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옆가게 박씨는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푹푹 찌는 여름날 화구앞에 서서 요리를 하면서도 짜증 내는 것을 본적이 없다.
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르신께 먼저 다가가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여 동네에서 아주 평판이 좋다.
게다가 얼마전부터는 간간이 우리 미용실을 들러 외로이 머리를 자르는 나에게 말도 걸어주고 청소해주기까지 한다.
정말 고맙고 착한 사람이다.
오늘은 박씨가 우리집을 들렸다. 머리를 자르려는 모양이다.
"어어, 박씨 머리 자르러 왔는가?"
"네. 조금 긴 거 같아서요"
"여기로 와서 앉어이"
박씨는 청결하기까지 한가보다. 그의 머리에서 흔하지 않는 샴푸향이 확 난다.
"아따 자네는 땀냄새도 안나네잉"
"사실 오늘은 요리준비를 아직 못했습니다. 재료를 못 구해서요"
"그러믄 쓰나. 어여 가서 준비 하소"
박씨를 조금이나마 도와주고자 머리를 자르는 내 손은 보다 분주해진다.
십분정도 지났을려나 박씨 머리는 제법 말끔해졌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여기 7000원 있습니다"
"고맙네 그려. 다음에 가게 한번 들릴게잉"
"하하, 감사합니다. 이왕 온김에 떨어져있는 머리카락들 다 쓸어드리고 갈게요"
"아따 고맙네그려. 그러고보니 자네 가끔 머리칼들 가져다가 어따 버리는가? 처치하기 곤란할 것인디"
"사실 제가 머리카락으로 식물 영양제를 만들고 있거든요. 그때 쓰는거죠 하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장님."
"그래 그러믄 나중에 들릴게잉"
박씨는 바쁘게도 가버렸다. 아마 요리준비하느라 서두르는 것일게지. 젊은 사람이 부지런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머리카락으로도 비료를 만들 수 있던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 그쪽에는 내가 잘 몰라서 그런가보다.
날이 저물고 가게에는 손님이 찾아오질 않는다. 오늘 장사는 이쯤에서 파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요즘따라 매출이 많이 줄었다. 불경기라는 말이 직접 느껴진다.
집에 가기 전에 박씨네 가게를 들리는 게 좋겠다. 아까 해둔말도 있지만 집에 가봤자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나의 발걸음을 더 움직이게 한다.
박씨네 중국집은 아직도 손님이 있었다. 조그만한 가게지만 항상 손님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그도 그럴것이 박씨의 음식솜씨가
여간 괜찮은게 아니다. 확실히 그가 만든 짜장면은 확실히 특별한 맛이 살아있다.
"박씨. 나 왔네잉"
"아 오셨습니까. 굳이 안오셔도 되는데.."
"그거시 뭔 말이여. 고마운게 찾아오제. 그 뭐시기. 나도 짜장 한그릇 부탁하네"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박씨는 말을 듣고 바삐 움직인다. 이렇게 바쁠거면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쓸수도 있건만 박씨는 그러지도 않는다.
혼자서 부지런히 움직일 뿐이다.
"짜장면 나왔습니다 사장님. 맛있게 드세요"
"고맙네잉. 나 신경 쓰덜말고 일보소."
나는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넣는 타입이다. 잘 뿌려진 고춧가루와 함께 슥슥 짜장을 비빈다. 윤기도 나는 것이 아주 먹음직하다.
한 젓가락 크게 들어 한입에 넣는다. 내 입안에 가득 담긴 면과 양념이 느껴진다.
역시 맛있다. 여기와서 실망하는 법이 없다.
확실히 다른 중국집보다 뭔가 더 기름진 맛이난다.
다시 한젓가락 먹으려는 찰나 짜장면에 실같은게 눈에 띈다.
다시 보니 실이 아니라 머리카락이다. 박씨가 요리하다 떨어졌나보다. 기분이 좋진 않지만 박씨 몰래 덜어내기로 한다.
'음식을 하다 보면 그럴수도 있지...'
다만 이상한 것은 박씨는 검은 머리인데 이 머리카락은 염색한 노란색이다.
그게 뭐 대수인가. 나는 남은 짜장면을 비워낸다.
2.
오늘은 횟집하는 송씨가 찾아왔다.
머리 자르러 왔다면서 의자에 앉아 이야기만 해댄다. 송씨네 가게도 손님이 없나보다.
"아따 자네는 근데 청소도 하는가보구마잉. 바닥에 떨어진 머리칼이 없네 그려"
"그게 아니라 여 아침에도 박씨가 와서 청소해주고 갔다닌께"
"박씨가?? 착하구마잉. 근디 왜 우리집은 안해준다냐"
"자네집은 안해줘어?"
"다른 집에도 오는걸 못봤당께. 서운하구만 그려. 자네만 챙겨주구"
"나이먹은 사람이 별걸다 서운해하네.내가 혼자사는거 알고 그래주는거 아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우리집만 온다는 박씨가 여간 고마운게 아니였다.
3.
자꾸만 어제 일이 걸린다.
어제도 나는 박씨네 가게에 들렸다. 박씨는 반갑게 맞아줬으며 음식 또한 역시 맛있었다.
그런데 그가 해준 짜장면에서 또 머리카락이 나왔다.
이번에 그것은 붉은색이었다.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날 우리 미용실에 붉은 색으로 염색을 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 손님은 커트를 원했고 나는 해주었으며 박씨는 그 이후에 찾아와서 청소를 해주고 갔다.
도대체 왜 박씨의 음식에 그 붉은 머리카락이 들어간 것인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설마 박씨가 우리집에서 가져간 머리카락을 사용한다는 것인가.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4.
어느새 오늘도 나는 박씨네 가게에 왔다.
