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일장이라는 말이 있지.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지금껏 해왔던 사업도 승승장구했고, 물론 때로는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도 있지만 불운보다는 행운이 잇따른 게 사실이다. 고난에 처했을 때 나는 현재의 내 현실을 항목화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면 의외로 현재 상황이 생각보다는 견딜만하다는 것을 알게되고 때로는 생각지 못했던 해결방안을 찾기도 한다.
그래서 정리해보자면,
1. (행운) 나는 불사신이 되었다.
솔직히 믿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다. 영화나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나는 죽음과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다. 뭘 해도 죽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죽지는 않되 그외 나머지는 평상시와 똑같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괴력이 생기거나 초능력을 쓰거나 몸이 변화하거나 반지를 얻는 일은 없었다는 얘기다. 나는 나이고 그대로인데 다만 죽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당사자인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방사능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적어도 거미에 물린 적은 없다. 소싯적에 홍삼이니 영지버섯이니하는 류들을 열심히 챙겨먹었으니까 그로 인해 일어난 현상은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때는 나사라든가 하다 못해 쉴드의 비밀요원이라도 나타나 내 비밀을 풀어줬으면 한다.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2. (행운) 나는 핵의 위협에서 살아남았다.
황금만능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는 적어도 돈으로 안 되는 일이 1이라면 가능한 일은 99정도라고 본다. 지구의 인구가 70억이라면 쉘터에서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 소수의 인원 중의 한 명이다. 어쩌면 이 때를 위해 내가 그토록 열심히 사업을 꾸려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예전 목표는 돈으로 채워진 매트리스에 눕는 것이기는 했다. 예쁜 여자랑. 아무튼 큰 돈이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나는 쉘터 한 곳에 내 자리를 마련했다. 쉘터 안에 마련된 영상홀에서 핵이 터지는 장면을 보고, 물론 불안정한 영상이 그 즉시 끊기기는 했지만, 살아있다는 걸 체감했다. 항목 1에서 내가 죽지 않는 이유로 방사능을 꼽은 것도 이래서다. 물론 핵폭탄이 터졌을 때 직접적으로 핵에 노출되거나 방사능을 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어쩌면 한번에 너무 많은 인원이 천국에 수용되는 바람에 내 대기번호가 저멀리 뒤로 밀린 걸지도. 아니면 비싼 값에 꾸준히 복용했던 산삼때문일까...?
3. (행운) 나는 좀비바이러스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
쑥대밭이 될 것을 알면서도 왜 핵을 투하했는가에 대한 정답되시겠다. 어디에서부터 이 불상사가 발생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아마 초반에 한두명이 크륵크륵 말 못하는 짐승으로 탈바꿈했을테고 본인들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개, 애완 고슴도치의 공격을 받아 더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좀비로 변했다. 어느 정도 좀비라는 상황이 파악이 됐을 때는 아무래도 익히 아는 면면들의 머리를 깨부수는 일은 정말 독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상당히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또 연달아 피해가 속출했다. 헐리우드에서 만들어낸 영화들을 참고하자면 근래의 좀비들은 단순히 감염을 시키는 걸 떠나 뛰어다니고, 말을 하고, 기계까지 작동시키지만 현실의 좀비들은 그러지는 않았고 잘 발달된 치아로 여기저기 물고다녔다. ...나 혼자 읽는 글이니까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지만 아마 지구의 반 이상이 좀비로 변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쉘터에 들어가는 건 조금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매트리스에 돈을 구겨넣은들 애초에 침대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버리는 갑부들에는 비할 바가 아니니까.
