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쁜 딸이에요.
아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저는.. 드문드문 떠오르는 몇가지 기억 정도..?
저와 동생이 어릴 때부터 아빠는 집에 계시다 안계시다 결국은 엄마와 별거를 하셨거든요.
정식 이혼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 하셨구요.
아직도 기억나는게..6년전인가 제가 20대 초반 일 때,
아빠와 결혼할 사람이라며 고모라는 작자가 어떤 여자와 찾아왔었어요.
너네가 아무리 엄마 손에 컸어도 결국은 우리 o씨 집안 핏줄이라며, 이 분 종종 만나고 엄마라고 부르라고..
미술을 전공하시다 아빠와 결혼하며 꿈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된 엄마가
보험, 식당일, 마트 캐셔, 급식 조리사, 트럭 양말, 악세사리 판매, 분식집 찬모
안해본 일 없이 고생고생 하셔서 저희 남매 키워주셨거든요.
근데 엄마가 멀쩡히 계신데 왠 젊은 여자보고 엄마라고 부르라니..
쌍욕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는데 철없어도 어른은 어른이지 하며 참았던게 살면서 지금까지도 후회됩니다.
그래서 아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혼하신 후 다른 여자 만나는거 상관없구요, 경제적 지원 안해줬어도 상관없었어요.
그냥 우리를 낳아준 아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사기죄로 교도소에 가셨대요. 사업을 이것 저것 하셨거든요.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분이셨어요.
그래서 더 집에 정 못붙이고 밖을 돌아다니신것도 있다고 생각하구요.
그곳에서 지내다보니 지난 삶이 너무 후회되고 결국 인생에 남는건 조강지처와 자식들 뿐이라며
늦게 뉘우쳐 미안하지만 정해진 징역 다 살고 나가면 새 사람 되어 잘해보겠다고 편지가 왔어요.
그래도 아빠는 아빠라서..엄마랑 면회 찾아갔어요. 버스 5시간 타구요.
삐쩍 말랐더라구요. 멋부리기 좋아해서 40대에도 머리를 연하게 염색하고 꾸미시던 분인데 초췌하더라구요.
안에서 쓰시라고 돈이랑 간식 넣어드리고 돌아왔어요.
인터넷편지는 이삼일에 한번 꼴로 써드렸어요. 나와서 정신차린다는 약속 꼭 지키시라구.
답장이 두어번 왔었는데 혈변을 본다고 몸이 안좋은 것 같아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신청했다고.
당장 병원비가 없으니 이쪽에 연락해서 병원비를 보내줄 수 있겠냐고.
그땐 그냥 변비나 치질 이런거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요. 혹은 돈이 필요해 거짓말을 하신다고 생각했어요.
제게 아빠는 평생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오더라구요? 아빠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대장암 4기라고..와보셔야겠다고.
면회갔을 때 초췌한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볼품없는 사람이 되어있더라구요..아빠가.
한 3,4개월 만이었나..그랬을거에요.
그렇게 우리 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밖에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지었길래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나 불쌍했어요.
그래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일주일에 2일씩 제가 병원에 올라가서 지냈어요.
간병인은 나라에서 나오더라구요. 아빠가 국가유공자셨거든요.
그래서 평일엔 간병인 분이, 주말엔 제가 아빠 곁을 지켰어요.
그러다가 평일에 그 고모란 작자가 찾아왔대요.
이제와서 자식노릇 하려는 저를 믿지 말고 본인을 믿으라 했대요.
아빠의 국가유공자 사후 혜택과 혹시 모를 보험금을 노린거였어요. 아빠의 통장 잔고도 수시로 확인했다고 하더라구요.
아빠는 다행히도 고모를 믿지 않았어요.
고모는 모르거든요. 아빠는 수많은 빚이 있다는걸.
혹시 돌아가시게 되면 저희는 재산상속포기를 통해 빚도 재산도 모두 포기할 요량이었어요.
그 분은 그런것도 모르고 이간질을 시키다가 안될 것 같으니 어느 날 발길을 뚝 끊고 죽거든 연락해라 문자만 하셨더라구요.
그렇게 2-3달정도 제가 병원을 왔다갔다 했고
아빠는 그 사이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내셨더라구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계셨어요.
