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이념의 차별로 사실이 조작되다. 19세기 말 1894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독일과의 패전에서 프랑스는 혼란상황, 유럽에서 막강했던 프랑스 육군의 패전은 프랑스에겐 충격자체였다. 대금업으로 자본 축적하여 금융귀족이 된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인감정이 확산될 때, 프랑스 정보국이 독일대사관에서 문건 하나 훔친다.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인 '명세서'를 익명의 발신자가 독일 무관에게 전달할 것. 군정보국 참모본부에서 필적조사하다 유대인 수습참모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지목, 체포하게 이른다(반유대정서가 영향끼침). 단정할 만한 근거가 없음에 난관지경일 때, 반유대신문사 la livre palore가 드레퓌스 체포사실 폭로함과 동시에 참모본부가 매국노 비호하는 것처럼 호도한다. 드레퓌스는 억울하다고 자신이 아니라 하지만, 결국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2년 후 '피카르'라는 장교에 의해 진범이 '에스테라지'임을 확인하게 됨과 동시에 드레퓌스가 무죄임을 주장하며 상부에 재심요구했으나, 묵살당한다. 피카르는 대중에게 발설하고 최종 군기밀 누설죄로 기소된다. 진보신문 '티가로지'에서 에스테라지를 진범을 지목하는 기사를 싣는다. 군이 망하면 국가가 멸하는 줄 알던 프랑스 군부, 기득권의 인식은 군부의 오류를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보수언론은 군부편을 들어 시대배경을 악용하여 국민향해 음모, 조작을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는 당시의 보수층 왕당파, 국수주의, 카톨릭, 보수언론이라는 반재심파와 진보적 성향을 지닌 진리, 정의, 인권을 요구하는 지식인, 소수언론, 국민일부가 재심을 요구하며 재심파로 나뉘어 극심한 국론분열에 치닫는다. 1898년 문인 '에밀졸라' 가 진보신문 로로르지에 '나는 고발한다' 라는 드레퓌스의 재심요구를 대통령에게 전한다며 발표하게 된다. 반유대감정이 극심해지고 군국주의에 충격받은 에밀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세계 각국의 지식층들이 가세하여 드레퓌스의 재심요구 확산해지자, 진실이 서서히 드러남으로 인해 모함자 정보국 앙리중령이 자살하게 되고 이 사건의 분수령이 된다. 군참모본부의 오류가 아닌 군사재판의 오류로 무죄판결이라는 트릭 1899년 고법에서 재심성사되나 유죄라는 근거하에 10년 금고형이라는 판결한다. 1903년 대통령의 특별사면이 있었으나, 역시 무죄인정은 못 받았다. 1904년 최고재판소에 재심청구한 드레퓌스는 12년만인 1906년, 피카르와 함께 무죄판결을 받으며 복권된다. 군정보국은 피해갔다. 1995년 시라크대통령은 군기밀문서를 백년만에 세상에 공개하며 동시에 군정보부의 음모를 죄를 백년만에 인정했다. 그러나, 진범인 에스테라지, 음모조작에 나선 보수언론, 군관계된 자들에 대한 유죄, 처벌은 없었다. 진정한 법치주의라면 이 처벌을 피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주는 의의는 일개인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는 강력한 법치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유대인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첫째, 진실과 허위문제가 권력구조속에서 격전. 둘째, 재판의 공정성, 형평성문제. 셋째, 안보와 인권문제. 넷째, 최고권력은 언론임이 백년전에도 존재. 다섯째, 국론분열. 여섯째, 지식인의 역할을 볼 수 있다. 드레퓌스 사건의 대표적 성질은 바로 언론에 의한 여론조작이다. 이것이 정치적 이념과 결탁되어 개인의 인권은 정치적 사살대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억지로 거짓을 진실로 정의로 호도하며 세뇌키시는 언론의 여론조작은 한마디로 사실, 진실을 거짓으로 꾸며 '정의'를 조작한 것인 것이다. 그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보수언론 '르 프티주르날' 이 있다면 현재 한국의 대표적 수구언론으로 왜곡 날조에 앞장서는 '조선일보'가있다.
▲그 당시 '르 프티주르날' 과 대비되는 현제 조선일보 ⓒ 구글 켑쳐
프랑스에 군 참모본부가 있었다면 한국엔 청와대, 민정수석실, 국정원, 법무부가 있다. 법무부 발표엔 분명 오류가 있다. 이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것엔 이성적 판단의 결여가 보인다. 현재 대한민국의 부정불법당선이 워터게이트에 비유된다면 최근의 채동욱 전 총장은 드레퓌스 사건에 비유된다. 비단 채동욱 전 총장뿐만 아닌 반대세력이면 누구나 드레퓌스 사건의 인용대상이라는 것이 한국실정이다. 과거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도 유사사건들은 많았다. 아직도 진행된다는 것이 이 한국 역사의 과제다. 드레퓌스사건과 바늘과 실처럼 연결되는 문인 에밀졸라. '펜은 칼보다 강하다'와 형식적인 지식인에 멈추지 않고 적극적이며 구체적으로 사회참여에 동참해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 지식인의 활동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진보신문이 있어도 소수인 이상 역부족인 공간을 에밀졸라를 대표로 문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중심에 서 있음으로 인해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지킨 것이다. 대표적 진보신문 '로로르'의 창간자인 클레망소는 " 프랑스를 치명적 위기에서 구한 것은 사상의 자유및 표현의 자유였다 " 말했다 보수언론의 극심한 여론조작과 기득권의 극심한 패악질에도 진보가 멈추지 않았기에 진실은 드러날 수 있었다. 정의는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