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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김원장 기자의 sns 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됬을까
게시물ID : sisa_11790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핑거포스
추천 : 12
조회수 : 1472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21/09/02 19:35:24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1369382857

 

한국언론은 왜 이렇게 됐을까.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 사회가 만든 제품 중 품질이 가장 떨어진 것은. 단연 언론이다. 

이 불량 제품은 매일 아침 국민들의 가슴을 후벼판다. 

가장 퇴보한 직업군도 말할 필요없이 ‘기자’다. 드라마에서 정치인이나 검사는 늘 사회악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그 부조리를 해결하는 것도 그들이다. 이제 기자는 드라마에서 그냥 ‘우스갯거리’다. 그냥 기레기다.

화가 난 유치원생 같다.


그냥 밉다. 그러니 반대한다. 화가 잔뜩 나서 강한 비판을 해야 하는데, 무슨 대안도 없다. 

지하철 마스크가 의무화된 첫날 모 경제신문의 기사. “밀폐된 공간서 무슨 소용있나, 이태원 클럽보다 더 위험”. 

차라리 지하철을 폐쇄하거나, 지하철에선 마스크를 쓰지 말자고 하자.

C일보의 백신 부작용 기사. ‘태권도 전 챔피언 AZ맞은 후 다리 절단, “붓더니 다리 폭발”’. 

설령 폭탄이 떨어져 다리에서 폭발했어도 그런 표현을 쓰면 안된다. 주장을 세게 하려는데 팩트가 약하니, 부사나 형용사만 세진다. 

정작 팩트는 숨긴다. 그가 몇 해 전 당뇨병 합병증으로 왼쪽 발의 발가락 세 개를 잃었다는 중요한 팩트는 넣지 않는다. 

또는 데스크가 알아서 지웠겠지. 

(만약 KBS 기사에서 이런 중요한 팩트가 빠졌다면 성격 급한 사회부장에게 한소리를 듣고. 다음날 편집회의에서 지적이 나오고, 심의실에서 뭔가 날아온 뒤, 잊을만 하면 시청자위원회에서 다시 지적을 한다)


이런 백신 부작용 기사를 계속 선정적으로 올리면서도, 백신을 맞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그냥 백신이 밉고 방역당국이 밉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백신 접종률이 낮다고 또 비판한다. 

그냥 화가 나있다. 

기자는 사회적 부조리에 화를 내는 직업이다. 그런데 내가 아닌 타인에게 화가 나있다. 

화가 난 유치원생 같다. (일전에 페이스북에 종부세 팩트가 터무니없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더니,

 C일보가 나를 내놓고 비판했는데, 제목이 “남의 돈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였다. 

제도가 아닌 사람을 공격한다. 제도를 공격하는 이유도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만약 우리가 휴대폰을 매장이 권해주는 대로 산다면, 휴대폰의 기술발전이 이뤄질까. 

CGV가 알아서 무작위로 골라준 영화를 봐야한다면 영화산업이 발전할까. 

한국 국민은 선택권이 없이 네이버에서 펼쳐준 대로 기사를 봐야한다.

좋은 언론사 나쁜 언론사, 큰 언론사 영세한 언론사, 믿을 수 있는 기자 엉터리 기자, 구별 없이 ‘평등’하다. 

시민들은 네이버가 정해준 창을 통해 알아서 우리 사회를 해석하면 된다. 

이 환경에서 언론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제목 낚시’뿐이다. 

네이버가 제공하는 그 신용카드만한 크기의 박스안에서 자사 기사가 클릭이 돼야한다. 그래야 네이버에서 광고비를 더 준다. 

그러니 일단 자극적이고 ‘분노를 유발하는’ 제목을 뽑아야한다. 그래야 클릭을 한다. 

그래야 회사가 살아남는다. 어차피 종이신문은 안팔린다. 자극적인 내용으로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야한다.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어야 한다. 진영이 선명해 져야한다. 그래야 우리편이 한명이라도 더 클릭을 한다. 

(그래서 ‘이상한 전문가’의 인용기사가 난무한다. 반대 진영을 분노하게 만드는 기사를 써야하는데 

여당이나 야당 원내대표는 그런 직접적이고 지저분한 표현을 잘 안한다. 

그러니 20여 년 전 국회의원 한 번 한 사람, 또는 평생 정치인들 뒤를 따라다닌 정치 난봉꾼,

 큰 잘못을 해 제도권에서 밀려나 잔뜩 화가 난 사람의 말을 인용한 기사가 정말 많아졌다. 

그들은 ‘속 시원하게’ 누군가를 혐오해준다. 그들의 직업은 ’전문 비난가‘다)

그런데 자극적인 기사로는 이제 경쟁이 안된다. 그러니 이제 ’혐오‘를 해야한다. 


[혐오:역겹고 구역질 날 정도로 미워하다]


적당히 젊잖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역겹고 구역질 날 정도로 기사를 세게 써야한다. 그래야 클릭수가 늘어난다. 

’누가 누가 혐오를 잘하나‘ 경쟁시대다. 깊이 있는 분석기사들은 저 뒤로 밀려난다. 

내가 공부할 때 읽던 신문의 그 좋은 칼럼과 논설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혐오와 편가르기가 판을 친다. 

정치인을 혐오하고, 중국을 혐오하고,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혐오한다.  

하물며 흉악범이라도 혐오가 해법일까. 조현병을 앓던 경비원이 주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럼 경비원을 잔인하게 혐오하는 기사 수백여 개가 올라온다. 그를 혐오함으로써 나도 반대편 도덕적 진영에 합류하고, 

그 진영은 곧 내편이 돼 내 기사의 클릭 수를 올려준다. 

