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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조선과 일본 (밑에 조선통신사 글을 보고)
게시물ID : history_119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KalosAgathos
추천 : 0
조회수 : 6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0/08 18:36:00
밑에 조선통신사 글을 보고 요즘 공부하는 부분과 겹치는 곳이 있길래 글을 남깁니다.

소중화주의를 유지해온 조선이 명나라의 멸망을 통해 중화의 주체가 된 것은(혹은 스스로 그렇게 여긴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화", 즉 유교적인 성취도를 고려할 때이지 경제, 군사, 무역과 같은 실학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중화사상이란 중국의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유지한 채 중화를 받아들인 국가와 아닌 국가를, 정확히 말하면 "유교"(조선의 경우 성리학)의 성취도에 따라 소중화 국가에서 야만인으로 나눠지는 것이었지요.

밑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은 성리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소중화를 자처하였지요. 하지만 이게 얼마나 실없는 일입니까...

아무도 인정 안해주는(외교적 차원에서) 조선의 소중화를 밀고 가는 것이 저에겐 그저 자기 합리화, 자기 위안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교는 물론 나라를 진정시키고 다스리는데에는 궁극의 도구임은 확실합니다. 도쿠가와 막부에서도 중앙집권체제로 만드는 과정에서 유교를 장려했구요...

하지만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과는 달리 조선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속에 유교는 기득권층의 정치적인 목적으로밖에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그때문에 생긴 지속적인 정치싸움으로 국력은 쇠하고 말았지요... 

특히 임진왜란때 그렇게 우수수 무너진 군대를 보면 얼마나 사회가 썩어 문드러졌었는지 알 수 있지요 (조총이 상대할 수 없던 무기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군 내 조총 보급률이 높았던 것도 아니구요).

제가 내린 결론은 당시 조선은 유교의 틀 안에 갇혀 우물안의 개구리로 지낼 수 밖에 없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명나라가 망한 후 처세를 잘 못해서 병자호란도 맞게 되지요.. ㅎㅎ

결국 제 생각엔 유교로부터 얻은 것은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밑에 글에서 나온 실학자들이 한 말들이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같습니다.

당시 일본은 적어도 무역면에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중국도 누르하치가 중원 및 북부 부족들을 잘 다져놔서 폭발적인 성장중이었을 것 같구요).

사실 조선은 이때 성장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쇄국정책을 펼쳐서 결국 국운이 다한 것 같습니다.

그 엄청난 기회라는 것은 무역에 관한 것이었구요...

당시 일본은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은 생산국이었습니다.

그 은들은 주로 중국으로 향했구요. 그리고 그 무역 루트는 조선을 통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ㅎㅎ

동서고금을 통틀어봐도 중계무역처럼 잘 남는 장사가 없었지요...

그리고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은 시장은 중국이었구요. 중국은 금본위제가 아닌 은본위제였답니다.

그리고 당시 유럽 상인들과 조선의 접촉을 일본에서(엄밀히 말하면 대마도 영주) 막아서 유럽상인들과의 접촉도 이루어지지 못하였구요.

역사엔 만약이 없다지만 그 접촉이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됬을지 궁금하긴 하네요.

그냥 주저리저저리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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