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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국에 눌려 살아서 그랬던지는 몰라도 많은 역사서에서 대종을 무능한 황제로 묘사하지만 꼭 찌질한 모습만 보여준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대종은 먼저 이보국에게 "너 일 너무 많이 했다. 피곤할테니 좀 쉬어라" 라고 말한 뒤 원수행군사마와 병부상서의 직위를 빼앗아 환관 정원진에게 줘버립니다. 장안 백성들은 너나 할것없이 기뻐하였고, 이러한 모양새에 당황한 이보국은 중서령 작위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종은 계속해서 이보국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습니다. 나중에는 재상지위에서도 박탈시키자 화가 난 이보국이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고하였고, 대종은 이를 윤허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응 원년(762) 10월 18일 저녁, 장안을 떠나겠다 고한 그날, 이보국은 피살당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원진이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원진이 별로 능력있는 위인은 아니었던듯 합니다. 763년 7월 토번과 당항이 농우 일대를 침입하여 약탈하자 지방관들은 중앙에 위급한 상황을 전달하였으나 정원진은 사실을 숨기고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토번이 깁숙히 침범해서야 심각성을 알게 된 대종은 곽자의에게 수도방어를 맡겼고, 상황은 얼추 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정원진은 파면당했습니다.
780년 대종의 장자 덕종 이적李適이 당 제국 제 10대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덕종은 아버지보다 더더욱 못난 인간이지만 초기만 해도 나름 성군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업적중 하나가 양세법兩稅法 실시였는데, 양세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세금을 자신의 재산규모에 따라 달리 납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던 당 제국을 치료하는데 걸맞는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당 제국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했습니다. 건중 2년, 하북성 지역의 절도사 전열田悅이 절도사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李惟岳과 절도사 이정기의 아들 이납李納, 산남동도절도사 양숭의梁崇義와 연합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 반란은 금방 진압되었으나 곧 더 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반란군 토벌에 참여한 절도사들이 지들끼리 작당해서 반란을 일으킨 겁니다. 덕종은 이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절도사 요령언姚令言을 보내었는데 요령언은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맙니다(...) 덕종은 눈물을 뿌리며 봉천, 지금의 섬서성 지역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절도사 이회광李懷光에게 토벌을 명하였으나 이회광은 관중에 도착하자 반란군에 합류합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대당제국의 절도사들) 다행히도 이성李晟이 신책군神策軍을 지휘하여 장안을 회복하는데 성공합니다.
아무튼 덕종은 피신 동안 식량이 떨어져 굶었던 것이 한이 맺혔던지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여 황실 창고를 채우는데 급급하였습니다. 지방관들은 황제의 눈에 들고자 더욱 열심히 수탈하였고, 결국 백성들의 불만은 가중되었습니다.
정원 21년(805) 정월 태자가 갑작스럽게 중풍에 걸리자 덕종은 상심하여 병에 걸렸고, 그해 2월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당 제국은 더더욱 극심한 모순과 혼란속으로 빠져듭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당헌종이라는 히든카드가 남아있었으니...
(당 현종이 아닌 당 헌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