좀비바이러스에 면역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나를 오 년간 보조해왔던 비서의 치아 덕택이다. 비서가 회사 내에서 물려온 건지 아니면 잠시 외출한 사이에 밖에서 균을 옮겨온 건지는 나야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손님 안내를 하던 중에 비서는 변화했고 내게 평상시에 유감이 많았었는지 제 뒤에 있던 손님보다 앞에 앉은 나를 먼저 무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코를 물렸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다. 뒤에 있던 손님이 비서의 머리를 어떻게 깨부쉈는지, 쉘터에 들어가기위해 내가 내 코를 어떻게 깨부쉈는지 같은 이야기들은. 나는 아직도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 처음에, 내가 내 코를 처참하게 깨부쉈을 때 모 V씨 같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모습에 화가 많이 났지만 지금은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세에 민감한 후각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맡아봤자 향긋한 냄새는 전무하고 썩은 내만 날 뿐이니까. 아무튼 나는 좀비로 변하지 않는다. 엄브렐라 사가 있었다면 아마 좋다고 쫓아왔을 것이다.
4. (행운) 나는 쉘터에서도 살아남았다.
모두가 피스를 외치면 좋았겠지만 그랬으면 현대의 판사, 검사, 변호사가 모두 실직률 상승에 한 몫 보탰을 게 틀림없다. 밀폐된 공간에 있다보면 사람들 사이에 알력다툼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특히 '잘나간다' 싶은 사람들이 모여있다보니 눈치싸움과 기싸움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올림픽의 역사 못지 않게 오래된 것이 '일단 나부터 살고보자.' 정신이 아니겠는가? 내가 내 코를 멋진 스윙과 비싼 골프채로 날려버렸듯이 어떤 방식을 썼던지간에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쉘터에 들어온 사람이 존재했다. 물론 그 사람은 '우워'를 내뱉기가 무섭게 서로를 감시하던 사람들에 의해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사실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으면 이 해프닝은 '우리의 주적은 좀비'라는 기치 아래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겠지만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보니 개중에는 비관론자도 섞여있었고, 그 비관론자는 인구학자도 아니면서 식량난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몇몇 사람의 음식에 먹지 못할 것들을, 그러니까 '우워'의 잔해를, 집어넣었다. 모략은 효과적이었다. 식량을 축 낼 몇몇 사람들은 비관론자에게 항의를 하는 대신 주위의 사람들을 물어뜯었고 물어뜯긴 사람들은 화가 나서 또 다른 사람들을 물어뜯었고 그와중에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비관론자는, 몇몇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 처리한다는 계획을 급하게 접고, 5번 식량창고로 숨어들었다. 그때 나는 5번 식량창고의 창고지기였다. 코가 주저앉아 인상이 험악하게 보인다는 것이 나를 창고지기로 선출한 이유였다. 물론 혼자서 맡은 일은 아니었고 세 명의 인원이 한 조를 이뤘는데 급박한 순간에 비관론자가 한 사람의 머리를 깨고 두번째 사람의 머리를 깨고 세 번째인 내 머리를 깨려는 순간 뒤에서 좀비가 달려들었다. 엉겁결에 도망치는 비관론자에게 걸려 나는 5번 창고로 숨어들었다. 고함을 지르며 비관론자가 몇몇의 장치를 작동시켰고 5번 창고는 그대로 폐쇄상태가 되었다. 한동안 창고 밖에서 쿵쿵거리는 진동과 더불어 미약한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5. (행운) 나는 살해 위협으로부터도 살아남았다.
