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학위가 없으신 분. 제대로 된 근대교육을 배우지 못 하셨던 분. 대학의 간판도 연줄도 없었으나, 실력(개인의 노력)으로 교수까지 되셨던 분. 지식인으로서 사회 참여를 활발히 하셨던 분(4.19 운동 시절, 4.25 교수시위를 주도하셨고, 이승만 대통령 하야 촉구 문구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문구를 직접 쓰셨던 분...). 마지막 순간까지 사리사욕을 채우시지 않으셨던 분(개인의 재산으로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셨습니다.). 올곧은 삶을 몸소 실천하셨던 학자이자 선비셨던 분. ;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
(학교에선 배우지 못하는, 그렇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런 분조차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훌륭한 삶을 살으셨던 분이기에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아마 임창순 선생 저서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을 겁니다.
돌아가신지 1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시중에 팔릴 정도라면 학문적 성과는 익히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서울대가 역사학계에서 '사실상' 원톱인 거야 일단은 기정사실이고, 그래도 그에 맞서 호각세를 이루는 게 고려대인 것까지는 아실 겁니다.
사실 서울대와 고려대에는 너무나 레전드급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기에 일일히 거론하면 입 아플 정도지요.
그에 비해 연세대·성균관대·서강대 등은 레전드급 선생님들에 대해 일단 이야기를 할 정도는 됩니다.
물론 그 대학들이 교수 배출 순위에서 보자면 3·4·5위를 하는 포스를 뿜어내지만, 어디까지나 서울대나 고려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연세대에는 정인보 선생이 해방 전후부터 기틀을 잡으신 뒤 김용섭 선생이란 걸출한 연구자가 오셔 '연대사학'을 일으키셨고, 서강대에는 이기백 선생과 전해종 선생 등이 이른바 '서강사학'이라 불리는 학풍을 수립하셨지요.
그렇다면 성균관대는? 네, 바로 임창순 선생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이우성 선생이 함께하시며 '성대사학'을 확립하게 됩니다.
그럼 이하에서는 임창순 선생의 인생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임창순 선생은 1914년 충북 옥천에서 부친 임원재와 어머니 김영례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애초 학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선생은 일제강점기였으나 전통 한학을 수학하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4세 때 조부 임경호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14세 때인 1927년에는 보은의 서당 관선정(觀善亭)에 들어가 겸산 홍치유 선생에게 6년간 한학을 배웁니다.
그렇게 20살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선비 가문의 그를 편안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지는 가세 속에 선생은 대구에서 막노동일을 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되었을 것 같아요.
붓을 잡던 손이 벽돌을 다르고 공구질을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선생의 노동일은 해방 전까지 지속됩니다. 하지만 한학에의 관심은 지속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후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내놓을 수 없었겠지요.
32세 되던 해, 마침내 조국이 해방되자 선생은 중등교원 자격시험에 응시하고, 국사·국어 두 과목의 교사자격증을 취득합니다.
이것도 좀 재미있는데, 일제강점기에도 교사자격증을 딸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 어쩌면 그냥 일제 치하라고 응시를 안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억측하는 건 이 분 삶 자체가 워낙 고매하고 굽히지 않는 선비의 그것이라 그럽니다.
여하튼 교사가 된 선생은 경북중학교·경북고녀(경북여중)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대구사범학교 동양의약대학 교수를 역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4년에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됩니다. 속칭 '학벌'과 '간판' 없이 오로지 엄청나게 뛰어난 한학 실력만으로 교수가 된 것입니다.
이후 선생은 한문학과와 사학과·국문학과를 오가며 많은 제자들을 키워내게 되는데, 그 중 한 분이 바로 '성대사학'의 뒤를 잇게 되는 이우성 선생입니다.
이우성 선생 또한 한학에 정통하였고 20살이 다 되도록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었는데, 임창순 선생의 권유로 근대학문을 접하게 된 것이지요.
여하튼 이렇게 학자로서의 삶을 살던 선생에게는 큰 변곡점이 찾아옵니다.
바로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움직임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지요.
이에 임창순 선생은 '4.25 교수데모'를 주도적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때 성명서에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문구를 넣을 것을 주장하고, 또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 글씨를 직접 씁니다.
우리가 아는 잘 아는 그 문구가 이 분 작품인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게 선생이 주도적으로 움직인 4.19혁명은 결국 성공하였고, 선생은 이후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에 통일방안 심의위원으로 참가해 활동합니다.
하지만 선생의 영광스런 나날은 곧 냉혹한 겨울을 맞게 됩니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군부는 선생이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에서 활동한 것을 문제삼았고, 결국 성균관대에서 해직됩니다.
