
바리스타 학원에서 강의도 하고 외부 출강도 하길래 그래도 월 200은 벌 줄 알았는데,
화상 입은 다리를 하고 카페에 나가서 일하고 한 달에 175시간 일 해도 120도 못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벙쪘었다.
남자친구는 군대에 가서 손가락 끝이 잘리고... 좋아하고 잘하고 하고 싶은 도예 그만두고
전기기술 배울거라고. 도예는 돈이 안되잖아요 하는 말에 아픈 속이 느껴진다.
음악하면 돈 못 번다고 그 나이 먹고 언제까지 음악할거냐고 하도 압박해서
인생을 걸었던 음악 그만두고 텅 비어버린 내 남편,
하고 싶은 일인데 돈이 안돼서, 박봉이라, 야근이 많아서.. 하고 싶고 좋아하고 평생을 꿈꿔왔던 일을 버리는 내 주변 사람들.
우리,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 새끼 내 손으로 안아키우고, 저녁엔 가족이 같이 밥을 먹고 주말이면 가까운 곳에 여행도 가고
시간도 보내는 삶이, 가면 갈 수록 너무 멀어진다.
물론, 부모님도 따로 계시는데 동생도 독일 나가서 올 여름에 영주권 받고
나까지 나가버리면 남아있는 내 부모는 어떨지 걱정도 되긴 했지만,
뉴질랜드는 어느 정도 성공 후에 일정 금액의 연봉을 달성하면(외벌이 7만, 맞벌이 9만불)
부모초청 이민이 가능하다.
말로는 안 오신다 하지만 어차피 영주권 받아놓고 왔다갔다 해도 되는걸..
적지 않은 나이에 이민 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려운 결정 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이민이 모든 일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한다.
모국에서 못하는데 남의 나라 가서는 잘 할거 같냐고.
그래 쉽지 않겠지. 가끔 버겁게 느껴지고, 영어 공부 어렵고 불안하다.
그래도 어제 유치원에서 아이 손을 잡고 돌아오는 내 뒤통수에 꽂힌
"자폐증 환자를 뭐하러 키워?"라는 말을 곱씹으며
엄마 왔다고 신나서 업된 아이가 복도를 뛰어가자
"헐~ 또라이다!" 하면서 피하는 초등학생을 보며
이를 악물어본다.
내 아들은 그런 시선 속에 살게 하지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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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script.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하면서 뉴질랜드의 자폐아에 대한 복지글을 찾아보았다.
대부분 찾기 어려웠지만 단편적인 내용들이나마 알 수 있었다.
호주는 아이가 autism 이 있으면 영주권 신청 반려된다 하고.. 그래서 뉴질랜드 간 사람도 있고..
아이가 산만해 유치원 수업이 방해되자 교장선생님에게 미안하다 하는 자폐아 어머니에게
교장이 웃으면서
"괜찮아요. 어차피 다른 아이들도 겉으로 드러난 장애가 없을 뿐이지 인간은 어딘가가 다 부족한 부분이 있어요.
그게 겉으로 드러나나 안 드러나나의 차이인걸요."
했다는 말..
우리나라보다 적어도 50년은 앞서있다는 뉴질랜드의 장애인 복지가 내 아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라본다.
내 아들이 나보다 하루 일찍 죽지 않아도, 가지고 태어난 수명 다 누리고 가도록
국가가 돌보아 준다면 내가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갈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아이 치료 바우처 신청하러 갔더니 주민센터 직원이 예산 없어서 신청 안 받는다고
다른 건 이미 기간이 지났다고.. 왜 이런 거 안내가 없냐고 했더니
"그건 엄마가 알아서 해야죠" 하는 이 나라보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