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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 요나라의 여걸
게시물ID : history_259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10
조회수 : 303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4/15 23: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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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4대 황제 목종 야율술률耶律述律은 게으르고 술 마시기를 굉장히 좋아하였습니다. 또한 잠이 많아 항상 정오가 넘어서야 일어났기에 사람들은 목종을 '자는 왕'-(睡王) 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가장 큰 단점은 지나치리만큼 난폭한 것이었는데, 어떤 이는 동작이 느리다는 이유로 죽이고, 어떤 이는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죽이는 등 심심할 때면 구실을 만들어 죽여버리니 주변 사람들은 황제를 두려워하였습니다. 한번은 무당이 "남자의 간으로 약을 만들어 먹으면 불로장생이 가능하다"고 말한 이후 목종은 사람을 죽이고 그 간을 빼먹기를 즐겼는데, 나중에야 이 말이 거짓임을 알게 되자 무당을 활로 쏘아 죽이고 그 위를 말이 지나가게 해 시신을 짓이겨버렸다 합니다.





소작은 이런 황제가 제위할 시기 태어났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응력應歷 3년(953) 정월. 그의 아버지 소사온은 야율아보기의 아내 단완태후 술율평述律平의 조카로 무장 출신이었으며, 어머니는 요 태종 야율덕광의 둘째딸 연국대장공주였습니다. 소태후는 어릴 적부터 총명한 기질이 있었습니다. 소사온이 소작과 그녀의 언니들에게 청소를 시켰을 때 언니들은 대충 하고 말아버렸지만 소작은 깨끗이 바닥을 쓸었습니다. 작은딸이 너무나 기특했던 소사온은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아이가 틀림없이 출세하여 집안을 일으킬 것이다!"




​ 

목종은 시간이 지날수록 잔인함은 극에 달해 주변인들은 슬슬 반감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황제는 화가 날 때면 곁의 시종들에게 화풀이하였습니다. 시종 한 명이 집사람을 보러 잠시 집에 갔다는 이유로 곤장을 때리고는 그의 처를 죽였습니다. 또한 다른 시종이 차를 늦게 올렸다고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종은 곧 이런 시종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969년 2월, 황제는 측근 대신들과 함께 하루종일 흑산에서 사냥한 후 돌아와 잠에 빠졌습니다. 깊은 밤에 깨어난 그는 갑자기 배가 고파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시종들이 자다가 깬 상태에서 황제의 부름에 늦게 응하고 말자 목종은 이에 크게 노하여 꾸짖습니다.

"네놈들이 죽고 싶은 것이냐?"

시종들이 황급히 꿇어앉고 사과를 하였으나 황제의 화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네놈들은 빨리 가서 먹을 것을 가져와라. 돌아오면 다시 네놈들을 처리하겠다."

그러고는 다시 잠들었습니다.





자기네들을 죽이겠답니다. 시종들은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의기투합하여 잠든 목종의 목을 졸라버립니다. 숨도 못쉬게 된 목종은 다른 시종의 목을 잡으려 했으나 공범 중 한명이었던 주방장에 의해 두 손이 꽉 잡혀버려 그 상태로 죽게 되었습니다.


​ 



시종들은 그길로 멀리 도망가버렸습니다. 그후 한참이나 지나서야 황제의 죽음이 밝혀지고 이 소식에 소사온은 범인들을 죽이라 명하려 하였으나 잠시 고민에 빠집니다.

'도망간 놈들을 잡는 것은 나에게 하등 도움될 일이 없다. 그러나 황족 중 한 명을 내세워 황위를 잇게 한다면 나는 공신이 될 수도 있다.'

죽은 목종은 여색을 멀리해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장성한 조카들이 있었고, 그중 한명인 야율현耶律賢은 소사온과 친분이 있는 이입니다. 소사온은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고는 도성의 야율현에게 친서를 보냈습니다.






야율현은 편지를 보고 즉시 측근 몇 명과 인마를 데리고 흑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후 목종의 영구 앞에서 황위 계승 의식을 마치고 황제가 되니, 사서에서는 그를 요 경종景宗이라 기록합니다.

야율현은 이후 소사온에게 깊이 감사하여 위왕魏王에 봉하며 북원추밀사, 북부재상 및 상서령을 겸임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둘은 돈독한 관계를 가지다가 한번은 소사온의 딸 소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태가 요염하고 문무를 겸비한 매력적인 여성으로 자라나 있었고, 이러한 소작에게 야율현은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황후로 삼았습니다.





