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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글 펌) 한사군은 반도에 있었는가?
게시물ID : history_119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쓰는사람
추천 : 3/4
조회수 : 1111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3/10/08 20: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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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현(漢郡縣) 재 반도설을 반박한다!>
됴션 후기「소중화사상」과 「반도사관」에 입각한 사학자들로 부터 시작된 「한군현재반도설(漢郡縣在半島說)」
왜정(倭政) 치하 36년을 거치며 일본의 손에 의해 더욱 체계화 되고 광복 후 리병도박사에 의하여 남한사학계에서 정설이 되어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불과 1980년대 <국사>교과서까지만해도 교과서 지도에서 평양지역에 '낙랑(락랑)', '대방'이라는 글귀가 세겨진 것을 보신적이 있으실겁니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4개의 군과 현을 '한사군'이라한다." 기억나실겁니다. 지도에 나와있는 위치와 이름을 그대로 외우고 시험봤었죠.
 그러나 90년대생 이후 교육과정으로 배운 학생들의 교과서에는 '한사군'이란 것이 있었다. 정도에서 서술을 멈추고 그 위치를 표기하지 않고있습니다.
왜 일까요? 뭔가 자신들의 이론에 큰 차질이 생겨서가 아닐까요? 
교과서에는 삭제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지리부도, 역사부도에 실리는「한군현재반도설(漢郡縣在半島說)」을 반박하고 올바른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서 글 하나 올립니다. 
 
들어가기 앞서 2가지 전제를 두고 가겠습니다.
 
1. 패수와 갈석산의 위치는 곧 락랑군의 위치이다.
2. 기자와 위만이 넘어온 그 곳에 한군현이 세워진다.
 
잘 기억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 패수와 갈석산의 위치는 곧 락랑군의 위치이다.
일단 기록 하나를 보고 가겠습니다.
『後漢書』 「光武帝 本紀」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후한서』 「광무제 본기」 락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료동에 있다.
 
락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료동에 있다라....
어라? 이상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서는 분명히 '반도'에 있었다 배웠는데, 료동(요동)이라구요???
여기에서 놀라시면 안됩니다. 앞으로 나올 기록들에는 놀랄만한 내용이 가득합니다!
위의 기록을 믿으시기 힘드시다고요?
다른 기록을 봅시다.

『史記』「朝鮮列傳」
『사기』「조선열전」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障塞 秦滅燕 屬遼東外遼 漢興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屬燕 (후략)
조선왕 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가 전성할 때 진번과 조선 땅을 침입하여 관리를 배치하고 장새를 축성한 적이 있었는데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킨 후에는 (그 장새 지역을) 요동의 바깥 울타리로 삼았다. 한나라가 세워진 후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 <료동의 옛 새를 다시 보수하여 지키고 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국에 소속시켜 관리케 하였다.> (후략)

<...> 이 부분에 한사군이 세워집니다.

진나라에 의해 지배받던 지역(연)이 나중에 한나라로 넘어가 한사군의 지역이 되는데이곳은 ‘료동’이고, ‘패수’ 주변이라 합니다.
그럼 패수는 어디인가?
수경주의 기록을 봅시다.

『水經注』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出海
『수경주』패수는 락랑군(樂浪郡) 루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臨浿縣)을 통과하여 동쪽바다로 들어간다.
지금 국사학계에서는 패수를 ‘청천강‘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지요?
중국이 말하는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 락랑군이 위치하였다 합니다.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은 동고서저(東高西低)입니다.
패수는 큰 강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큰 강 중 동에서 서로 가지 않고 서에서 동으로 가는 강이 있습니까?
다른 기록을 보겠습니다.

『十三州志』曰 浿水县在樂浪東北,鏤方县在郡東 盖出其县南迳鏤方也。謂出浿水迳鏤方也。昔燕人衛满,自浿水西至朝鮮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락랑의 동북에 있고 루방현은 락랑군의 동쪽에 있다. 대게 그현에서 나와 남쪽루방을 지나간다. 위수도 패수에서 나와 루방을 지나간다. 옛 연나라 위만이 패수의 서쪽 조선으로 넘어갔다한다.
 
