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졌으나 진건 아니다?
2016년 4월 26일, 미국 동부 5개주에서 치뤄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이 5개의 주 중 4개를 석권하며 압승을 거뒀습니다. 이로써 표차가 더욱 벌어지며 이제 버니 샌더스가 힐러리 클린턴을 꺾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의 주요 언론은 "사실상 샌더스는 끝났다"라고 단언하며 여론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쟁은 마무리 되었다는 데에 의견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샌더스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경선 레이스에서 퇴장할 것인지를 점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가능성은 낮지만 올 7월에 있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반전을 노려 볼 수도 있고, 슈퍼대의원들을 포섭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샌더스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선언은 산술적인 가능성보다 더 큰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샌더스가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는 것은 그가 지향하는 가치가 실현되기 위한 수 많은 방법들 중 한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샌더스가 이끄는 "정치적 혁명" (Political Revolution)은 이제 시작입니다.
2. 쩐의 전쟁, 그리고 금권정치 (plutocracy)
본격적으로 버니 샌더스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피기 전에, 미국 정치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선거에서 이기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자금력입니다. 2008년 미국 의회 선거 결과를 보면, 하원에서는 93%, 상원에서는 94%의 선거에서 자금을 더 많이 사용한 후보가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에 필요한 많게는 수백만불에 달하는 금액을 개인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정치인은 매우 드물죠. 그래서 기부금을 받게 되는데, 문제는 이 기부금의 출처입니다. 해가 갈수록 개인이 아닌 대기업에서 오는 선거자금의 절대적인 액수와 비중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최근 연방대법원에서는 악명 높은 "Citizens United" 판결에 따라 이제는 법인이 선거에 사용할 수 있는 액수를 사실상 무제한으로 풀어 버린 일도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기부금의 액수와 비례해 기업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져만 가는 중입니다.
그러한 돈의 흐름은 1인 1표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협입니다. "먹이를 주는 손은 물지 않는다"라는 미국 속담처럼 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당선된 정치인이 그 기업의 이득에 반하는 일을 하는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 나아가면 재선과 자기자리 보전을 위해 해당 기업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충실한 대변가가 되기도 합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선거자금을 통해 기업과 정치인간에 사실상 주종관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죠. 유권자의 의견은 더 이상 반영되지 않고, 투표권 대신에 금권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재 미국은 plutocracy, 즉 부유층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는 방향을 향해 빠르게 달려 가고 있습니다.
3. 정치자금의 흐름을 거스른 한명의 아웃사이더
지금 치뤄지고 있는 2016년 민주/공화 대선후보 경선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클린턴은 2억 달러가 넘는 선거자금을 지금까지 모았습니다. 가장 적은 트럼프도 5천만 달러라는 거액입니다. 샌더스 또한 대기업의 후원을 받거나 (또는 트럼프처럼 자기 자신이 대기업인) 공화당 주자들을 제치고 1억 8천만 달러가 넘는 금액으로 2위에 올라서 있습니다. 이렇게 모인 돈은 직원 급료를 비롯한 선거캠프 운용 경비, 홍보물 제작, 대중매체 광고 등에 쓰입니다. 진영간의 PR 경쟁이 과열되며 선거 자금은 날이 갈수록 치솟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선거자금의 출처입니다.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자금 중 7천 6백만 달러에 달하는 거금을 대기업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위의 표에서 세번째 단의 "PAC"란 "정치행동위원회"의 약어이고, 이는 대기업이 우회적으로 선거자금을 지원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샌더스가 대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은 0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버니 샌더스가 대기업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도 소액기부로만 여타 후보들보다 많거나 비등한 자금을 모았다는 사실입니다.
4. 앨 고어의 예견과 27달러의 기적
천문학적인 자금을 선거에 쏟아 붓는 이런 상황은 옳고 그른지를 떠나서 지속 가능한 것일까요? 금권정치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만 뾰족한 수는 없어 보입니다. 이에 대해 언급한 유명인사들 중 미국의 전직 부통령이자 2000년도 민주당 대선후보이기도 했던 앨 고어 (Al Gore)라는 정치인이 있습니다. 대선에서 조지 부시에게 패배한 이후에도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시민의 정치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죠. 그런 그가 쓴 책인 <The Assault on Reason (이성에 대한 공격)>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The power of online organizing has also begun to create hope for many that America's current system of financing political campaigns - now dominated by special interests - might eventually be replaced by the million of small donations collected online outweighing the smaller number of larger contributions from big donors."
"인터넷상의 조직화는 현재 이득집단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미국의 선거자금 동원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온라인 소액기부가 소수의 거액기부를 누를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저는 얼마 전 위의 문장을 읽으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2007년에 쓰여진 책이 2016년 현재를 예견하고 있었던 겁니다. 버니 샌더스 캠프에 들어오는 평균 기부금은 1인당 27달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기부자들의 숫자가 2백만명, 기부 건수는 7백만건에 달하기 때문에 2억 달러에 가까운 자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부자가 정치를 좌우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버니 샌더스를 통해 그 어느때 보다도 현실에 가깝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작년까지만 해도 전국적 인지도는 전무했던 샌더스를 유력 대선후보로 끌어 올리고, 20년 정치경륜의 클린턴을 턱밑까지 추격할 원동력을 제공한 바로 "27달러의 기적" 입니다.
5. 2016년: 정치혁명 원년
현재 미국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미래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이전에 없었던 기회를 창출하는 동시에 노동자를 산업현장에서 몰아내며 경제적인 도전을 제기하고 있고, 가속화되는 세계화는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개개인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게 됩니다. 위로 편중된 부와 재화는 중산층의 존립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한편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안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극우단체의 준동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현재의 체계를 지키기 위해서 최소한 적극적인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넓은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 대선 후보들 중 문제의 근원을 드러내고 미국을 새롭게 할 전면적인 해결책을 들고 나온 후보는 버니 샌더스가 유일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민주적 사회주의란 초부유층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부를 갖는 것"이라고. 민주당 공화당 가릴 것 없이 샌더스를 "극단주의자"라고 공격합니다. 하지만 그가 추진하려고 하는 국영의료보험, 유급 출산휴가, 생활임금 보장, 국공립 대학교 무료화 등의 정책들은 이미 미국을 제외한 다른 선진국들에서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국가의 미래를 견실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에는 극약처방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진보적인 가치는 아직 정치적 스펙트럼에 확실히 뿌리 내리기에는 조금 이르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금권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자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본격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버니 샌더스가 제시했고, 이에 따르는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메세지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후일 미국의 정치지형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파급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클린턴 지지자들의 말처럼,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이미 끝났을" 지도 모릅니다. 샌더스가 클린턴을 꺾는 것은 이제 "산술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의 미래는 아직 희망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금권정치에 저항하는 것을 넘어, 국민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는 국가를 건설하는 움직임이 풀뿌리에서부터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버니 샌더스가 주도하는 "정치적 혁명" 이라는 이름의 실험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