비관론자와 나는 창고 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같이 살았다. 창고마다 식량이 나눠지기는 했어도 몇십명이 먹을 분량을 우리 둘이 먹었으니까 어찌보면 식량난에 한해서는 비관론자의 계획이 성공한 셈이다. 비관론자의 직업은 엔지니어였다. 이 쉘터를 관리하라고 일종의 관리자로서 들여보낸 셈인 건데 사람들이 이 비관론자의 실력만 보고 정신상태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은 모양이다. 평소에 기계부품에 둘러싸여 살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원래 그런 건지 비관론자는 경미한 우울증과 더불어 인간불신에 빠져있었다. 초반에, 그러니까 막 창고에 단 둘이 갇혔을 때 나는 이 비관론자의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내가 비관론자의 뒷통수에 일말의 관심도 없고 그가 자고있다고 해서 목을 조르거나 눈구멍을 후벼파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안심을 시킨 뒤에 우리는 그럭저럭 창고 안의 사이좋은 룸메이트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사업가로서 사람을 사귀는 것이 내 일의 기반이었고, 비관론자가 움켜쥔 몽키스패너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비관론자는 넓고 적막한 창고 안에서 그의 한탄과 푸념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밍숭맹숭하기는 해도 썩 나쁘지 않은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솔직히 먹고 싸는 일 외에는 딱히 할일도 없었고 여러 놀잇거리를 생각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심심할 때마다 서로 아는 이야기들을 털어놓고는 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초반에는 먹고 난 음식껍질들을 늘어놓아 대강의 날 수라도 세어봤지만 비닐의 잔해들이 산을 이뤄 더 이상 유지가 되지 않고 무너지던 때에는 그 의미 없는 짓도 그만두었고 그쯤해서는, 애초에 나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하고 있었지만, 창고 한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의 냄새에도 더이상 구역질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비관론자의 우울증을 내가 너무 쉽게 여겼던 모양이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은 못해도 아무튼 잠든 저녁에 나는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비관론자가 있는 힘껏 내 목을 쥐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밑에 깔린 위치에서는 힘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고 누구나 알고있듯이 원래 미친놈은 힘이 세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으면서 사망했다. 비관론자가 보기에는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다시 정신줄을 잡았을 때는 비관론자가 창고의 파이프에 목을 매고 죽어있었다. 날 세는데 실패한 음식봉지가 줄줄이 이어져 이번에는 자신의 두번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가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가 없다. 혼자 죽는 게 싫었을 수도 있고 우울증이 심화되다보니까 눈에 띄는 생물체를 모조리 치워버리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관론자가 항상 들고다니던 몽키스패너로 내 머리를 두드려 까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으면 죽지는 않아도 비관론자의 친구였던 우울증을 내가 고스란히 이어받았을런지도 모른다.
비관론자의 시신을 한쪽에 수습해놓은 뒤에 나는 내가 견딜 수 있는 최대의 한도까지 그 창고 안에서 시간을 죽였다. 단언컨대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창고에 쌓여있던 음식의 1/10 가량을 그 안에서 먹어치웠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더는 견딜 수 없는 한계가 찾아왔고 나는 창고 밖으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나가는 방법은 잘 알고있었다. 비관론자가 하루종일 읊던 투덜거림속에 20% 정도는 언제나 쉘터에 대한 욕이 섞여있었으니까.
6. (행운) 바야흐로 나는 살아남았다.
이기주의와 살인, 핵과 전염병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평범한 인간이 살아남을 확률이 몇이나 될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쉘터 내에서 끝의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것도 꽤나 양호하게. 여러가지 물자를 비축해서. 창고를 빠져나갔을 때 느낀 첫소감은 '이게 지옥이구나.'였다. 머리가 깨진 좀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자살이라도 한 건지 살점이 떨어져나간 시체와 그을린 벽, 변색된 피까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좀비가 드글드글할 거라 생각했던 내 추측과 달리 살아남은 생명체는 몇 되지 않았다. 폭탄이라도 터졌는지 가장 큰 공동은 반 폐허가 되어있었다. 나는 방호복을 챙겨입었다. 좀비들의 난리에 미처 방사능 걱정까지는 못했는지 여러벌의 방호복은 고스란히 보존이 되어있었다. 6번까지 존재하는 식량창고 역시 그대로 폐쇄된 상태였다. 위험경보를 내려 한 개의 식량창고를 봉쇄하면 자동으로 다른 창고까지 폐쇄가 되는 시스템이라는데 빠른 조치는 취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창고 밖에서 아사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현명하지는 못한 연계였다. 3번 창고 안에서는 용케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발견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두 끔찍한 상태로 죽어있었다. 한 남자의 머리맡에 탄창이 빈 권총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1번 창고 안에서는 비실대고 있는 좀비를 발견해 몽키스패너로 두드려팼다.
