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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사건의 흐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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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Weltenbaum
추천 : 17
조회수 : 1869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04/08 16:21:45
교과서에서는 카노사의 굴욕을 파문당한 황제가 교황에게 용서를 구한 사건이며, 교황권의 상징을 보여준 사건 정도로 간단히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흐름 전체를 보면 이 사건은 동지중해 주요 세력의 정치외교적 이해관계가 맞물려있는 꽤나 복잡한 사건입니다.
모든 정보를 다 넣기엔 지면부족 역부족이므로 생략 및 축약된 부분이 존재합니다.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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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국교회 정책

오토 1세 이래 실시되고 있던 황권 강화 정책입니다. HRE의 역대 황제들은 세습 봉토와 작위를 가진 봉건영주들에게 맞불을 놓기 위해서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성직제후들을 여럿 임명하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성직제후들은 황제가 직접 서임하기 때문에 오로지 황제에게 충성하는 든든한 세력이 되어주었고, 성직제후가 죽으면 그 봉토가 다시 황제에게 돌아오는 특징 역시 존재합니다. 따라서 봉건귀족 세력의 약화와 황권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에 매우 좋은 정책이었습니다.


2. 그레고리오 7세의 등장과 성직서임권 분쟁

새 교황에 즉위한 그레고리오 7세는 원칙주의와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던 인물입니다. 또한 이 무렵 교회 세력은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전임 황제 하인리히 3세도 이 개혁운동의 지지입장을 표명했기에 세속분리 원칙을 내세워 황제에게서도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교황은 성직서임권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합니다. (분쟁에 대한 이야기는 이 링크에 라파예트 후작님이 남긴 댓글을 참조하세요)


3. 교황과 황제의 관계

황제권이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던 시절입니다. HRE 황제는 교황 상대로 갑질을 하면서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권위를 자랑했고, 황제의 결단에 따라 교황이 교체될 정도였습니다. 실제 하인리히 4세의 부황 하인리히 3세는 재위 기간 교황을 3번 교체했습니다. 따라서 황제와 교황이 충돌하면 결국 황제의 승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4. 교황의 든든한 빽줄 - 로베르 기스카르

로베르 기스카르는 노르만 귀족가문 출신의 용병 지휘관으로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유력 세력을 구축한 제후였습니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있었고, 이는 동로마 황제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러자 교황 니콜라오 2세는 로베르 기스카르를 적극 후원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영토와 영향력을 축소시켜 나갔습니다. 마침내 로베르 기스카르는 동로마 제국의 저항을 분쇄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황과 로베르 기스카르의 동맹 관계는 그레고리오 7세의 시기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황제가 실력행사로 나온다면 교황 역시 실력으로 맞불을 놓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5. 동로마 제국의 우울

한 때 동로마 제국은 동지중해의 수퍼파워였으나, 마케도니아조 말엽부터 시작된 무능황제들의 막장 통치로 인해 신나게 나라를 말아드시면서 정치적 혼란 + 경제력 붕괴 + 군사력 붕괴란 삼재에 시달리며 급속히 쇠퇴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동로마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유능한 인물로 손 꼽히던 콤니노스 가문의 알렉시오스 1세를 제위에 올리게 됩니다.

한편 과거 동로마의 황제 미카일 7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로베르 기스카르와 혼인동맹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혼인 동맹은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의 대혼란을 기회삼아 제위에 대햔 야옥을 드러내는 부메랑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또한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교황이 동로마 황제를 파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시기 그레고리오 7세가 알렉시오스 1세의 파문을 선언한 것은 동맹인 로베르 기스카르의 침공명분을 세워주기 위한 조치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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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 파문!

