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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각(無樑閣)양식의 용도와 의미
게시물ID : history_120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루랄라울루
추천 : 3
조회수 : 263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15 22:41:29
무량각양식이란 한자를 해석해 풀이하면 대들보가 없는 지붕의 양식이다. 무량각양식은  대들보도 없지만, 더 특이한 점으로 용마루장식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원나라후기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이후 중국에서 주로 정원의 건물이나, 사당의 양식으로 유행하다가 우리나라에는 조선시기 궁궐의 지붕양식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무량각 양식은 용마루가 없이 지붕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서까래를 고정하기 힘들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연침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 기법이 손쉬운 기법이 아니다. 즉, 용마루 없이 지붕을 만드는 것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1.JPG
<경복궁 강녕전> ->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양식이다.
자~ 우리나라에서는 무량각 양식이 오로지 궁궐에서만 보인다. 무량각 양식이 사용된 건물을 보면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이다. 이 전각들은 왜 무량각을 사용했을까? 이 전각들의 공통점은 경복궁에서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제외한 전각들이 왕비의 침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량각양식이 강녕전의   경우처럼 왕의 전각에서 쓰였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교태전의 경우처럼 왕비의 침전에 사용된 것이 옳은 것인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 경복궁을 제외한 다른 궁궐의 전각인 대조전과  통명전의 역할을 알아보자.
 
  (1)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창덕궁 대조전이 왕비의 전각이라 주장되는 이유는 그 이름에 있을 것이다. 대조전의 뜻은 큰 것을 만드는 전각, 즉 태자를 만드는 공간이란 것이다. 하지만 대조전의 구조를 보면 왕비만의 공간은 아닌 것 같다. 대조전의 구조를 보면 왕의 침실과 왕비의 침실이 같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많은 기록이 대조전에서 왕이 거처하면서 일을 한 사례들이 있다. 그 예로 효종 21권, 10년(1659, 기해) 2번째 기사에 “상의 병이 위독하여 편전(便殿)에 나아갈 수 없었다. 약방이 대조전(大造殿)에 들어가 진찰하였다.”란 말이 있듯이 대조전은 왕의 침전으로도 사용된 전각이다.
 
  (2) 창경궁 통명전(通名殿)
  통명전도 창덕궁 대조전처럼 왕비의 처소로만 사용된 것이 아닌 왕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이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예로 경종 14권, 4년(1724, 갑진) 2번째 기사에 “임금이 창경궁(昌慶宮) 통명전(通明殿)으로 이어(移御)하였다.”란 글이 있다. 즉, 왕이 창경궁 통명전으로 옮겨서 살았다. 이것을 보아 통명전도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으로 사용된 전각이다.
 
  창덕궁 대조전과 창경궁 통명전은 왕과 왕비가 같이 생활하는 궁궐의 내전이였다. 경복궁의 경우 내전으로 쓰이는 전각은 교태전으로 알려져 있다. 즉, 우리에게 왕비의 전각이라 알려져 있는 공간들은 내전으로 왕비뿐만 아니라 왕의 거처로서도 사용되진 공간이다.  그렇다면 무량각양식은 궁궐의 건물에서도 내전에서만 사용한 건축양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왕의 침소라고 알려져 있는 경복궁 강녕전은 무량각양식을 사용했으며, 경복궁만 내전이 2개인 문제가 남게 된다. 이 문제점을 기존학계에서 무량각양식을 왜 사용했는지 살펴본 후 정리해 보겠다.
 
기존 학계의 연구와 그에 대한 반론

  무량각양식에 대한 기존연구는 원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이렇게   원자료가 없는 이유는 무량각양식이 사용된 건물이 왕실의 내전인 만큼 신하들이 왕의 집에 대해 언급할 수도 없고, 출입도 왕족이나 외척이 아닌 이상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내전에는 왕의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이 들어 갈 수 없었다. 이처럼 기록의 부족으로 기존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나마 왜 무량각을 했는지에 대해 다름과 같은 주장이 있다. 첫째, 교태전, 통명전, 대조전은 왕비의 침소인데, 이는 곧 왕과 왕비의 침소를 뜻한다. 왕과 왕비의 합궁은 곧 새 임금인 세자를 잉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위해 땅의 음기와 하늘의 양기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용과 양을 뜻하는 용마루가 하늘과 땅의 결합을 방해하므로 용마루를 없앴다. 둘째, 기와가 용마루 위치에서 그대로 곡선으로 넘어가 곡선미를 위한 것이다. 셋째, 음양의 조화를 위한 것으로 용마루가 있는 것은 양(陽), 없는 것은   음(陰)인데 이를 위해 무량각양식을 사용했다. 이밖에 단순히 왕권과 관련이 되 있지 않을까하는 의견이 있는데, 주장에 비해 근거가 없어 단순히 의견정도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내 생각으로 첫 번째 주장은 머리말에서도 말했듯이 용마루가 용과 양기를 뜻한다면 왜 용두장식은 두었는지 의문이다. 땅의 음기와 하늘의 양기를 결합하기 위함이라면 그 방해요소가 되는 것을 모두 없애야 하는데, 지붕에는 용두장식이 있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본다. 두 번째 주장에 대한 반론은 근거자체가 없이 단순한 의견수준이므로   제시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곡선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라 하면, 당시 조선이 곡선미가 있는 무량각양식을 더 아름답게 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유행을 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무량각양식은 궁궐에서만 보이고, 게다가 유일하게 내전에서만 사용된 점을 보아 당시 곡선미를 강조하기위해 무량각양식을 썼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세 번째 주장은 용마루가 있는 양의 건물과 없는 음의 건물을 조화를 이루기 위해 건설했다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우선 무량각양식을 사용한 전각이 경복궁만 2개가 있을 뿐 그 외 궁궐은 1개의 전각만 사용해서 음양의 조화를 위한 그 수가 맞지 않다. 
 
무량각양식을 사용한 이유
  왕의 권한을 나타나기 위함이다.
  건물에 있어 지붕이라 하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일단 실용적인 측면으로 지붕은 빗물을 막고 태양광선을 피하게 하며 실온을 조절하여 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기능 뿐 일까? 옛날에 지붕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그 한자에서 알 수 있다.  지붕 옥(屋)자는 본래 지붕만을 뜻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옥(屋)자는 이후 집, 건물전체를 뜻하게 되었다. 즉, 지붕은 건물을 대표하는 외형적인 역할을 했다. 일단 건물을 볼 때 지붕이 건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반이며, 또한 건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원근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경우에   시선의 초점이 되고, 경관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지붕은 기능적인 기능보다 외형적인 기능으로 시각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왕의 권한을 상징하기 위해 가장 좋은 건물 양식은 지붕이다. 그 결과 왕의 권한을 위해 조선에서 유일하게 왕의 내전에만 무량각양식을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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