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지금은 국문國文으로서 우리가 쓰는 일상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국문이 아닌 언문諺文으로 한문(漢文)과 대비되어 그 지위가 낮은 글이었습니다.
한글이 국문의 자리를 쟁취한것은 갑오개혁을 전후한 일로서 정확히는 1894년 고종이 법률과 칙령은 국문을 기본으로 하되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혼용하거나 한다 라는 칙령을 내리면서부터라고 볼수가 있는데 그 이전까지는 그 지위가 한문에 비하여 낮은게 사실이었지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시로 말미암아 한국어의 전면적 표기는 가능해졌으나 그 사용은 극히 제한되어 한문 서적의 언해나 한자음의 표기등 한자를 보완하는데 국한되었으며 공적인 자리에서는 절대 사용할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흔하게 잘못 생각할수 있는게, 아래에 올라온 언간諺簡 즉 한글 편지와 같은 사례를 통해 조선에 한글이 박대받지 않고 널리 사용되었다 라는 것인데 이 언간이야 말로 당시 한글이 받았던 제약을 숨김 없이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언문으로 작성된 이 서신은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둘 중하나가 반드시 부녀자인 즉 공적인 영역을 담당하던 남성과는 거리가 있는 비 공식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남성 간의 사례가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사례가 매우 희귀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한문 편지가 사대부 남성의 전유물이라면 언간은 계층과 무관한 것이라 할수 있겠지만 이는 대중적인 것이라는 증명보다는 단계적인 확산과 비공식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겠지요.
쉽게 말해 한문 보다 그 이름에서 볼수 있듯 지위는 낮았으나 쓰이기는 널리 쓰인게 맞습니다, 다만 한글 즉 언문이 널리 쓰인 시기는 정확히 추론하기 어려우나 19세기에 언간독諺簡牘 즉 각종 언간에 사용되는 서식을 모아 놓은 서책이 있어 이 시기를 전후한것이 아닌가 할 따름이지요.
이 서책에서는 부자간, 형제간, 친구간, 상고간 등 이전에 남성들이 주고 받던 한문 서신에서 사용되었던 서식들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일상화된 언간의 사용과 더불어 한글이 보다 널리 퍼진 것을 알수가 있는데 이에 더하여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징보언간독增補諺簡牘 이라는 서책에서 상전과 노비의 사이인 주종간의 관계의 서식을 논하는 것을 볼때 하층민에게까지 널리 퍼진 것은 이 시기가 아닐까 추론하고 있습니다.
물론 언간의 확대는 이러한 서책 뿐만이 아니라 언간의 내용에서도 찾아볼수 있는 내용입니다, 16세기 초만 하더라도 남 녀 모두 한문의 필체를 투박하게 옮겨놓은 효빈체效顰體를 사용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남 녀의 필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합니다, 가령 남자는 초체草體라 하여 각 글자를 흘려쓰는 글씨체를 주로 썼고 여자는 궁궐에서 유행했다는 세로획이 가지런하게 그려진 궁체宮體를 주로 사용하는등 글자체가 정착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17세기 사대부 간에 오고간 언간을 모아놓은 언간첩諺簡帖이 여럿 발견되는 것을 볼때 한글이 지방에 까지 퍼진 시기로 추정되는 16세기의 늦어도 중 후반에는 적지 않은 언간이 오고 갔으리라는것을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물론 언간이라는게 비단 민간에만 있는것은 아니나 임금의 필적은 신성하며 민간의 필적은 비속한 까닭에 일종의 금기와 다름없어 대개 세초와 반송을 통해 삭제된 까닭이 큽니다, 무엇보다 언문이라는 격이 낮은 서신을 주고 받는 경우가 드물었다는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간략하게 쓴다고 쓰고 보니 두서가 없는데 그렇습니다, 한글은 한문에 대비되어 언문이라 불렸습니다, 그 지위는 이름 그대로 한문을 보완하는 글이었지요, 다만 한국어를 전면적으로 표기할수 있다는 장점은 결코 좌시되지 않은 까닭에 왕실로부터 단계적으로 민간으로 퍼져나가 널리 활용이 되었으나 사실상 하층민 즉 천민들에게 까지 한글이 퍼진것은 19세기를 전후한 일이며 공적인 글 즉 국문은 한문이었습니다.
언간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글이 조선 전역에서 널리 쓰였다거나 한문과 대등한 지위는 결코 아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