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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요동정벌당시 획득 한 북방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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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ot2
추천 : 2
조회수 : 2274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6/04/26 15:4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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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JPG


고려의 영토 변화를 간략하게 나타낸 지도.


고려의 요동정벌당시 획득 한 북방영토라는데 

오래못지킨게 아쉽네요. 더불어 공민왕의 북방영토회복은 일시적이라곤 해도 조선시대엔 시도도 못해봤으니 나름 중요한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ps


6 계축일 인당이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고려사』권39 공민왕 병신 5(1356) 6 4


공민왕 19 우리 태조(太祖:이성계) 올랄산성(兀刺山城) 쳐서 () 항복하매

『고려사』권112 열전 25 한복


태조(이성계)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 넘어 6백여리를 가서 설한령(雪寒嶺) 이르렀으며 7백여리를 가서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중략) 이튿날 두목 20 명이 군대를 버리고 성을 넘어 도망하였다. 여러 성들이 이러한 형세를 보고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항복받은 민호가 1만을 넘었다. 노획한 2 두와 수백 필을 모두 주인들에게 돌려 주엇더니 북방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모두 귀순하여 오는 사람들이 저자에 가는 것같이 많았다. 그리하여 동쪽은 황성(皇城:필자주-오녀산성, 금나라 황제의 성이라 해서 황성이라 불리웠다)까지 북쪽은 동녕부까지, 서쪽은 바다에까지 남쪽은 압록강까지의 지대에 적의 종적이 없어졌다.

『고려사』권42 경술 19(1370) 정월 

 

 

999.JPG

고려군의 요성 공략도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국역원문 .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성조(聖朝) 홍무(洪武) 21년 2월에 호부(戶部)의 자문(咨文)을 받았사온데, 호부 시랑(戶部侍郞) 양정(楊靖) 등 관원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기를, ‘철령(鐵嶺) 이북(以北)·이동(以東)·이서(以西)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에 속하였으니, 군민(軍民)을 그대로 요동(遼東) 관할에 소속시키라.’ 하였습니다. 본국에서 즉시 상항(上項)의 사건으로 인하여 배신(陪臣) 밀직 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조정(朝廷)에 가서 호소하여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당년 6월 12일에 박의중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아 보니, 본부 상서(本部尙書) 이원명(李原明) 등 관원이 당년 4월 18일에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기를, ‘철령의 일로 인하여 왕국(王國)에서 말이 있다.’ 하시고, 전과 같이 관리를 정하여 관할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흠차(欽差)하신 동녕위(東寧衛) 천호(千戶) 왕수(王脩)가 싸 가지고 온 칙유(勅諭)를 받들어 보니, ‘삼산(參散)·독로올(禿魯兀) 등처의 여진(女眞) 지역의 관민인(官民人) 등을 초유(招諭)한다.’ 하셨습니다.

『태종실록』7 4 5 19





출처 https://namu.wiki/w/%EA%B3%A0%EB%A0%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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