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지기님의 글이었습니다.
삼국시대 경제와 관련한 아기자기한 만화였습니다. ^^
보고 나서 다른 편들도 찾아 보았는데 보다보니..
제가 보기에 수정해야 할 것이 몇개 있어 정리해보았습니다.
따...딱히 딴지 걸려는 건 아니구요....
제가 아는 한에서 정말 아니다 싶은 것만... 음...
고조선 편에서 기자조선을 은나라왕족이라 하고
위만을 중국사람이라고 딱 못 박아 쓰셨던데,.
기자조선은 역사적 실체가 불명확하여 교과서에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첫째, 기자조선 건국연대가 은주혁명 시기 기원전12세기인데,
선진시대 문헌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거나 조선에 봉했다는 내용이 없다가
기원전2세기 이후인 한나라 이후 문헌에서는 기자 동래 기록이 나옵니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가 조선을 정복한 후 지배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필 내지 왜곡했을 수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둘째, 기자의 무덤이 하남성일대에 남아있습니다.
셋째, 기자가 조선왕이 되었을 정도라면 그리고 기자가 조선에 기술을 전파했다면
유물이 급발전한다거나 하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고고학적으로 전혀 없습니다.
만약, 기자가 설사 정말 조선으로 왔더라도 개인적 망명일 뿐,
조선왕으로 봉했거나 한 것은 중국 측의 일방적인 기록일 뿐이란 거죠.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불명확하기에 수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인식>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조선 측은 소중화의식에 의해 중국문화를 가져왔다는 전설의 기자를 역사적으로 받들었던 것이 있고,
중국명나라 측은 중국왕조와 대립했던 고구려를 잇는 고려왕조가 교체된 후
중국이 조선왕으로 봉했다는 전설의 기자를 잇는다는 시각으로 조선을 대한 것은 있습니다.
이는 시대상황에 따른 역사인식의 차이로 기자가 조선왕이 되었다는 사실여부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위만의 경우 연나라에서 넘어왔으나
조선이 연나라에게 2천여리(요서~요동) 영토를 빼앗겼을 때, 복속된 옛 조선인일 수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가 호복을 입었단 것 만으로는 불충분한 근거이지만,..
어쨌든 위만이 중국인인지 조선인인지는 불명확합니다.
더군다나 연나라는 중국의 변방으로서
초기만 해도 하북성은 중산국,동호족,숙신족 등의 오랑캐의 땅이었습니다.
거기에 주왕이 제후를 봉하면 가서 오랑캐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하면서 나라를 개척한거죠.
연나라 지배층은 주왕실과 중앙에서 봉한 제후와 그 일족이겠지만
연나라 주민의 구성에는 분명 동호,숙신,조선이 있었습니다.
즉, 교과서에서도 위만을 딱 중국인이라고 쓰지는 않습니다.
"고구려는 7세기에 들어서야 사서를 썼네요"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고구려는 이미 건국 초부터 문자(한자)를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7세기 영양왕의 역사편찬은 <신집(5권)>인데..
이것은 고구려 초기 역사서 <유기(100권)>을 요약한 것이다라고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즉, 7세기에 와서야 쓴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겁니다.
백제가 4세기에 <서기>를 썼고
신라가 6세기에 <국사>를 썼습니다.
고구려는 연대는 모르나 <유기>가 있었고
7세기에 영양왕이 <신집>으로 다시 썼습니다.
왜? "고구려는 7세기에 들어서야"라는 약간 이상야릇한 어감으로 쓰신걸까요...?
단순오류입니다. 백제 근초고왕은 340년이 아닌 346년에 즉위했습니다.
이건,, 음.. 칠지도를 그냥 저 칼로 그리시지 마시고
일곱가지의 실제 칠지도 모양으로 그리시는게 더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왜왕을 원숭이로 그리신 건 괜한 반발을 받을까 우려됩니다.
이 그림도 코믹하게 그리시려 한 의도인 것 같긴 한데..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을 잃은 성왕이 50명만 데리고 쳐들어가려다 죽었다. 50명이라니 제정신?>
이라는 건 코믹을 떠나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백제에게 있어 한강유역은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실로 백여년 만에 되찾은 고토이자 옛 도읍이었습니다.
신라의 갑작스런 나제동맹 결렬로 한강유역을 잃은 백제는 전력을 쏟아 신라에 반격합니다.
태자 부여창이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성들을 함락시키는 등 승기를 잡은 듯 했던 전투였습니다.
여기에는 가야군과 왜군까지 합세하여
4세기경부터 이어진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총동원된 세기의 전투였습니다.
이때 성왕 부여명농은 태자를 응원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신라에 급습으로 갑작스레 비참하고 원통하게 죽습니다.
전투에서 이기고 있던 태자 부여창은 갑작스런 부왕의 죽음으로
신라에 대한 응징을 다 못 하였죠.
그런데 위의 만화에는 전후사정 다 빼먹고 <성왕 50명 제 정신?>
.... 좀 그렇습니다.
태자 부여창이 위덕왕으로 즉위해 계속 신라를 공격했고
의자왕 때는 신라의 경남일대 40여성 함락시키는 등
백제는 신라에 대한 보복을 이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