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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한 신문 칼럼에 글을 실으셨습니다.
게시물ID : lovestory_783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여우와향신료
추천 : 2
조회수 : 47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4/16 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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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꽃 이야기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도 봄꽃이 제각기 다투어 피어나는 ‘잔인한 사월’입니다. 죽은 땅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봄비가 잠든 뿌리를 깨워내는 용감한 계절에 꽃은 세상을 가꾸고 소망을 피웁니다. 사월이 되면 어두운 기억과 욕망의 부끄러운 교차를 경험하는 우리는 봄꽃이 피는 것을 경이로 받아들이면서도 부끄러워합니다. 봄꽃은 우리들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봄에 피는 꽃으로 분류하는 것이 지나친 것 같지만 이 꽃으로부터 봄이 시작된다는 동백이 있습니다. 소담한 눈을 머리에 이고서도 꽃을 피운 모양새는 꽃이라기보다는 기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어김없는 봄을 예고하는 무시무시한 꽃입니다. 동백은 푸른 잎 속에 숨어서 꽃 피우는 수줍음이 많은 꽃이지만 꽃이 질 때까지 그 어떤 꽃들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일관합니다.

희끗한 머리에 얼굴 모양도 변한,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의 부드러움과 노련함으로 절제되는 원숙함 속에서도 언뜻 언뜻 드러나는 옛 기개의 모습은 속으로 정제하여 쌓아 올린 자기 세계를 잘 간직하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꽃이 지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꽃, 동백을 보는 것 같습니다. 동백꽃이 떨어진 돌담길을 걸을 때는 밟지 않도록 조심스러워 해야 할 꽃입니다.

지조와 기백이라면 목련도 빼놓을 수 없는 꽃입니다. 목련은 밤에 더 인상적입니다. 조요한 달빛을 받으면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할 만큼 참 대단한 꽃무리가 됩니다. 봄이 되면 화신이 지핀다는 무녀의 이야기는 밤에 핀 목련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상상하게 됩니다. 어둠이 천지를 덮어도 홀로 어둠에 맞서 흰 불꽃으로 남으려고 하는 꽃입니다. 칠흑이 내려 깔린 밤에도 홀로 깨어 서릿발 같은 흰빛으로 어둠을 질타하더니 휘몰아치는 현실의 회유와 압박의 바람에 변절하지 않고자 자신의 몸을 버려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에 발을 굴리게 하는 꽃입니다.

진달래도 애증이 뒤섞인 감회로 보게 만드는 꽃입니다. 민족의 꽃으로 불리는 이 꽃은 꽃의 색감이 특이합니다. 화사한 봄의 색인 분홍에 땅 색이 섞이고 우리 민족의 한이 입혀져서 화사한 분홍에도 못 미치고 정열의 붉음도 이루지 못한 그야말로 진달래 색이 되었습니다. 진달래꽃이 세련되고 매력적인 색을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차지하는 어머니 같은 꽃입니다. 외면하거나 멀리할 수 없는 감성의 모태 같은 꽃입니다. 

진달래는 꽃을 피울 때만 그 자리에 진달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자리만 골라서 한 무더기 씩 꽃을 피웁니다. 어둑어둑한 그늘로 가려지던 곳에 햇볕을 끌어들이듯이 피우는 꽃입니다. 그늘지던 한켠에 핀 진달래꽃 한 무더기는 화사한 햇살을 대신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의 어둠을 뚫고, 주목받거나 기억되지 못하면서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들을 다시 깨우쳐 주는 꽃입니다. 

나는 한의 색이 물든 꽃으로 개나리를 생각해냅니다. 가장 환한 색, 병아리 색으로 우리의 동심을 채웠던 꽃이 지저분하고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비탈과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겨져 가리고 덮어 주는 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추억 속에서는 초가집을 둘러싼 예쁜 울타리 꽃이었는데 감추고 싶어 하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감싸 가려 주는 꽃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성이 참 무던한 꽃이 나라를 덮었던 노란 리본들과 겹쳐집니다. 벌써 망각의 뻔뻔함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우리들의 얼어붙은 마음들을 깨치고 피어나는 개나리는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해 주고 우리의 부끄러움조차도 감싸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봄이 되면 역사의 어두운 그늘에서도 한 무리의 빛을 끌어들이듯이 피어난 꽃들이 많은 땅입니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 

이렇게 시작된 봄 꽃의 소식들이 봄에 듣는 아우성들로 남습니다. 금년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민주의 사월을 지내고 항쟁의 오월을 보내겠지만 아직도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들로 남아 있는 건 아닌지, 아직도 우리는 그저 진달래꽃 한 다발 묶어 바치는 것 외에 달리 하는 일이 없다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봄 날씨가 변덕스러워도 아픔을 보듬고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봄 꽃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꽃을 피워갑니다. 봄 꽃 앞에서 이내 부끄러워지는 우리는 바람에 꽃잎을 잃더라도 꽃을 피워내는 봄 꽃들의 ‘잔인한’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화사한 봄 꽃 같은 화사한 소망으로 우리 사는 땅에서도 꽃을 피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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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사실 해당신문의 출처를 밝히는게 원칙이나 어디까지나 글 자체만 알리고 싶어서, 출처는 아버지 컴퓨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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