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 책을 읽고 있다. 어느 학교의 어느 학년의 어느 반의 내 자리에서 고상하게...
-툭
하지만 이제 더는 읽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 교실에서 반 친구들이 '대추'를 던지며 놀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초 전 내가 있는 곳으로 대추가 날라 왔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난 결국 책읽기를 포기했다. 전쟁속의 포탄처럼 날아다니는 대추 때문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4교시 수업시간인데도 애들은 재밌게 놀고 있었다.
이 시간에도 놀 수 있는 이유는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방학을 하기 전에 남은 수업일수를 채우기 위해 1주일에서 2주일 정도 학교에 나와야 하는 날이 있다. 하지만 겨울방학 전에 이미 수업 진도는 끝이 나서 학교에 와서 할 일이라고는 자습 혹은 선생님들이 개인 노트북으로 영화를 틀어주면 영화를 보는 것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처럼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는 시간에는 애들끼리 알아서 자습하거나 지금 우리 반 애들처럼 주름이 쭈글쭈글 잡힌 말린 대추나 던지고 노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반 애들은 참 별난 애들이다. 하필이면 대추를 던지고 놀 생각을 하다니, 어쨌든 나는 책을 덮고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책을 넣는데 바닥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 손을 넣어 꺼내보니 대추였다.
대추를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가방은 책상 옆 통로 쪽에 걸려 있었고 가방 지퍼는 불과 5cm 정도밖에 열려있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곳으로 대추가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것도 누가 일부러 던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애들이 던진 대추가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음...대추가 가방에 들어갈 확률이 로또 맞을 확률쯤 되려나?'
"크크..."
로또까지 생각하자 또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로또에서 1등이 당첨되어 인생역전을 노리고 싶어 숫자를 돈을 주고 산다. 일부러 자신이 숫자를 예상해 가며 말이다. 하지만 로또에 당첨되는 사람들 대부분 '우연히' '길을 가다가 심심해서' '설마 내가 되겠어?' 라는 식으로 로또복권을 사게 사람들이다.
로또를 맞기 위해 복권을 수 백 장을 사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혹시 모른다. 재벌들이 심심해서 복권을 수백, 수천 장을 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더 웃긴 것은 이렇게 대추가 들어가는, 로또 맞을 확률이 주위에서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로또에 당첨되는 것은 매우 적게 일어나지만 이렇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가능 할 것 같은 일들은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 일어나 내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대추를 피해 교실의 구석진 자리로 옮겼다. 반 친구가 같이하자는 말을 했었지만 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라며 차갑게 말 한마디만 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내가 듣는 노래는 가사가 없는 클래식이나 뉴에이지 같은 종류이다.
반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가사가 있는 팝송, 발라드, 힙합 등의 종류를 많이 듣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 반 총 40명 중 클래식을 듣는 사람이 나뿐이었다.
별것 아니지만 좀 신기하고 놀라웠다. 반 친구들도 내가 클래식을 듣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고 그 후 며칠 간 나를 '교양 있는 남자'라고 비꼬며 놀렸다. 하지만 그리 오랫동안 놀려먹을 만한 주제는 아니여서 며칠이 지나자 알아서 잠잠해졌다.
반 애들이 대추를 던지며 노는 모습을 보며 노래를 듣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급히 그곳을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가 이러는 모습을 선생님이 보기라도 하면 혼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들어온 사람은 나의 앞 번호인 3번 김 건이었다.
건이는 들어오자마자 애들이 던지는 대추를 피하느라 정신없었다. 살이 살짝 오른 통통한 키 작은 몸을 열심히 움직이며 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망치는 곰처럼 보였다. 열심히 추를 피하며 건이는 내가 있는 자리로 뛰어왔다. 내가 장난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반 아이들이 나에게는 대추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에게 온 듯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식은땀을 빼며 건이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건이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건이는 내말에 반응하며 자신의 발 근처에 있는 대추를 차내며 말했다.
"아... 그냥 교무실 갔다 왔어."
"왜?"
다시 묻자 건이는 머리를 숙이더니 쑥스러운 듯 말했다.
"생활기록부에 추가할 내용이 있어서 담임한테 다녀왔어."
"정말? 뭐 추가했는데?"
내가 호기심이 가득 찬 말투로 묻자 건이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그냥... 이... 이것저것..."
건이는 나보다 키가 작고 통통하며 좀 덩치가 크지만 의외로 매우 소심하고 착한 애였다. 그래서 그런가 말 수도 적고 말을 하더라도 떠듬떠듬 천천히 말했다. 그나마 지금 나와 이정도 말하게 된 것은 그동안 내가 건이를 또박 또박 말하게 연습시킨 결과였다. 쑥스러움을 타는 것만 빼면 정말 처음과 비교하면 많을 발전을 이룬 것이다.
과거의 일을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피식하고 웃자 건이는 자신이 대답한 말을 가지고 그러나 싶었는지 당황해 했다.
"왜.. 웃어! 너.. 나쁘다!"
생각해보니 담임과 대화 할 때 대화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건이가 말을 할 때 떠듬떠듬 말하거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해서 거기에 답답함을 느낀 담임선생님이 건이의 말을 대충 듣고 자기가 마음대로 해석해, 이야기를 자신이 이끌어 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추가로 건이가 말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설교를 했을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건이와의 대화가 끝나고 잠시 후 '대추 싸움' 이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아이들이 잠시 숨을 고르며 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일 가까이에서 대추를 던지던 범수에게 물었다.
"대추 누가 가져온 거야?"
꽤나 힘들었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범수는 말했다.
"지성이가 가져왔어."
"왜?"
나의 물음에 범수는 모르겠다는 몸짓을 보였다.
내가 보기엔 학교에서 가지고 놀기 위해 가져온 것 일수도 있고 아니면 내일이나 오늘이 제삿날인데 집에 말린 대추가 없어서 지성이의 부모님이 올 때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학교 등교 길에 때마침 문이 열린 마트가 있어서 생각난 김에 샀는데 어쩌다 보니 학교에서 가지고 놀게 된 것 일수도 있고, 말린 대추가 의외로 맛있어서 가져왔는데 다른 애들 입맛에는 맛이 없다보니 놀게 된 것 일수도 있다. 내가 생각한 것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을 테지만 정확한 이유는 지성이 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희한하고 미스터리한 대추의 출처(?)를 지성이에게 물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나의 상상에 맡기는게 재밌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