모르핀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저한테 아줌마라고 하거나..엄마한테 간호사라고 부르는걸 보면서 너무 괴로웠어요.
그래서 인터넷에 한때 유행하던 암걸리겠다ㅋㅋ이런 말 혐오했구요..그 항암제 짤도 보기도 싫더라구요.
병원에서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겠다고..
소개해주는 호스피스로 가시라고 하더라구요.
소견서에는 향후 1개월을 넘기기 어려우므로 호스피스로 보낸다는 식의 문장이 있었구요..
그렇게 눈 내리는 1월 초, 한 호스피스로 아빠를 모셔다드렸어요.
저는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었어요. 매 방학마다 2주짜리 장기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어김없이 1월 중순부터 그 봉사를 시작했구요,
봉사가 끝나기 2일 전인 수요일, 호스피스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번 주말을 넘기기 어려우실 것 같으니 주말 안에 오시라고.
봉사가 금요일에 끝나요. 금요일 오후에 바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따로 엄마께 말씀드리지도 않았구요.
스물 셋..그닥 어린 나이는 아니었는데 왜 판단력이 저따구였는지 지금도 의문이에요.
목요일 아침에 연락이 왔어요. 돌아가셨다고..
그제서야 미친 사람처럼 준비를 하고 이모가 태워주시는 차를 타고 올라갔어요.
9시 안되서 돌아가셨고..전화받은 후 4시간 채 안되게 걸려 5시간 거리를 달려갔네요.
마지막으로 본 아빠의 코에는 상처가 있었어요.
혼자 빨래 넣으러 걸어가다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라고 호스피스 직원분이 설명해주시더라구요.
아빠와 방을 같이 쓰던 다른 환우분이 저희를 원망하시더라구요. 어떻게 첫 날 이후 한번도 안찾아왔냐고..
호스피스에 아빠를 입원시켜드리고 딱 20일만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땐..그냥..모르겠어요.
아빠에 대한 정도 없었고 추억도 기억도 없고..원망만 많던 20여년 세월을 보냈었어서요..
제 주변 친구들은 다 아빠가 벌어오신 돈으로 가족 모두 행복하게 살고 하고싶은걸 하는데
저는 고3때부터 대학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단 한번도 알바를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매일 피곤에 찌들었구요.
그래서 항상 아빠를 원망했어요. 미워했었구요.
주말마다 가면서 사실 귀찮은 때도 있었어요.
평점 4.3 이상 유지하던 제가 그 학기는 3.5 겨우 받았구요..
일요일 밤 제가 사는 지역으로 돌아오면 병원에서 지낸 이틀이 너무 피곤해서 평일 5일도 솔직히 사는게 사는게 아닌 것 같았어요.
절망과 고통속의 암환우 6명과 그 보호자들이 있는 병실에 같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많지 않은 나이의 저에게는 적지않은 스트레스였거든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뭔가 무너지듯 제 안의 감정들이 막소용돌이쳐서 밀려왔어요.
개같은 핑계지만, 사회복지가 하기 싫어서 4년간 봉사활동도 꾸준히 해왔고 그것만 보고 달려왔는데 다 때려치웠어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남 돕자고 착한 일 좀 하자고 나를 낳아주신 분의 임종조차 못지켰을까 싶었어요 그 당시엔..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것도 보기 싫었고 몇개월을 폐인처럼 지낸 것 같아요.
예전에 고게의 익명으로 올라온 고민을털어놔봐요! 하는 글에
익명으로 댓글 남긴 적 있는데 많은 분들이 들어주시니 마음의 짐이 1g이라도 덜어지는 것 같더라구요.
오늘따라 자꾸 문득문득 아빠가 떠올라서 그래서 한번 끄적여봤어요..
설거지 하다가도, 누워 있다가도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나더라구요!!
평생 용서받지 못할 일이지만 그래도 아빠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있어요. 가시는 길 너무 쓸쓸했을 것 같아서..
하늘에 계신 아빠도 제 진심을 알아주시겠죠?
두서 없이 써내려가서 저만의 뻘글이 되겠지만 그냥 끝까지 읽으셨다면요
속으로라도 괜찮아..아빠는 널 다 용서하셨을거야..한 번만 기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