나는 뭘 확인하려는 것인가. 설마 박씨처럼 착한 사람이 그랬단 생각인가.
"오늘도 오셨네요."
"어어, 요즘 이게 땡기네"
"앉아계세요. 금방 해드릴게요"
박씨의 말대로 음식은 정말 금방 나왔다.
하지만 나는 음식을 먹기는 커녕 면밀히 살피는데 주력했다.
분명 오늘은 파마한 손님이 많았으니 혹시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이 있나 없나 찾는 것이다.
한참을 찾아도 나오질 않는다.
그래, 앞에서 나온 머리카락들은 어쩌다 들어간 것일 것이다.
어떻게 박씨가, 아니 사람이라면 그런 짓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식어버린 짜장면을 흡입하기 시작한다.
그날따라 박씨네 가게에 있는 커다란 달력의 17일에 '재료구하는 날' 이라고 요란하게 쓰여진 것이 눈에 띈다.
5.
오늘은 17일이다.
나는 왜 이날을 기억하는가.
그래, 오늘은 17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박씨가 장사를 안하고 나를 돕겠다며 하루종일 우리 가게에 있는 날이기도 하다.
박씨가 오늘 아침에 말하길
"오늘은 쉬고 싶어서 장사는 안하려구요. 대신 사장님이 많이 팔아주셨으니 오늘은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며 호객 행위를 해댄다.
심지어 학생들에게도 "머리가 참 길다." "멋있게 잘라줄게!" 하며 손님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평상시와 같다면 이런 모습이 정말 고마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박씨네 달력에서 오늘은 '재료구하는 날' 이다.
그런데 왜 그는 여기 있는가. 그리고 왜 이렇게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는가.
설마 그가 정말 여기에 재료를 구하러 온것인가.
그럴리가 없다. 이건 최근의 일도 있어서 내가 혼자 오버하는 것일 것이다.
정말 그런가. 나는 아직 어느쪽에도 확신할 수 없다.
날이 점점 저물고 내가 장사를 그만 거두려고 하자 박씨는 수고하셨다며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저렇게 많은 머리카락들을 비료에 쓴다고?
박씨가 식물을 키운다는 말은 여전히 들어본적이 없다.
"근데 자네, 재료 손질은 다 했는가?"
불쑥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이제 집에 가서 하려구요"
이 말을 하는 박씨의 표정은 분명 조금 굳어있었다.
6.
아무래도 안되겠다. 내일은 박씨 집에 가보는게 좋을 것 같다. 이건 박씨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괜히 이상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박씨에게 미안한 일인 것이다.
박씨는 매일 오전 9시에 집을 나선다. 나는 1시쯤에 박씨 집에 갈것이다. 그때는 점심시간이라 한창 바쁘겠지.
박씨네 집에 가서 뭐가 있는지만 확인하고 바로 올 것이다.
설마 그처럼 착한 사람이 음식에 머리카락을 재료로 넣었을리가 없다.
내가 그의 집에 가는 것은 더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기 위해 어쩔수 없는 일이다.
7.
생각대로 박씨는 9시에 집을 나섰다.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보는 것은 국민학교 2학년 이후로 처음이라 여간 떨리는게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호기심이 나를 더욱 자극하며 심장은 더욱 빨리 뛰기 시작한다.
박씨네 낮은 담을 쉽게 넘어간다. 그가 머리칼은 놔둔다는 창고도 저기 쉽게 보인다.
조심스레 창고문을 연다. 범죄라면 범죄인것을 아는지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한다.
'세상에'
창고문을 연 내앞에 보이는 것은 믿기지 않는 상황이다.
여기엔 그저...아무것도 없다. 텅텅 비었을 뿐이다. 구석지에 아주 조그만한 궤짝이 있을 뿐.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는 머리카락도.
저 궤짝에 그 수많은 머리칼을 담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작은 궤짝이다.
역시 괜한 내 의심이었나? 그래도 머리칼들은 여기 있어야하는거 아닌가?
왠지 모를 안도하는 내 마음과는 반대로 내 손은 궤짝을 열고 있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궤짝이 열린다. 이런, 역시 빈 궤짝일 뿐이었다. 휴. 하고 한숨을 쉰다.
순간 내 머리에 '퍽'하며 둔탁한 충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는다.
8.
집에 돌아오니 창고에 정씨 아저씨가 쓰러져 있다.
내가 설치한 궤짝을 열어보다 위에서 떨어지는 벽돌들에게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이것 참 난감하다. 아니 참 난감했었다. 이렇게 늦게 찾아오다니.
참 둔한 사람이다.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도 이제서야 의심이 들었나 보다. 재료가 떨어진지가 언제인데.
나는 서둘러 창고 문을 닫고 재료를 손질한다. 팔이며 다리며 사람은 버릴 곳 없이 다 맛있는 재료가 된다.
다만 쓸데없는 이 머리카락들은 왜 붙어있는거람. 힘없는 머리카락들은 힘주어 뽑아낸다.
바삐 손질하다 보니 어느새 그는 소중한 내 재료가 된지 오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한다.
역시 재료를 쉽게 구하는데는 이 방법이 최고다라는 것을.
9.
요즘도 우리 횟집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
또 얼마전부터 미용실 정씨가 혼자 여행이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아 이야기할 상대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박씨가 우리집 일을 가끔 도와준다는 것이다.
특히 음식점에서는 음식물찌꺼기처리가 가장 까다로운 법인데 박씨가 그걸 처리해주고 있다.
정말 고맙고 착한 사람이다.
"박씨 고맙네 그려. 근데 음식물찌꺼기들은 어떻게 처리하는가? 쉽지 않을 것인디."
"하하, 제가 요즘 이걸로 식물 영양제를 만들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