7년 정도의 교수 생활이 끝난 것이죠.
이후 1964년에는 인민혁명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한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일반 사람 같으면 아예 좌절하여 폐인이 되거나, 아니면 적당히 시류에 부합했을 것 같은데 한학을 해서인지, 아니면 본디 선비 기질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선생은 오히려 더 자유롭게 학문 활동에 매진해나갑니다.
자리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보다 높이 날아오르게 된 것이지요.
1963년에는 종로구 수표동에 한문교육기관인 '태동고전연구소'를 창설하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문강좌를 개설합니다.
이어 1976년부터는 매년 10명씩을 선발하여 3~5년간 매월 장학금을 주고 한문교육을 진행합니다.
태동고전연구소는 오늘날에도 엄존하고 있는 3대 한학 수학기관 중 하나지요. 그 시작이 바로 임창순 선생에 의해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 같지만, 국가가 선뜻 나서지 않던 시절 사재를 써가며 이런 일을 했다는 게 정말 대단하더군요.
또 1979년에는 남양주에 '지곡서당'을 열고 근대 학문은 배웠으나 한학에는 서투른 많은 인문학도들에게 가르침을 주게 됩니다.
이 와중에도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은 지속했다고 합니다.
이어 1985년에는 태동고전연구소 부지(약 4천 평)와 서적 2만 여 권을 한림대에 전부 기증하고, 연구소의 운영을 학교 측에 맡깁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는 바로 이렇게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1999년 4월 86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연구 인재를 배출해냅니다.
성균관대에서 그러하였듯이, 사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그러하였듯이, 이번에는 한림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해냈고, 어떠한 끈끈한 파벌이라든가 학맥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학술 활동에 대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71년 문화부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97년 사임하기까지 두 차례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선생은 역사학 뿐 아니라, 서지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한국서지학회를 재창립하여 두 번에 걸쳐 회장을 역임하였고, 계간 《서지학보》를 발행합니다. 서지학 분야에서 최고로 꼽는 학술지가 이때 탄생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예 또한 명필인지라 세 차례 서예전시회를 가졌으며, 1990년 제2회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한국의 서예》 등 서예 및 서예사에 관한 여러 편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금석학 방면에서도 탁월하여 《한국금석집성》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을 남겼으며, 무령왕 부부의 묘지명이 발견되었을 때도 일차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한편으로는 《당시정해》와 《한문강좌》를 저술하는 등 한문학 쪽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남겼으며, 민족문화추진회 고전번역사업에 참가하여 《동문선》 등을 공역하였고, 《국역 성호질서》 등을 감수하였습니다.
역사학 쪽에서는 〈무술오작비소고〉등 주로 금석문의 판독 및 그를 통해 본 역사적 실상의 구성에 대한 분야에서 수작을 남기셨습니다.
키워낸 후학들에 대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후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 등을 통해 배출한 학자는 '현역 교수만 해도' 40여 명을 헤아립니다.
성대경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만길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김정배 고려대 전 총장, 조동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박용운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유초하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등이 대표적으로 선생에게 사사받은 분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학술적 위업 외에 자신의 능력을 사회 곳곳에 환원하는, 요새로 보자면 재능기부자로서의 측면도 매우 두드러진 삶이었습니다.
그렇기에 199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학사학위도 없는, 더욱이 근대 중등교육조차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선생이 온전히 자신의 성취로 인해 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마지막인데요.
임창순 선생은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98년 그나마 남아있던 부동산과 소장 유물 등 사재를 모두 털어서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통일운동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합니다.
지조 있는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꼿꼿하고 흐트러짐 없이 사시다 마지막 가는 그 순간까지 사리를 채우시지 않은 것이지요.
이분은 보면 볼수록 참 대단한 분이고 존경스럽더군요.
결백하고 굳건한 삶의 자세도 자세거니와, 사실 개인적으로 더욱 감동받은 건 그 '세상살이의 자유로움'입니다.
어떤 한 곳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어느 곳에서든 배움을 펼치고 뜻을 이어가는 그런 분이 아닌가 합니다.
어찌 보면 '자유인'이어야 할 인문학도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아이러니컬한 것은 근대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하지 못한 선생은 전통 한학을 넘어 근대 역사학에 큰 기여를 하였고, 근대 학문에서 말하는 이른바 인문학도로서의 리버럴한 모습을 보여준 데 비해, 정작 '자유로움'의 가치에 대해 귀가 닳도록 들은 우리는 이러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booheong/82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