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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어느 사내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20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3
조회수 : 58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14 17:15:41

여기 한 사내가 있습니다. 주변정세가 평온하였다면 그는 편안하게 왕위를 이어받고 나름 편안하게 나라를 다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변정세는 혼란스러웠고 그가 이어받은 나라는 사실 그대로 망해도 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상태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구부 훗날 소수림왕(371~384)이라고 불리는 사내였습니다. 그가 물려받은 나라는 참으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인 고국원왕 12년에 당시 먼치킨적 파워를 자랑하던 전연(337-370)의 공격으로 수도가 탈탈 털리고 미천왕의 능과 태후(어머니), 왕모도 함께 전연에게 털려 버렸습니다. 고국원왕은 이를 돌려받기 위해 스스로 신하를 청하는 등 실록 굴욕 오브 굴욕을 연출하였고, 결국엔 다시 돌려받지만 태자인 구부가 인질로 전연에 갑니다.

 

태자인 구부가 적국인 전연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는 우리도 잘 모르지만 아마 훗날 고국원왕과 비슷 아니 그보다 더한 굴욕을 겪은 인조의 두 아들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겪었던 기분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왕위에 오른 그의 행적 하나하나를 볼 때 그가 전연에서 인질로 겪었던 세월은 그리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같습니다. 구부는 그곳에서 전연의 강함과 선진적인 중국의 문물을 배우고 고구려의 후진성을 깨닫게 되는 시점이 아닐까 보입니다. 

 

여튼 그는 전연이 5호16국 최고의 군주라 불리는 부견이 이끄는 전진에게 멸망하게 되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370). 돌아온 조국은 뭐 딱히 큰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고국원왕은 전연에게 입은 치욕을 어떻게든 만회할 기회를 꾸준히 노리고 있었고, 그리고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겉으로 만만해 보이는 백제였습니다. 사실 북쪽으로 영역 확장하기에도 전진 등이 있어서 하기가 좀 그랬기도 했습니다만 

 

369년에 있었던 고국원왕의 백제 공격은 이후 끈질기게 이어지는 고구려와 백제 악연의 신호탄이었습니다. 무려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 북부 변경을 약탈하는 것은 순조로웠지만, 백제판 흑태자인 근구수왕(아니 흑태자 에드워드를 영국의 근구수왕이라고 말해야 할까요?)의 뛰어난 지휘통솔과 그리고 안습한 고구려군의 사정(정예병은 소수고 나머지는 그냥 머릿수 채운 잉여들)과 백제에겐 행운 고구려에겐 불운이라 할만한 사기의 백제군 투항 등등으로 인하여 대패를 하고 맙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이후 2년 뒤인 371년에는 역시 백제 역사상 최고의 먼치킨적 왕인 근초고왕이 직접 3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와 평양을 쳤고 고국원왕은 이를 요격하러 나갔다가 결국 화살에 맞고 전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행했던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중지하고 내실을 다지는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다행히 소수림왕 즉위 당시 국제정세도 고구려에게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막 화북을 통일한 전진은 동진을 멸망시키기 위한 정지 작업으로 후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고구려 등과 온건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백제 역시 근초고왕이 직접 평양을 공격한 이후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수림왕은 재위 2년 차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우고 재위 3년 차에는 율령(제도와 법)을 반포하여 당시까지 엉성한 국가조직을 이루고 있던 고구려의 국가조직을 치밀화시키고 법치주의를 표방하였고, 동시에 문치주의를 표방하여 고구려의 내실을 다졌습니다. 또한 내부안정과 불교를 공인한 왕들이 대부분 그렇듯 왕권의 강화를 목표로 불교를 공인하는 등의 작업도 일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는지는 몰라도 바로 재위 5년 차에 백제 변경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근초고왕 역시 군사를 보내어 반격했지만 패배하고 다시 한 번 군사를 보내지만 흉년이 들어서 이를 이룩하지는 못했습니다. 소수림왕의 첫 번째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소수림왕은 또 한 번 백제 변경을 공략하였고, 별다른 소득은 없었지만 이는 근초고왕 사후 왕위에 오른 근구수왕을 열뻗치게 만들었습니다. 근구수왕은 다시 한 번 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소수림왕 역시 심기일전하며 근구수왕에 맞섰습니다. 이 전투에서 누가 이기고 졌는지 삼국사기에서는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백제는 동원한 군사에 비해 큰 소득을 얻지 못하였고, 고구려는 성공적으로 백제의 대군을 막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에도 소수림왕은 군사를 보내어 백제 북부 변경을 공략하며 백제에 대한 견제 공세를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이후 백제에 대한 통렬한 타격은 그의 조카인 광개토대왕 무렵에 이뤄졌습니다.

 

이렇게 백제와 아웅다웅하는 사이 북쪽에서는 거란이 침입해왔습니다. 삼국사기에 별다른 반격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그냥 일방적으로 거란의 레이드에 고구려가 속수무책으로 털린 것으로 보이고,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에 큰 가뭄이 들어 고구려측에서도 이를 수습하느라 제대로 반격할 생각은 못한 듯 합니다. 이후 거란에 대한 반격은 그의 조카인 광개토대왕 무렵에나 제대로 이뤄졌습니다.

 

이후 별다른 기록은 없었으며 그는 재위 13년 1개월만인 384년 11월에 죽고 그의 동생인 이련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국사책에서는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불교 공인 등으로만 매우 짧게 나와있지만 사실 소수림왕은 캐망직전인 나라를 짧은 시기만에 본궤도로 올려놓고 훗날 광개토대왕이 사방팔방으로 원정을 할 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한 내정 분야의 먼치킨적 군주라 볼 수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위축되어 있던 고구려의 자신감까지 심어준 이건 뭐 우리 역사상 얼마 안 되는 내정과 군사의 만능 달인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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