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치 관련 뉴스를 보면서 ‘여당 대 야당’만큼이나 가장 많이 듣는 표현 중 하나가 ‘보수 대 진보’입니다. 이는 사실 어떤 특정 이념에 의한 대결구도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현) 여당은 보수당이고 (현) 야당은 진보당이다, 그러니까 보수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은 (현) 여당을 지지하고 진보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은 (현) 야당을 지지하며, 둘의 생각이 평행선을 달리듯 전혀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항상 서로를 비판하고 다수결 대결을 통해 승부를 가린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마치 이것이 선과 악처럼 영원한 대립구도이고,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인 것처럼 묘사가 됩니다.
이게 맞는 예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볼까요? 바로 ‘젊음’과 ‘늙음’에 대한 얘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젊음과 늙음은 생물학적으로 몇 살 이하, 몇 살 이상 이런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화합니다. 따라서 어제 젊음을 지향하던 마음을 가진 사람도, 내일은 늙은 마음(?)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 늙은이의 마음가짐으로 살던 사람도, 내일부터 갑자기 젊은이가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젊음이 좋고 늙음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늙음이 옳고 젊음이 그르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둘 다 우리 삶의 매 순간들을 나타내기 때문에 모두 똑같이 아름다운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면서 “아 이제 나도 늙었구나” 다들 한 번씩, 아니 꽤 자주 하죠? 우리보다 훨씬 나이 많은 분들이 보시면 가소롭다고 생각하실 것 같지만, 어쨌든 중학교 지나서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면서부터는 “야 우리 완전 늙은이야” 이런 말, 생각보다 자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게 마냥 싫지는 않고,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현실이 힘들 때면 가장 먼저 과거의 좋은 시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동시에 당장의 현실이 녹록하지 않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삶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더 희망찬 내일을 그려 보기도 합니다. 둘 모두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느 하나 부족하면 이 힘든 세상 살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즉, 둘 다 우리의 모습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먼 훗날의 내가 모두 ‘나’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불멸의 명작 만화 슬램덩크에 나온 강백호의 명대사가 있습니다.
“영감님,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난 지금입니다!”
이 말을 할 때의 강백호는 젊음 그 자체입니다. 이 말이 향하는 대상인 안 선생님은 늙음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강백호에게도 역시 ‘그때 그 순간’은 과거가 되고, 그때를 추억하는 훗날의 강백호도 지금의 안 선생님과 같은 입장이 되겠죠.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이지만, 안 선생님 또한 마찬가지로 강백호에게 저 말을 들었던 바로 그때 그 순간이, 그 경기가,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영광의 시대’가 아니었을까요? 이처럼 젊음과 늙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공존하고 있으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음의 상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둘 모두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구축하고 서로 대립한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 복고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는 나의 어린 시절에도 물론 복고가 인기 있었던 순간이 제법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원더걸스 때만 해도 일부 엔터테이너들의 트레이드 마크나 컨셉 정도로 여겨졌던 복고가, 이제는 강력한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이 된 것 같습니다.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슈가맨, 토토가, 써니, 응답하라 1997, 1994, 1988…
나는 비록 전부 다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정서에는 상당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옛 명곡들을 가만히 듣다 보면 정말 옛날 노래가 참 좋았고 그때 그 시절이 참 살기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그립고, 보고 싶은 분들…이 많이 있는 그런 시절입니다.
복고 열풍이 이처럼 광범위하게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그리기 보다는 ‘오늘보다 좋았던 지난날’를 추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다만 너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게 참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두고 “한국 사회가 보수화 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 ‘늙음’은 ‘보수’와, ‘젊음’은 ‘진보’와 동일시 하게 되는 것이 그 동안의 프레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보수 대 진보’의 구도는 ‘생물학적 늙은이 대 젊은이’의 구도가 되면서 세대전쟁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게 정말 맞는 표현일까요?
