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나의 눈앞에 낡고 오래된 빌라가 보였다.
저곳이 나의 집이다.
몇 년이나 됐을까? 20년?30년? 부모님은 오래됐다고만 말했다. 내가 이사 왔을 때 까지만 해도 건물 주위로 담장이 있었는데 며칠 후에 갑자기 허물어져 지금은 자동차가 박아도 부셔지지 않을 것 같은 새로운 담장이 생겼다.
빌라를 이루는 벽돌은 검붉은 피딱지 같이 생겼는데 담장은 완전 새것이라니 마치 썩은 호박에 금보자기를 씌워 논 것 같았다.
1층을 지나가며 버릇처럼 우체통을 확인했다. 그리고 오돌토돌 닭살이 돋은 것 같은 벽이 둘러져있는 높이가 제각각 다른 계단을 밟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최신식 전자자물쇠가 달린 여러 군데 녹이 쓴 오래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나를 맞이하는 것은 잔잔하게 울리는 인터넷 공유기와 냉장고 소리였다.
“아... 오늘 엄마는 약속 있다고 하셨었지. 아빤... 드시고 오실 테고. 누나는 학교 갔으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방을 내려놓고 가족들이 언제쯤 올 것 인지 생각해봤다.
창밖을 보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 산 넘어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시계의 큰바늘과 작은 바늘이 같이 숫자 5를 가리키고 있었다.
베란다 창으로 비춰지는 노을빛을 받으며 가만히 있으려니 나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거부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난 쓰러지듯 좁은 거실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노을빛을 몸으로 받아내며 눈을 감고 따스함을 느꼈다. 어쩐지 올해 겨울은 별로 추운 것 같지 않다. 벌써 1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눈이 한번 내리지 않았다.
“아 뭐하지...”
따스한 기운을 너무 받은 탓일까? 몸이 바닥에 스며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흙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흙으로 스며들어가는 느낌이라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계속 들리던 공유기와 냉장고의 소리에 적응이 되었는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들려오는 것은 나의 숨소리...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정적을 깨는 전화벨소리, 나의 모든 신경을 자극한다.
짜증이 났다. 저놈의 벨소리가 짜증난다. 욕이 나올 정도로 짜증난다. 부셔버리고 싶을 정도로... 주말에 방에서 게임하고 있을 때면 가끔 전화가 온다. 그럴 때 마다 나가서 전화를 받아야 되는데 정말이지 그건 엄청 짜증이 난다. 마치 택배가 온 줄 알고 나갔는데 아파트 관리비 내라는 경비원의 말에 생각지도 못한 돈을 지출한 상황이랄까?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벨소리는 끊임없이 울렸다.
그나저나 무슨 전화일까? 가족? 친구? 모른다. 받기 전까지는 누구 전화인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여론조사를 한다는 전화가 많이 온다. 정말이지 전화를 받으려고 일어난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그리고 일어나며 내심 여론조사 전화가 아니길 바랄뿐이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 딸깍.
“여보세...”
“안녕하세요 ㅁㅁ시 여론조사 전문기관....”
내가 인사말을 끝내기도 전에 야속한 기계음이 빠르게 말을 채갔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친 나는 빠르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후... 전화 벨소리라도 바꿨으면 좋겠네.”
전화가 오면 울리는 이 벨소리가 얼마나 사람의 신경을 긁는지 모른다..
게다가 볼륨 또한 매우 커서 귀까지 아플 정도다.
소리를 바꾸고 싶긴 하지만 귀찮아서 바꾸지 않았다. 애초에 바꾸는 방법자체를 몰랐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전화 때문에 한층 기분이 안 좋아져 나는 화장실에 가서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거의 다 갈아입었을 때 쯤 다시 전화가 다시 울려왔다.
-쿵!
전화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내 몸이 거실로 달려가다가 팔꿈치를 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아프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더운 여름 나무에 붙어 울어대는 매미 같은 수화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심 아까 왔던 여론조사 전화 같은 게 아니길 빌며...
“여보세요?"
나의 말에 곧바로 수화기 속에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어쩐 일로 집에 일찍 왔네?”
내가 살짝 한 숨 쉬며 말했다.
“흐... 저번에 말했잖아요. 기말고사 끝난 뒤에는 일찍 온다고요.”
“어머. 그랬었어? 엄마가 요즘 왜 이러지...”
엄마는 거의 이랬다. 뭔가 말해주면 자주 잊고 있다가 상대에게 다시 물어보고 그때서야 기억을 한다. 처음엔 가끔씩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횟수가 늘었다. 아마 아까 생각했던 ‘혼잣말’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나와 누나가 엄마를 걱정하면 엄마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누나는 더욱 걱정했다.
이어서 엄마가 말했다.
“오늘 엄마 늦게 들어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아빠한테 전화해서 언제쯤 오시는지 여쭤보고 밥 먹어 알았지?”
“네...”
수화기를 내려놓자 그때서야 아까 부딪혔던 팔꿈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팔을 걷어 올려 보니 피부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조금 지나면 가라앉을 테니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벗어둔 옷을 정리하기 위해 옷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대충 걸어 둘려는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옷 걸을 땐 어깨선 맞춰서 똑바로 걸어! 의자 위에 맨날 던져 놓지 말고!’
바로 엄마의 잔소리였다.
“휴... 귀찮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이제는 엄마가 잔소리하기 전에 몸이 알아서 옷을 똑바로 걸어준다.
교복을 정리 한 뒤 내방에 들어갔다. 엄밀히 말하면 누나와 나의 방이지만, 집이 작고 각 방도 그렇게 큰 편이 아니라 작은방 하나를 옷 방으로 쓰고 나머지 두개의 방을 나와 누나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나눠 쓴다.
누나는 나보다 3살 많은 대학생이다. 그런 만큼 아는 것도 많지만 성격이 완벽한 O형스타일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나와 누나는 많이 싸웠다. 뭐.. 싸웠다기보다는 누나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화낸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성숙해져서 인지 서로 잘 싸우지 않고 오히려 누나가 내게 더 잘해주려고 한다. 뭐 처음에는 그런 누나가 어색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어색한 느낌이 없어졌다.
“흐음...”
나는 잠시 내가 어렸을 때(지금도 아직 어리지만) 누나와 싸웠던 추억(?)을 되새겨 보았다.
당시 일방적으로 내가 욕을 먹었긴 했지만 나의 잘못도 분명 있었고 사실은 덜 욕먹을 짓을 거짓말을 하다가 더 많이 욕먹은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억울한 것도 많고 미안한 것도 많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일뿐... 더 생각해봐야 머리 아플 것 같아 핸드폰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