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캐나다의 중국인 노동자>
<삽화 속의 중국인 노동자. 미국인들, 또는 중국인 스스로도, 중국 노동자들을 고된 노동을 한다는 의미인 coolie, 苦力라고 불렀다.>
<수마트라의 중국인 노동자>
1840년대부터 중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1851년 호주에서 금이 발견되자 호주로, 1858년 캐나다의 태평양 연안에서 금이 발견되자 캐나다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동남아시아로 떠나갔습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그 수가 10만을 헤아릴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나갔으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였습니다. 철도공사장, 목화농장, 사탕수수농장 등 고된 육체노동은 중국인들이 도맏아하다시피 했는데, 게중에는 전염병이나 폐질환에 걸려 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용주들은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에 쇠사슬을 채웠고, 노예처럼 부려먹었습니다. 쿠바에서 약 6000명에 달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사망률이 15.2%, 약 6~7명중 1명 정도의 비율입니다.1873년~1874년 동안 청 정부는 쿠바, 페루의 중국인 노동자들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 위원회를 파견하였습니다. 쿠바에 도착한 위원회는 이러한 보고를 올렸습니다.
노동자들 가운데 8할이 납치나 사기를 당했다고 말했다. 아바나에 도착하자 그들은 노예로 팔아넘겨졌다. 대다수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주의 소유물이 되었다. 조사된 참상은 너무나 심각하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농장에서의 노동은 몹시 가혹하고 음식은 부족했다. 노동시간이 너무 길었고 회초리, 채찍, 쇠사슬, 몽둥이 등에 의한 체벌로 부상이나 고통을 당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노동자들이 구타로 사망하였고, 상처가 덧나서 죽었으며, 더러는 목매달거나, 목을 베거나, 아편을 먹거나, 우물이나 설탕 용광로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페루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약 1만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하루 12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875년 서태후는 이홍장을 수석으로 하는 협상단에 이렇게 강조하였습니다. "당신네들은 이런 중국인 학대가 근절되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어 체결된 협약 덕분에 노예 노동자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고 노예무역은 중단되었습니다.
중국인들이 가장 열망했던 곳은 가능성의 땅이었던 미국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서부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대규모 노동자들이 필요해지게 되었던 터라 중국인 이민자들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시애틀 등의 서부도시로 몰려들었고, 그곳에서 상점 점원이 되거나 야채상, 세탁소 등을 운영하였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각각 1869년, 1885년에 만들어진 미국 대륙 횡단 철도와 캐나다 횡단 철도 건설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미시시피나 앨라배마, 테네시 등의 남부로 간 중국인들은 대부분 농장 일이나 신발공장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정착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중국인들은 문화적인 문제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많은 중국 남자들이 고수하던 변발은 미국인에게 '중국인은 문란하고 사악하다' 라는 인상을 심겨주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문제되었던 것은 언어였습니다. 장시간 노동으로 그들은 현지어를 배울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말이 통하는 중국인들끼리 몰려다녔고, 이러한 모습은 미국인들에게 좋게 보일리 만무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는 "중국인들은 결코 우리와 동화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평화와 복지에 위험한 존재다" 라고 말했었지요. 특히나 외국 식당에 들어가 방구를 북북 끼고는 부끄러움없이 "익스큐즈 미" 를 부르짖는 일부 몰상식하고 비신사적인 행위를 하고 다니는 중국인들이 중국 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쌓이고 쌓여 1871년에 크게 터져버리고 맙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중국인 갱 사이의 싸움을 말리던 미국 경찰관 2명이 살해되자, 분노한 미국인들이 차이나타운으로 몰려가 19명의 중국인들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런 크고작은 사건들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록스프링스 탄광에서는 백인 광부들이 중국인 광부 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삽으로 폭행하고 중국인 이민 노동자 숙소를 태워 28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급기야 1882년에는 중국 노동자들의 미국 시민권 취득이 금지되면서 미국내 중국인들을 더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청 정부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1894년 미국이 불평등조약을 맺음으로서 중국 측의 항의를 묵살했습니다.
더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러한 노동자들이 '속아서' 온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문맹이었기에, 고용주들의 계약서에 써 있는 내용을 아무것도 모른 채 서명하여 노예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은 마리아 루즈 호 사건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페루 선적인 마리아 루즈 호가 카야오로 향하다가 잠시 요코하마 항에 정박했을 때, 중국인 노동자가 도망쳐나와 구해달라고 일본 당국에 호소하였고, 이를 조사한 결과 이 배의 모든 계약노동자들이 문맹으로, 극도로 비인간적인 조건의 계약서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서명하였던 것이 밝혀진 사건입니다. 아무런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고용주의 말만 듣고 희망을 안은 채 타향으로 떠난 중국인들은, 그들이 받았던 대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러한 노예매매는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완전 근절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도 해외에 나갔을 때 비슷한 대우를 받았을 거라 생각하니 씁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