요 경종 야율현耶律賢



경종은 성군이 되겠다는 의지는 있었으나 능력이 부족하였고 또한 몸이 허약하여 늘 발작을 일으켰으며 한번 발작하면 말안장에도 앉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남편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한 것은 소작이었습니다. 항상 중요한 안건은 소황후의 손에 들어갔고, 정책결정의 결과만이 경종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경종은 이에 화내지 않고 오히려 현명한 황후가 있어 안심이 된다며 기뻐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소황후의 결단력과 노련함은 여러 신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고 그녀의 결정은 크게 문제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경종이 사관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이제부터는 황후가 하는 말을 기록할 것이며, 황후의 말에 짐朕이라 써야 한다."






건형 4년(982) 9월, 경종은 소황후와 대신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이때 황제가 갑작스럽게 풍한에 걸려 병이 악화되자 황후와 측근을 불러 알립니다.

"보아하니 나는 이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단지 황태자가 어리고 조정에 주인이 없으니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그런 다음 황후를 올려다보고 말하였습니다.

"황후, 그대는 나를 위해 적지 않은 일을 하였는데 이 젊은 나이에 당신을 떠나게 되는구려."

소황후는 눈물을 흘리며 답했습니다.

"그런 말 마세요 황상. 아직 젊으세요."

"하늘이 사람 뜻대로 내버려두지 않는구려. 내가 죽은 다음 태자 융서隆緖로 하여금 대통을 잇도록 하며, 모든 군국대사는 황후가 결정할 것이오."

며칠 뒤 황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요나라는 소태후와 그 아들 성종의 천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태후로서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사라진 것이었고, 또한 열두 살의 어린 황제와 태후를 병권을 지닌 친왕들이 진심으로 따라줄 지도 의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또다른 '후원자' 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야율사진耶律斜軫과 한덕양韓德讓은 전황제의 측근대신으로 경종에 대한 충성심과 절개가 뛰어났습니다. 소태후는 두 중신을 비밀리에 만나 말합니다.

"선제가 붕어하신 지금 친왕들이 중병을 장악하고 있어 그 세력이 매우 크다. 이런 친왕들이 나의 지시를 듣겠는가? 고아와 과부가 이런 사람들과 싸워낼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치고 태후가 눈물을 쏟아내자 감동받은 두 대신은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태후의 오른팔과 왼어깨가 되어 드릴 터인데 근심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북원대왕 야율휴가休哥는 가장 위헙적인 인물로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소태후는 그를 유주幽州 유수로 봉하여 남방의 군사를 통솔하게 해 변방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다른 친왕들은 사사로이 서로를 만나지 못하게 규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분산된 친왕의 권력은 다시금 황제에게로 집중게 만들었으며, 태후는 더 나아가 친왕들의 병권을 몰수해버립니다.




요나라 시기 삼채(1000년경)


이렇게 위기를 넘기고 나자 태후는 후원자가 되어준 야율사진에게 포상을 두둑이 내립니다. 북원추밀사에 봉하여 내정사무를 감독하게 하는 한편 황제인 성종과 말안장, 활, 화살 등을 교환하는 '생사의 교분生死之交' 을 맺었습니다. 황제와 신하가 교분을 맺는 의식은 역대 왕조의 황제도 해본 일이 없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한덕양은 어떠한 대우를 받았을까요?






사실 소작이 입궁하지 전 한덕양과 교분을 맺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덕양의 부친 한광사는 소사온과 친한 편이라 아들 한덕양 또한 소사온의 집에 드나드는 일이 잦았고, 그렇게 소작과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군복 차림의 소작의 모습은 한덕양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였습니다. 한덕양은 외모가 준수하고 문무에 능하였기에 소작 또한 그에게 반하여 혼사까지 준비하었으나, 경종의 명에 의해 입궁하면서 둘의 운명은 꼬여버린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있던 소태후는 그를 불러 말합니다.


"애초에 내가 선제의 눈에 들어 궁에 들어오게 된 것은 내 뜨싱 아니었고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였을 뿐이니 그대는 이해해 주시오."

"저도 압니다. 다 지나간 일인것을요."

"내가 이전에 그대와 약혼을 했었고 지금 선제가 안 계시니 그대와 다시 시작하고 싶소."