그 가해자를 도덕의 반대편에 보내는 것이 해답일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회적으로 막을 수 없었는지를 살피려면 

그를 우리와 같은 편에 넣어 살펴야한다. 우리 사회가 뭘 놓쳤는지 봐야한다. 그래야 그런 일이 다시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냥 아무거나 쓴다. 남들이 쓰면 나도 쓴다.


한강에 청년이 빠져 죽었다. 이 비극이 언론사에겐 호재(?)다. 

수천 개의 기사를 쏟아냈다. 일단 죽은 청년의 편을 드는 척 하면서, 의심이 가는 청년을 타자화 한다. 

이제 우리는 한편이 돼 그를 공격하면 된다. 끝없는 의혹이 이어진다. 

내가 부풀리긴 부담스러우니, 필부필부의 주장을 그냥 막 기사에 담는다.  

그냥 쓰고, 추측해서 쓰고, 과장해서 쓰고, 그리고 베껴 쓴다.

‘한강대학생 현장에 나타난 할머니, “수사반장 좋아했다”’ 실제 5월 11일,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신문이 쓴 기사 제목이다. 

한강에서 숨진 의대생 사건을 다룬 수 천 건의 기사 중 화룡점정이다. 

설령 시간이 지나 진실이 윤곽이 잡혀도 모른척하면 된다. 오류를 수정하면 의혹의 기반이 무너진다. 

제대로 된 진실이 쏟아져 나와도 상관없다. 문장 하나를 비틀고, 슬그머니 거짓 정보를 보태 또 의혹을 이어나간다.

 클릭수가 늘어난다.  


어떻게 고칠 것인가


네이버도 계속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 

예를들어 각 언론사에 뉴스 편집권을 강화하고, 네이버 상단에 표시되는 기사도 해당 언론사가 선택(PICK)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럼 뭐하나. 네이버에 먼저 노출되는 기사 수는 극히 제한돼 있고, 언론사는 그 몇 개 기사로 그날 클릭 장사를 해야 한다. 

더 자극적이고 더 갈등을 유발하는 기사를 올릴 수밖에 없다. 오늘 C일보가 네이버를 위해 소중하게 고른 ‘PICK’기사는 이거다. 

‘이근 ‘김용호 의혹’ 폭로 예고?…“용호야, 기다려 곧 나온다”’. 

D 디지털 전문 매체는 ‘해변서 혼자 음란행위하다 걸린 30대女 "겨우 20초였다"’를 ‘PICK’기사로 올렸다.

(심지어 KBS보도국도 매일 KBS의 어떤 기사가 디지털에서 얼마나 소비됐는지 분석한다. 

많이 소비된 기사를 순서대로 기자들에게 공지하면서 기자들의 경쟁을 부추긴다. 

자극적인 제목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나 역시 지난달 미얀마 코로나를 보도하면서 제목에 ‘아수라장’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표현은 결국 다음날 편집회의에서 지적을 받았다.) 


르몽드(Le Monde)가 탄소배출권을 다루고, 더 선(The Sun)이 메건 마클의 비키니를 다루듯 언론도 각자의 역할이 있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이런 역할구분도 없다. 

그냥 네이버라는 언론사의 각 부서일 뿐이다. 이 부서들은 독립적인 재무구조를 갖고 각자 도생한다. 

이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형 매체도 죄다 연예인들의 허리 아래 기사를 다루고, 

경제신문은 진영논리 가득한 정치 기사를 올린다. 

우리 언론은 이렇게  정론지와 스포츠신문과의 벽을 허물었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뉴스가 상품처럼 소비자에게 선택돼야 한다.

선진국은 우리처럼 뉴스를 보는 온라인 플랫폼이 독점화돼있지 않다(구글 초기화면에는 어떤 뉴스도 없다). 

대부분의 플랫폼은 기사를 검색해 줄 뿐 기사를 국민들에게 나눠주지 않는다.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지 포털이나 검색엔진의 것이 아니다.

뉴욕타임즈의 유료가입자는 600만 명이 넘는다. 

뉴스소비자가 알아서 선택한다. 좋은 기사를 쓰지 않으면 소비자가 떠나는 당연한 시장 구조다. 

우리는 엉터리 기사를 계속 올려도 네이버에 올라가면 소비가 된다. 

덕분에 검증되지 않은 언론사들이 생명을 유지한다. 계속 클릭 장사에 매달린다. 

신용카드만한 그 작은 네이버창에 들어갈 좋은 기사의 공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언론산업의 매출이 급격히 줄고 있는데 아직도 신생언론사가 무수히 쏟아지는 것도 이런 이상한 생태계 때문이다. 

악화가 존중되는 시장에서 양화는 구축될 수밖에 없다.


결국 좋은 기사가 수많은 플랫폼에서 상품처럼 선택되고 소비돼야한다. 결국 기사가 소비되는 환경을 바꿔야한다. 

한국 언론의 근본 문제는 무슨 언론관련 제재를 강화하거나, 언론인의 도덕성을 강화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45년전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싸우던 시절보다, 지금은 덜 도덕적인 인간들이 기자가 된단 말인가?).

지금 우리사회를 반으로 나누는 사람들은 누굴까.

세대간 이념간 소득간 지역간 남북간 남녀간의 갈등이 커질수록 이익을 보는 집단은 어딜까. 

오직 정치인과 정파적 언론뿐이다. 

언론이 서로 합의점을 찾는 보편타당한 위치를 벗어날수록 ‘합의’라는 역사적 진보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렇게 후퇴한다. 

오늘도 ”전자발찌 살인범. “더 못 죽여 한이다”” 기사 수십여 개가 네이버 창을 장식중이다. 

이 기사가 정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가. 


정작 누군가를 못 죽여 한인 것은 우리 언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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