위 기록은 『십삼주지』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주목할 부분은 '동북'과 과거 '위만'이 '패수의 서쪽에 위치한 조선'으로 넘어갔다는 부분입니다.
만약 국사학계의 정설인 '청천강'이 '패수'라면 위만은 한반도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라는 반도의 조그마한 나라를 치기 위하여 료동성(?)을 건드리고(???), 1년간 위만조선과의 큰 싸움을 했었다는 것... 말이 안되지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해봅시다.
위 기록들을 보았을때 주로 '동'으로 빠지는 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동으로 빠지는 강은 지금의 ‘난하’입니다. ‘료하‘라고 비정한다면 서쪽으로 빠지지요.
한서 지리지를 봅시다.
 
『漢書』 「地理志」
『한서』 「지리지」
浿水 水西至增地入海
패수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含資 帶水西至帶方入海
함자 대수가 서쪽으로 흘러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呑列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점제縣入海 行八百二十里
탄열 분려산이 있고 열수가 발원한다. 서쪽으로 흘러 점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길이는 820리이다.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패수가 새외에서 흘러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료동군 번한현 기록)
(*함자, 탄열은 락랑군의 속현입니다.)
다른 기록입니다.
여기에서는 패수가 서쪽으로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식민사학자들의 논리와 같은 것이 아닌가?
서로 빠지는 강이라면... 반도가 아니겠는가?
위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반도의 강뿐만 아니라 료하도 서로 빠진다.
위의 기록은 ‘료동’관련조 지리기록입니다.
즉 패수라는 강이 반도의 청천강이 아니라 '난하', 혹은 '료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확실한 것은 패수의 위치가 반도가 아닌 료동, 료서 지역 중 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패수에 대해서는 간략히 보았습니다. 그럼 갈석산에 대해서 볼까요?
다음 기록을 보겠습니다.
 
『太康地理志』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태강지리지』 락랑은 수성현 갈석산에 있는데. 장성(만리장성)의 시작이 이 곳이다.
 
락랑군은 진의 장성인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고 합니다.

언제 4000년 동안 반도에 만리장성 봤다는 사람 있습니까?
국사학자들의 말에 따라 "만리장성이 전라도까지 있으셔서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야!)
그럼 락랑군이 위치한 갈석산은 어디인가?
조선반도인가 요동인가.
아래 기록을 보겠습니다.
 
『通典』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통전』 좌갈석산(左碣石山)이 한(漢)의 락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진(秦)의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했다. 지금 증험하니, 장성이 동쪽으로 료수(遼水)를 가로질러서 고려(高麗)로 들어갔는데, 그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桑邱 『括地志』,在易州遂城縣界,則 此平邑亦應在靈丘西北
상구는 『괄지지(당대 지리지)』에 역주 수성현 경계에 있다. 즉 평읍에 응당 령구서북에 있다.
 
『地理志』 代郡有平邑縣,在今山西大同府陽高縣西南 [原注:亦在靈丘縣西北] 此趙之平邑也
『지리지』 대군에는 평읍현이 있다. 지금 산서성 대동부 양고현서남이다. [원주: 또 령구현 서북에 있다.] 즉 조의 평읍이다.
갈석산과 그 부속 지리를 확산시켜 봐나가면 ‘산서성’이라는 결론이 납니다. 녯 료서지역 중 한 곳이죠.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大明一統志』「北平郡」 朝鮮城在永平府境內 郡名 孤竹古名 北平爲秦名 盧龍爲魏名 北燕爲平州及樂浪郡 北魏改樂浪爲北平.
『대명일통지』「북평군」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 북평은 군 이름이다. 고죽은 옛 이름이고, 북평은 진나라 때ㄴ 이름이며, 노룡은 북위 때 이름이다. 북연 때는 평주와 락랑군이라 불렀고, 북위 때 락랑군을 북평군으로 바꾸었다.
 
