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가 장군 시절부터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칼입니다.
대략 이 칼에 대한 야사가 전해집니다.
고려 말 ~
조선 초기의
도검.
한국 도검의 특징적인 양식을 지녀 역사성과 학술성, 예술성을 인정받는다. 길이는 무려 147cm에 달하고 칼날인 도신은 92.0cm, 자루길이는 55cm이다. 칼집 길이도 103cm에 이르는 거대한 장검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잡이는 상어 가죽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했는데, 채색한 뒤 붉은색 매듭끈을 드리워 장식했다. 크기를 볼 때 실전용이 아닌 지휘도로 추정되는 도검이다. 끝부분이 일반적인 도검류와는 특이하게 생겨
역날검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역날검은 아니다. 끝부분이 양날이라
의사도 형태를 취했다.
전어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대사가 함흥을 지날 때 한 묏자리를 보고 왕이 날 자리라 하였다. 마침
이성계의 종이 그 말을 듣고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에게 고했다. 이자춘은 나옹대사를 찾아가 이를 재차 물었으며, 나옹대사는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동자승 무학이 이자춘에게 슬며시 알려주어 즉시 그 묘자리로 조상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파자 칼 한 자루가 나왔다. 찬란한 금빛에 용머리로 되어있는 칼자루 끝은 예사롭지 않았고 이자춘은 임금이 될 자의 칼이라며 크게 기뻐하고 아들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죽일 때 용의 후손이라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 검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꽃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어도와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현재 전해지는 유물은 실제로 이성계가 사용한 진품이 아니라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레플리카라고 한다.
라고 위키 미러에 써있군요..
역날검이라는 개념보다는 쿠크리처럼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되도록 만든 물건으로 갑옷으로 무장한 적에게 치명상을 주기 위한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