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영원회귀 아이디어에 따르면, 우리의 인생은 일회성으로 반복된다. 영원회귀는 무한한 순환인데, 이 순환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즉 지금 2016년 3월 6일 11시 30분에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무시무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살인한 바로 그 순간이, 그리고 살해당한 사람에게도 살해당한 그 순간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르트의 구토에서 로캉댕은 인생에 어떠한 필연적인 인과관계도, 미리 정해진 가치나 질서도 없는 ‘무의미’에 충격을 느끼고 구토를 하지만, 니체의 영원회귀는 그보다 더 지독한 극한의 사유실험이다.
극한의 사유실험, 이를 사유실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러한 사유실험이 ‘실제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샤르트르는 한평생 반전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다. 니체도 한평생 그리스 고문학과 고전음악에 심취한 사람이다. 만약 샤르트르가 인생을 그저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고, 니체가 인생을 카세트테이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면 그들이 그렇게 열정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가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그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이다.
사유실험의 가치는 윤리적 명제를 정당화할 때 특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윤리적 명제들이 사유실험에 근거해서 존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 자식을 죽인 사람에게 똑같이 죽음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일 그 사람도 똑같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유가 가능해야 한다. 물론 본능적인 충동 때문에 살인을 할 수도, 혹은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에 살인을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윤리적 판단을 할 때는 이를 특정한 상황에 항구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규칙으로 만들어야 하고, 이때 사유실험의 기능이 요청된다.
하이데거가 ‘죽음의 순간으로 달려가 봄’으로써 삶의 역사성을 획득하는 사유실험을 제시했다면, 니체는 ‘영원한 순환이 계속 된다’는 전제하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사유실험을 제시한다. 끝없는 실패, 끝없는 좌절, 끝없는 상처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삶의 가치를 구축해나갈 것인가? 이는 넓은 의미에서 니체주의자였던 까뮈가 그의 ‘시시포스 신화’ 비유를 통해서 제시한 질문과도 일맥상통한다.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산 정상으로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행위’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까뮈는 이를 끊임없이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거대 공장의 노동자들의 삶과 대비시키면서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파생시켰다.
니체가 제시한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삶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자신이 다음 순간 내리는 선택은 수천 억 배의 무게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해야 하고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수천 억 배의 무게에 짓눌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무한한 반복이기 때문에 이를 효율적으로 ‘망각’하고 더욱 가볍게 경쾌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삶을 끊임없이 즐기고, 누군가는 이를 악물고 노력하기도 하는 것일 테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다만 니체가 전해주는 한 마디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다. “용기는 가장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은 연민의 정 까지도 없애준다. ‘이것이 삶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마저도 죽인다.” 라고 그는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