『廣輿』 昔 右北平 北燕 卽 樂浪也
『광여』 옛 우북평 북연이 곧 락랑이다.
 
『路史』「國名紀」 箕子, 朝鮮後, 封遼之樂浪。今平之盧龍有朝鮮城。故武德以遼爲箕州, <注:八年> 而高麗亦其地
『노사』「국명기」 기자의 후예를 료동의 락랑(樂浪)에 봉하였다. 지금의 평주(平州) 노룡(盧龍)에는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그래서 무덕(武德)(당고조 이연의 연호) 때 요동(遼東)을 기주(箕州)로 삼았던 것이며,<8년이다> 고구려 역시 그 지역이다.
 
기자의 후예를 료동에 봉하였는데 그 봉한 곳의 이름이 락랑군이라는 것입니다.
대놓고 료동에 락랑군을 봉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기록을 보지요.
 
『漢書』 「地理志」 武帝元封三年开 莽曰樂鮮 属幽州 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
『한서』 「지리지」 무제 3년 莽가 말하길 락선은 유주에 있다. 호는 62812이고 406748명이다.여기에서는 락랑을 락선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漢書』 「地理志」 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한서』 「지리지」 락랑군樂浪郡, 무제 원봉 3년에 개설하였다. 왕망 시기에 락선군樂鮮郡이라고 하였다.
 
이때 잠깐 이름을 바꿉니다.
하나 더! 평양에서 발견된 <락랑대윤장> 봉니의 진실!!!
평양에서 발견되었다는 <락랑대윤장>봉니는 다음 기록으로 허구인 것이 들통납니다.
 
『漢書』 「王莽傳」 始建國元年, 改郡太守曰大尹.
『한서』 「왕망전」 시건국 원년(9)에 군郡 태수太守를 고쳐 대윤大尹이라고 하였다.
 
『漢書』 「地理志」 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한서』 「지리지」 락랑군樂浪郡, 무제 원봉 3년에 개설하였다. 왕망 시기에 락선군樂鮮郡이라고 하였다.
 
만약 진짜 봉니라면 <락랑대윤장>이 아닌 <락선대윤장> 혹은 <락랑태수장>이라 써져있었어야 합니다.
<락랑대윤장>은 당시 시기에 맞지 않는 거짓입니다.
여튼 여기에서는 <유주>라는 곳에 락랑군이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지금의 베이징(北京) 주변입니다.위의 모든 기록을 보았을 때 락랑군(한사군 모두)은 반도가 아닌 료서 혹은 료동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속현이 25개이고 그 현의 크기가 크고 인구가 40만에 가까웠다는 점을 들어 료서와 료동에 걸쳐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이제 왜와 관련된 기록을 하나 보실까요?
 