먹이사슬의 위치 상 사람이 없으면 좀비도 존재할 수가 없는 건지 소수의 좀비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빼면 위협인자는 몇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창고 안에서 보낸 모양이었다. 시신과 좀비들을 정리해 반파된 공동으로 밀어넣고 식량과 물자들을 정리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서 그런지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가 조금 걱정되었다.
정리.
물론 지금 상황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지도 않다고 본다. 적어도 살아남았으니까. 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은 사실이다. 쉘터는 일정 부분 허물어져있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좀비가 있고... 음, 대가리만 남은 좀비에게 목이 물렸을 때는 죽지는 않아도 정말 눈 앞에서 별이 튀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무 되새기지는 않으려고 한다. 피가 쉽사리 멎지 않았을 때는 당혹스러웠지만 여하튼.
쉘터 안의 상황은 어느정도 일단락되었으니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쉘터 밖으로 한 번 나가보려고 한다. 방호복도 있고 몇몇의 무기도 있고 어차피 쉘터도 백프로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조금씩 이동해서 인식범위를 서서히 넓혀봐야겠다. 정확히 핵이 터진 이후로 몇 일이 흘렀는지가 관건인데... 대강의 짐작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수치가 내려갔으리라고 본다. 외부의 좀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폭발이 있었으니 예전처럼 개떼마냥 몰려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운이 좋다. 상당히 억세게 좋은 편이다.
추가 7. (럭키세븐이라고 하지만 불운) 나는 운이 좋다. 그게 바로 나의 불운이다.
이 리스트를 언제 작성했는지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이때만해도 나는 꽤 희망에 젖어있었던 듯 하다. 말도 안 되는 쉰소리를 잔뜩 늘어놓고 있으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시간들이. 이제 내 삶을 꾸려나가는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쉘터가 녹슬어가고 창고 가득 쌓여있던 음식이 바닥을 보이는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방호복은 벗어 던져버린지 오래이다. 계속 뒤집어 쓰고 있기에는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할 뿐더러 방사능이 내 몸에 영향을 미친 데도 별 상관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향이 없는 것 같다. 예전에 추측한 것처럼 내가 죽지 않는 이유가 방사능 때문인지.
사람을 만난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막 쉘터에서 나왔을 때는 그래도 폐허 간간히 사람을 만나기도 했는데 환경이 이렇다보니 모두 얼마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 사람들이 부럽다. 이제는 심지어 좀비조차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간 감행한 자살시도만 해도 열손가락을 훌쩍 넘는다. 몸을 추스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서 이 정도이지 아니었으면 골백번은 더 내 팔목을 그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정말 죽고싶다.
이제 내 희망은 단 한가지이다. 소행성이 충돌하든지 태양이 폭발하든지 간에 이 지구가 흔적 없이 소멸해버리는 것. 그래야 이 땅 위의 나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을 테니까. 이 와중에도 내가 두려운 것은 혹여나 내가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와도 의식만 남아 지금처럼 영생을 유지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아니면 지독하게 운이 좋은 나머지, 지구에 부딪힐 소행성도 궤도를 틀어버리고 애저녁에 폭발을 해야할 태양도 고스란히 남아 이 생활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을까하는 그런 두려움. 이 지구가 언제까지 수명을 이어갈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자연이 복구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연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가? ...천 년? 만 년? 예전에 어느 책에서 가장 오래 역사를 유지한 생물체는 바퀴벌레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런 헛된 타이틀을 내 이름 앞에 걸고 싶지는 않다.
나는 운이 좋다. 쓴물이 올라올 정도로 너무나 좋다. 왜 나는 이리도 운이 좋은 것인가? 공허한 지구 위에서 나는 오늘도 끔찍한 내 운을 시험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