황제는 당초 북부 봉건제후들의 반란으로 교황의 태클을 수용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으나 이 문제가 해결되자 강경한 태도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은 황제를 파문해버립니다. 사실 과거에는 황제가 실력으로 보복에 나선다면 교황이 백기투항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가 회동을 청했을 때도 자신에게 보복을 가할것을 경계하여 거부한 바 있습니다. 덤으로 황제가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을 몰아내려 오는 줄 알고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2. 대립왕의 등장

황제의 파문소식은 제국 전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이 때 제후들이 독일의 왕으로 추대한 인물이 슈바벤 공작 루돌프입니다.
원래 HRE의 황제는 독일의 왕으로 먼저 추대된 다음 교황에게서 대관을 받는 절차를 거쳐서 황제로 즉위합니다. 또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견제하기 위해 루돌프를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파문당한 하인리히 4세를 대신할 황제 후보가 탄생한겁니다. 하인리히 4세의 입장에서는 실력행사를 하기는 커녕 당장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빠른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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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제의 굴욕

황제는 결국 북부 이탈리아를 순방중이던 교황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게 되고, 3일 만에 하인리히 4세와 접견한 교황은 파문을 취소합니다. 다시 명예가 신원된 하인리히 4세는 급히 귀국합니다. 해결해야될 일이 산더미 같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2. 작센 대반란

하인리히 4세는 대립왕 루돌프와의 내전을 펼치게 됩니다. 이 무렵 교황이 파문을 취소하면서 다시 황제를 지지하게 됩니다. 황제와 화해한 교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입니다만 이로 인해 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독일 제후들과 협력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점은 대립왕 루돌프의 명분을 갉아먹는 요소가 됐습니다.

결국 내전은 대립왕 루돌프가 교전 중 전사하고 작센 귀족들이 분열되면서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사실 이겼다고 해도 겨우 옥좌를 지켰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큰 위기였습니다. 당연히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게 됩니다.


3. 동로마의 위기

당시 동로마는 단독으로 모든 외적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외교적으로 위협이 되는 요소 제거 + 한 방향으로의 군사력 올인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로베르
기스카르가 제국 서부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이 문제를 어떻게든 외교적으로 풀어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되고, 노르만 족의 침공과 서부 지역의 상실이 현실화될 상황에 처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예상 외의 전개를 불러일으키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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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르만족의 일리리아 침공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 주력이 동로마의 속주 일리리아(알바니아)에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게 됩니다. 동로마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일단 군대를 파견함과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파견합니다. 바로 노르만 족의 침공 사실을 알리면서 군사협정을 청한 것입니다.

HRE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흔쾌히 동로마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노르만족이 동방 제국과 전쟁중이란 것은 곧 황제가 실력으로 교황에게 보복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됐다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동로마는 로베르군과 격전 끝에 패배하게 되지만 그 사이 황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2. 역습의 황제

동로마와 군사 협정을 맺은 하인리히 4세는 즉각 교회회의를 소집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와 새 교황으로 클레멘스 3세를 선포한 황제는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를 점령한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를 산탄젤로 성에 유폐시켰고, 클레멘스 3세가 집전하는 대관식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3. 미완의 복수

하인리히 4세는 동로마와의 협정에 따라 남부 이탈리아를 공격했지만
로베르 기스카르가 주력군을 이끌고 돌아오면서 철수하게 됩니다. 로마를 탈환한 로베르 기스카르는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했고 다시 교황으로 복위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황제가 내세운 클레멘스 3세는 정식 교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레고리오 7세는 안전을 이유로 로마에서 살레르노로 강제 이주했고 1년 후 죽습니다. 하인리히 4세도 이런저런 일을 벌리는 과정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국 적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들의 Succeding You. Father! 반란에 굴복하여 퇴위를 선언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퇴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습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다시 동로마의 본토를 공격하다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정확히는 진중에 전염병이 돌고 있음에도 원정을 계속하다가 본인마저 쓰러집니다. 여담으로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 보에몽이 다시 동로마에 도전했지만 이 때의 제국은 황제의 기량도 그렇고 군사력도 노르만족의 세력을 앞설 정도로 회복한 상태였기에 보에몽은 아버지가 과거 동로마로부터 빼앗았던 땅 대부분을 상실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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