‘늙음’이 ‘보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젊음’이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늙음’과 ‘젋음’이 단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며 내 안에 동시에 공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 또한 서로를 구축하고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고 단지 하나인 것(나)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흔히 말하길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라고 하고, 보수는 변화에 소극적이고 현재의 상태를 굳건히 지키려는 이미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걸어갈 때 자세를 보면 한 발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다른 한 발은 땅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면 ‘걷는다’는, 그러니까 ‘살아간다’는 행위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진보라고 하는 마음가짐, 혹은 가치의 미덕은 앞으로 우리 사회와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모로 고민하여 다채롭게 제시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입니다. 이를테면 ‘커다란 강을 사이에 둔 건너편 마을과의 교류’라고 하는 ‘미래의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다리를 놓자, 또는 땅굴을 파자, 또는 강을 메워보자, 라고 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건너편 마을과의 교류를 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라고 하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한편 보수의 미덕은 바로 ‘안정적인 속도조절’입니다. 즉,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간에 우리가 한 발을 내딛고 나아가려고 할 때, 우리가 가장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속도를 정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만약 0(zero) 이어야 한다고 하면 앞선 이야기에서 ‘다리를 놓지 말자, 왜냐하면 다리를 놓은 이후 일어날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니 차라리 놓지 않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되는 것이고, 만약 0은 아니지만 조금 느린 속도여야 한다고 하면 ‘먼저 다리를 놓게 되면 각자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건너편 마을의 사람들과 의논을 해보고 결정하자’는 의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작정 다같이 삽을 뜨기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의논인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결론이 어떻게 나든 간에 ‘건너편 마을과의 교류’라고 하는 의제 자체는 진보적인 정신에서 탄생하는 것이고, 그 의제에 대한 다양한 검증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해 신중한 속도조절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보수적인 마음가짐의 존재의의입니다. 그러니까 맡은 역할이 서로 다를 뿐이지 사실은 둘 모두 우리가 나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가치이고 하나의 통합된 정신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둘 중 하나만을 택해서 다른 쪽을 택한 ‘상대편’과 ‘전쟁’ 운운하면서 극한적인 대립을 할 필요가 전혀 없을뿐더러, 이는 올바른 판단이나 접근방식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바로 이 진보적인 가치와 보수적인 가치 각각에 조금 더 중점을 둔 다양한 지지자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타협과 양보의 과정을 의미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잠시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상당히 보수적인 면을 많이 발휘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소유자라는 점을 밝힙니다. 일례로 초창기 스마트폰이 나오고 나서도 무려 1년 이상 동안, 단지 지금 쓰고 있는 3G 폰이 딱히 불편한 점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쓰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미국에 산 지도 어언 2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우버를 안 깔았습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뭐든지 천천히 고민하고 꼼꼼하게 따져서 결정하려는 편이고, 갑작스런 변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는 새로운 경험이나 모험보다는 안정적으로 반복되는 루틴과 계획 없는 주말을 사랑합니다. 이게 바로 내 안의 보수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아무런 진보적(?)인 면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다양한 종류의 차별에 가급적 반대하는 편이고, 기술의 발전이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이롭게 한다고 믿는 편이며, 사회적 소수 및 약자의 보호와 인권 보장에 상당 부분 공감하는 편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이러한 것들을 일반적으로 진보적 가치라고 말한 이유가, 그렇다면 보수적인 가치는 정반대의 주장(차별 찬성, 기술 반대, 약자 핍박)을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냐, 하면 그것은 절대x10 아닙니다. 그보다는 아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차별이 존재하고, 기술 발전에 대한 두려움이 해소되지 않았으며, 약자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만연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진보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방안들에 대해서 이것이 정말 맞는 방향인지 검증해 보고 만약 그렇다면 보다 현실적인 방법론은 어떻게 모색해야 하는지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보수적인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보와 보수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차별 찬성, 기술 반대, 약자 핍박의 개념은 ‘보수’가 아니라 ‘몰상식’이고 ‘불합리’ 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쭉 진보할 것입니다. 방향이 어디이든 간에, 때로는 약간씩 돌아가는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그것이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간다는 점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보수냐 진보냐 하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보적이고 또한 동시에 보수적인 존재들입니다. 둘 모두 ‘나’라고 하는 존재를 표현하는 각각 다른 모습에 다름 아니며,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또 돌아오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다름없는 오늘, 오늘보다 더 안 좋을 내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 바로 행복과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은 늘 똑같습니다. 오늘이 행복하다면 “늘 오늘만 같아라,” 오늘 행복하지 못하다면 “내일은 행복했으면” 하는 게 사람이고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보수와 진보를 가르고, 세대를 가르고, 지역을 나누어 대립 구도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 대립하는 것도 아니고 갈등하거나 경쟁하는 개념도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게끔 만들고 싶어하는 일부 언론사들이 프레임을 그렇게 잡아가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그렇게 해야만이 ‘보수당’을 참칭하는 현 여당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점점 늘어나는 인구 비중과 상대적으로 높은 투표율을 바탕으로 선거공학적으로 유리한 구도에 자리잡기 때문에 이것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유로 존재하고 있는 현 여-야당 간의 극한 대립 구도를, ‘보수 대 진보,’ ‘늙은이 대 젊은이,’ 더 심하게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빨갱이)’라는 허상으로 눈속임하고 이를 정당화시키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선거는 보수 대 진보 구도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상식 대 몰상식, 합리 대 불합리의 구도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총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 년간 흥행했던 영화들, 암살, 베테랑, 내부자들, 변호인 등등… 보면 상당 부분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충격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거나 한없이 실화에 가까운 허구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영화보다 더 기구한 현실, 영화가 아니라서 더 춥고 아프고 무서운 이 현실을 바꾸려면 보수 진보를 떠나서 더 큰 관점에서 대국적으로 판단하고 투표를 통해 정치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보수 진보가 토론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먼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정치 풍토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부디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하시어, 주권자로서 소중한 한 표의 권리를 보람찬 방향으로 행사하시길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