『三國志』 - 위서 「倭人傳」
『삼국지』 - 위서 「왜인전」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餘國 <從郡至倭 循海岸水行歷韓國 作南作東 到其北岸拘邪韓國 七千餘裏> 始度一海千餘裏至對馬國...又南度一海千餘裏 名曰澣海 至一大國...又度一海千餘裏至末魯國...南至邪馬臺國 女王之所都...
왜인들은 대방 동남쪽에 있는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산과 섬에 나라를 세우고 모여 산다. 예전 백여 나라가 있어 한 시기에 조견하였다는데 지금은 사신을 보내 통하는 자는 30 여국에 그친다. <군에서 왜에 이르는 길은 해안을 돌아 뱃길로 한국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다 동쪽으로 나가면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에 도달하는데 그곳까지는 7000 여리가 된다.> 바다를 건너서 1000 여리 가면 대마국에 이르고... 또 남쪽으로 바다길 1000 리를 건너는데 한해라고 하며 일대국에 이른다.... 또 바다길 1000 여리를 건너 말로국에 이르고 ...육로로 남쪽으로 가면 야마대국에 이른다. 여왕이 다스리는 곳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7000리라는 기록입니다.
구야한국은 지금의 부산지역입니다.
반도 중부에서(한사군이 반도에 있다는 식민빠 말대로 볼 때) 반도 남부를 ‘배’타고 가는데 7000여리가 나오겠습니까? 반도에서 반도이동은 배가 아닌 육로로 가도 됩니다.
그런데 육로로 가든 해로로 가든 절대로 7000여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면, 반도의 대방군에서 열도로 갔었을 때 절대로 7000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동북아 지형을 잘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반도에서 출발하여 열도를 가면 길어봐야 3000~5000리입니다.
그러나 되려 료동(현 속 료서)지역에서(대방은 료동(현 속 료서)에 있었다 생각됩니다.)에서 출발한다면 7000여리를 건너 도착한다는 것이 맞아떨어집니다.
위와 같은 기록을 보았을 때 '반도'가 아닌 '료동, 료서'지역에 한군현이 존재하였다는 이론이 성립 가능합니다. 
 
 
2. 기자와 위만이 봉해진 지역에 한군현이 세워진다.
 
『수서』 배구전(裴矩傳)에 다음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본서에서는 고려라 표기)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箕子)를 봉하였고,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기자를 봉한 땅이 고죽과 가까웠고 그곳은 고구려 땅이며, 한사군 땅이란 소리입니다.
 즉, 기자를 봉한 옛 땅을 찾아낸다면 한군현의 위치도 찾을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大明一統志』「北平郡」 朝鮮城在永平府境內 郡名 孤竹古名 北平爲秦名 盧龍爲魏名 北燕爲平州及樂浪郡 北魏改樂浪爲北平.
『대명일통지』「북평군」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 북평은 군 이름이다. 고죽은 옛 이름이고, 북평은 진나라 때 이름이며, 노룡은 북위 때 이름이다. 북연 때는 평주와 락랑군이라 불렀고, 북위 때 락랑군을 북평군으로 바꾸었다.

『廣輿』 昔 右北平 北燕 卽 樂浪也
『광여』 옛 우북평 북연이 곧 락랑이다.

『路史』「國名紀」 箕子, 朝鮮後, 封遼之樂浪。今平之盧龍有朝鮮城。故武德以遼爲箕州, <注:八年> 而高麗亦其地
『노사』「국명기」 기자의 후예를 료동의 락랑(樂浪)에 봉하였다. 지금의 평주(平州) 노룡(盧龍)에는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그래서 무덕(武德)(당고조 이연의 연호) 때 요동(遼東)을 기주(箕州)로 삼았던 것이며,<8년이다> 고구려 역시 그 지역이다.
 
『地理志』云孤竹國在遼西令支縣故也。
『지리지』 고죽국은 요서 영지현에 있다
 
『說文』 許愼云首陽山在遼西。
『설문』 허신이 전하길,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

『史記集解』馬融曰 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
『사기집해』 마융이 말하길 “수양산은 하동 포판 화산의 북에 있고, 강이 꺾이는 곳에 있다."
 
아래는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에 속한 요서군을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遼西郡요서군)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 (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요서군은 낙랑군, 요동군, 우북평군, 상곡군, 어양군, 현토군과 함께 유주(幽州)에 속한 군으로 산서성 최남부 현 운성시 서쪽을 말하는 것이며, 낙랑군은 산서성 최남부 원곡에서부터 동쪽으로 황하북부 하남성이란 소리입니다.
자, 이 기록들을 보았을 때, 기자가 봉해졌던 지역은 어디일까요?
반도? 아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해석은 여러분들 자유입니다.지금까지 락랑군 그리고 한군현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과 설명을 읽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때 한군현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반도? 아님, 료동, 료서?
해석은 여러분들께서 직접 해주시기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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