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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이라곤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는 불쌍한 케빈밖에 모르던 나에게 <케빈에 대하여>라는 영화는 역시 케빈이란 놈들은 폭력적이고 정신이 이상한 놈들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스페인 토마토축제에서 시작된다. 화면 가득히 물결치는 빨간 화면,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한 여자가 축제를 즐기고 있다. 그녀는 에바,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영화는 에바의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과거의 에바는 토마토 축제에서 남편을 만나고 케빈을 임신한다. 임신한 에바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에바는 자유로운 인생을 즐겨왔고 임신은 그녀의 자유에 족쇄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에바는 엄마로서 몇 번이나 케빈에게 사랑한다고 하고 관심을 표명한다. 또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속마음까지 그랬을까?
에바와 케빈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해본 적이 없다. 케빈이 아기일 때부터 그 둘의 관계는 삐걱 거린다. 아기는 울기만 하고 아기 돌보기에 엄마는 피곤하다. 조금 자라 말귀를 알아 듣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아이에게 빨간 공을 던져 준다. 엄마 입장에선 최초의 대화시도였다. 하지만 철저히 무시당하고 아이는 알아듣지 못할 중얼거림만 지껄인다. 그 뒤로 케빈과 에바는 한 화면에서 제대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거나 비꼬거나 화내거나 언제나 대화는 다른 곳을 흐른다. 하지만 그들도 중간에 한 번 제대로 대화한 적이 있다. 아이가 기저귀에 똥을 쌌을 때였다.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주었지만 아이는 그대로 기저귀에 다시 똥을 싼다. 엄마는 화가 나서 아이를 집어 던지고 아이 팔에 상처를 입히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케빈의 반항과 엄마의 폭력이 둘이 나눈 가장 진솔한 대화였다. 나중에 케빈은 그 흉터를 보며 엄마가 자기에게 한 짓 중에 가장 솔직했다고 말한다. 엄마의 진심(케빈을 싫어한다는)이 그대로 전달된 것이다. 의사소통은 말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대화 중에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부분은 반도 안 된다고 한다. 말투, 시선, 몸짓 등등 언어 이외의 것이 의사소통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말로는 케빈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에바의 진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에바는 자유로운 여자였다. 에바의 마음속에는 항상 열정이 가득했다. 영화에서 에바의 열정은 빨간색으로 드러난다. 과거의 에바는 토마토 축제에 참여하고, 아이에게 처음 보냈던 빨간 공은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다.(케빈은 에바가 보낸 공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이미 둘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에바가 즐겨 입는 옷도 모두 빨간색이다. 하지만 현재의 에바는 자신의 색을 잃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동차에 칠해진 빨간 페인트를 지우고, 집의 벽과 바닥의 빨간 페인트를 지운다. 그녀가 입는 옷도 검은 색 계통의 옷으로 전부 바뀌었다. 케빈의 사건 이후 에바는 열정을 잃었다.
자유로웠던 여자에서 한 가정을 책임지는 엄마가 된 이후 에바는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했다. 그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오는 장면이 바로 방을 꾸미는 장면이다. 에바는 자신의 방을 세계지도로 꾸며 놓는다. 그녀는 항상 자유를 꿈꾸고 있으며 여행을 즐긴다.에바는 케빈에게 누구나 자기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방은 개인적인 공간이며 누구에게도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그녀의 영역이다. 그래서 지도로 꾸며진 그녀의 방은 그녀 자신의 삶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방은 케빈에 의해 엉망으로 변하고 만다.(여기서도 에바는 케빈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장난감 물총을 짓밟았을 뿐이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일어나려면 그 주체에게 직접 말을 했어야했다.) 케빈이라는 존재는 에바가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선택할 수 없다.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연을 끊을 수도 없다. 케빈과 에바는 서로 맞지 않았다.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그 둘은 맞지 않았고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서툴렀다. 진심을 전달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진심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진심은 전해진다. 그 진심이 사랑인가 증오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엄마는 아들을 싫어한다. 자신의 인생의 족쇄이고 자신의 꿈을 방해하는 존재이다. 좋아질 수가 없다. 이것은 진심이다. 그러나 엄마의 역할은 이 진심을 전달할 수 없게 만든다. 속마음은 사랑하고 있지 않은데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식이라 보살피고 신경쓰는 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진심은 전해진다.’ 아들은 엄마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들도 엄마가 싫다. 자신을 싫어하는 존재를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아들은 엄마에게 반항을 한다. 엄마와의 의사소통을 거부하고 반항의 눈초리와 행동을 보인다. 역시 아들의 ‘진심은 전해졌다.’ 엄마는 아들이 더욱 싫어진다. 이렇게 악순환을 반복하고 결국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진심은 전해진다. 그러나 어떻게 전해지느냐가 중요하다. 말로하는 것도 좋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좋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며 상대를 속여서도 안 된다. 진심은 전해지며 겉과 속이 다를 때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에바와 케빈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그런 거짓들이 쌓여 결국 사건이 터지게 된다.
마지막에 케빈을 면회 온 에바가 묻는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고 케빈은 대답한다. ‘그 때는 알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리고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들을 안아준다.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다. 케빈조차도 자기가 왜 그러했는지 알지 못한다. 에바의 끄덕거림은 이해가 아니라 인정이었다. 케빈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 자기가 케빈의 엄마라는 것.
드디어 서로의 진심이 서로에게 제대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