한덕양은 내심 놀랬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결혼하여 본처 사이에서 아들도 낳았고, 세간의 이목을 받는 것을 즐기지 않는 성품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태후의 뜻은 알았습니다. 허나 저는 이미 처가 있습니다. 신하된 몸으로 어린 임금과 태후를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본분이오나 전의 인연을 이어가는 문제는 후일 의논합시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 얼마가지 않아 한덕양의 처 이씨가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한덕양의 명분도 당당하게 서 소태후의 처소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고, 둘의 관계는 돈독해졌습니다. 한덕양과 소태후는 항상 함께하였습니다. 소작이 정무를 처리할 때 같이 참여하였고, 남면추밀사, 영숙위사를 겸임하여 태후와 황제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책임졌습니다. 이러한 나날을 보낸 뒤 태후는 공식적으로 한덕양에게 재가하였습니다. 통화 6년(988) 9월의 일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소태후는 한덕양의 막사에서 중신들을 불러 성대한 연회를 열었습니다. 참석한 귀족과 대신들에게 상을 내려주면서 그녀는 취한 목소리로 소리칩니다.

"여러분, 오늘은 마음껏 즐기십시오. 만약 내일 취해 조정에 못 나온다 하더라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할양한 뒤 이로 인해 송 태조는 여러번 북벌을 감행하였으나 소득을 얻지 못하고 요와 화친하였습니다.(소득을 얻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패배하여 황제의 정강이에 화살이 박히고 말이 없어 당나귀가 모는 마차를 타고 개봉으로 돌아오는 수모까지 겪습니다.) 이후로도 양국은 껄끄러운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송을 제압하기로 계획한 소태후는 통화 12년(994), 남하를 결심합니다.






요군의 진격은 초반에는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군사를 일으킨 지 두달만에 하남 복양지방을 정복하자 송 황제 진종眞宗은 두려움에 떨며 남으로 피난가겠다고 유난을 떨었습니다. 이런 황제를 재상 구준은 달래고 어르듯 말합니다.


"하북의 군대는 낮이고 밤이고 폐하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폐하께서는 필히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하셔야 합니다. 만약 폐하께서 달아난다면 전방의 군대는 사기를 잃을 것이고, 요군은 그 음을 타 남으로 내려올 것이니 폐하께서도 남경에 도착하지 못하고 요군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필사안畢士安과 고경高璟 또한 남천을 반대하자 진종은 하는 수 없이 친히 출정하기로 하였으나 겁에 질려 한참을 차일피일 미룹니다. 보다못한 구준이 전방에서 연이어 올라오는 밀린 보고를 황제에게 보여주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서두르겠다" 고 하며 전쟁을 준비합니다.





송군은 신속히 북방 전주에 도착했습니다. 황제는 성루에서 장수들을 독려하였고, 장병들의 사기는 고무되었습니다. 양국의 군대는 이곳에서 열흘간 전투를 치루었는데, 요군의 대장 소달름을 송군이 죽인 후 송나라의 우세가 확연해졌습니다. 소태후는 당황하여 송나라와 강화를 청했고, 진종 또한 이를 받아들이고는 조리용曺利用을 파견해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조리용이 떠나기 전 황제는 땅만 떼주지 않는다면 돈은 얼마든지 주어도 좋다고 전했으나 구준은 조리용을 몰래 불러세워 말합니다.

"그대가 만약 담판하면서 30만 관을 넘긴다면 돌아올 생각하지 마시게나!"

요와의 담판은 어찌저찌해서 30만 관 이내의 액수로 보상하는 대에 성공했습니다. 이가 바로 '전연의 동맹'인데, 전투에서 나름 승세를 잡았던 송나라를 패자취급하는 불리한 내용이 다소 있었으나 어찌되었건간에 양국은 이후 120년간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태후는 통화 27년(1009) 아들인 성종에게 대권을 물려주었고(이때 성종의 나이가 서른아홉..)만년을 평화롭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7세의 일기였습니다. 요의 땅을 발밑에 두고 요의 신민들을 다스려 그들로부터 크나큰 존경을 받았던 여걸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어머니의 부고를 듣자 성종은 피를 토하며 통곡하고는 한 달간 제대로 먹지도 못할 정도로 상심하였습니다. 한덕양 또한 크게 슬퍼하여 일 년만에 못되어 사망하고 맙니다. 성종은 한덕양 또한 아버지로서 존중해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모든 격식을 모친의 것과 같이 하였습니다.





원나라 때 편찬한 <요사>에서 소태후는 이렇게 묘사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재능이 있었다. 좋은 말을 들으면 반드시 따랐다. 모든 신하들이 그녀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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