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은 밤에 두서 없이 쓴 글을 좀 더 자세히 적어보고자, 정리해보고자 따로 간략하지만 보충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인도는 조선과 상당히 비슷한 처지의 국가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 저것 다르지만 이 정도로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식민지는 없었고 이 만큼 문화와 경제에 따른 피해를 비슷하게 담습해 나간 국가도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독립 이후의 격통도 비슷합니다, 다만 한쪽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구성 아래에 이념으로 분립되었고, 다른 한쪽은 민족과 종교의 난립으로 고통받은 정도의 차이이지요.
세포이 항쟁, 인도에서 부르는 1차 독립전쟁을 살펴보자면 우선 세포이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해볼 필요가 있을것 입니다.
세포이Sepoy란 페르시아 어 시파이Siaphi 즉 오스만에서 활동하는 그러니까 봉건 제도 당시의 기사들에 해당되는 이들의 이름에서 유래된 말로서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을 이야기 합니다,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27만여명중 22만명 정도가 이 들 세포이이며 출신지에 따라 벵골, 마드라스, 뭄바이 군으로 나누어 각지에 배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영국이 인도 라는 식민지의 현지 주민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켜 고용을 하였는가? 가 어쩌면 의문일수도 있습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일본 제국군 부대가 단 하나도 없던 실정을 생각하면 의문일수 있으나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첫째로 영국은 동인도 회사와 무굴 제국이라는 이원화된 체제로 간접적인 식민지 통치를 하고 있었고, 두번째로 당시 끊임없는 팽창주의로 일관하던 영국의 대외 정책이 그것입니다, 영국에서 인도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볼때 투입해야 될 지역은 많으나 늘 인력은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원화된 통치 체제를 감안해보았을때 구태여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에 동인도 회사에서 고용한 용병들로 해결할수 있다 본것이지요,
물론 세포이는 생각보다 효율적이었는지 큰 문제가 없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만 그 내부는 심각하게 곪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본디 인류의 역사에서 주요한 전쟁이나 참상을 일으킨 원인들 중에는 종교가 빠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알렉산더 대왕이랑 맛깔나는 싸닥션을 나누기 이전 부터 뿌리깊게 종교와 민족간의 불화를 겪어오던 인도에서 카스트와 종교, 민족을 구분치 않고 배비한 세포이는 한 바구니에 계란을 모아담는 격이었고,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화약고나 다름없었지요.
세포이는 열악한 근무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령 사병 기준으로 세포이의 봉급이 7루피인데 10루피가 1파운드였습니다, 여기서 식비 3.5루피에 기타 뭐 퇴직 연금 등의 비용 2.5루피를 제하면 실상 손에 쥘수 있는 것은 한달에 1루피 남짓이었지요, 거기다 진급 제한이 뚜렷하여 나이가 어느 정도 있던 세포이들은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또한 동인도 회사 그러니까 영국에서는 인도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카스트와 종교에 대하여 어떠한 배려나 정책을 내지 않고 있었지요, 때문에 세포이들은 카스트에 상관없이 동일한 복장으로 터번이나 장신구 그 무엇하나 소지할수 없었고, 인도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교리나 물을 건너지 못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불명예 제대와 같은 처벌이냐 해외 원정에 대한 순응이냐의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 터진것이 화약 탄포의 문제입니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세포이들에 대한 전력 강화의 한 방책으로 당시 최신형 소총이던 리 엔필드 소총을 지급합니다, 이는 기존에 플라스크에 화약을 담고 쏘던 머스킷보다 발전된 형태로 납탄과 화약이 페이퍼 카트리지에 담겨있어 사용자에게 편리함을 제공할수 있었지요.
어찌보면 용병에게 상당한 배려라고도 생각할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이 페이퍼 카트리지의 방수를 위해 발라진 기름이 소와 돼지의 기름이라는 카더라가 돌기 시작한 것 부터였습니다,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와 돼지를 기피하는 이슬람교 세표이를 구성하는 주요한 양대 종교에게 소와 돼지의 기름이 묻은 종이를 입으로 뜯으라는 이야기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입안에 상처가 나있는 에이즈 환자분과 키스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위일수 밖에 없었고 세포이들은 이 새로운 소총을 수령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세포이를 지휘하던 군 지휘관 리처드 버치는 문제의 탄약통을 전량 회수시킴과 동시에 원하는 기름을 써도 좋다는 명령과 함께 손으로 찣어도 좋다고 군사 교리를 변경하였지만 이는 인도인들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고 있던 영국이 사실상 인정을 했다고 받아들이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더욱 반발만 거세게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군법에 의거하여 교수형에 처하게 되거나 불명예 제대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런 저런 소동이었고 결코 세포이 항쟁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순은 아니었습니다, 불을 붙이는 일은 따로 있었지요 바로 토지세 혜택의 폐지입니다. 사실상 월급으로는 생활이 매우 빈곤할수 밖에 없던 이 들이 가문에서 대를 이어가며 지원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그 마저도 없어진 것이었고, 더욱이 벵골 연대에서는 연금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하여 월급에서 차감액을 늘리는 터라 월급이 적었는데, 퇴직 연금이 없어졌습니다.
네 화약고에 불이 붙은 것이지요.
1857년 2월 26일에는 제 19 벵갈 연대에서 탄약통의 수령을 거부하였고 3월 29일 제 34 벵갈 연대의 멩갈 판데이가 탄약통의 수령과 처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는데 이 때만 하더라도 사태의 심각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습니다만 가장 결정적인 일은 같은해 4월 24일 미루트에서 벌어졌습니다.
제 3 벵갈 경기병 연대의 세포이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여 중징계를 받은 것이지요, 이에 격분한 이 들은 5월 9일 반란을 모의하여 다음날이 일요일임을 이용해서 장교들을 살해하고 세포이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시 억압받던 인도와 그 민중을 생각했다기 보다는 말 그대로 처우에 불만을 품은 이 들이 벌인 군사 반란에 가까웠습니다, 이 들은 명분을 위해 38마일 정도 떨어진 델리로 직행하였고, 역시나 불만을 품고 있었던 델리 근방의 3개의 연대들을 규합하여 무굴 제국의 바지 사장...아니 이름뿐이던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옹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중이 함께 하는 진정한 독립 운동은 여기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영국인들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큰 위협으로 여겨졌습니다. 영국인들이 실시한 서구식 교육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들은 이제껏 살아온 현지인들의 문화와는 전혀 맞지 않았으며 특히 과거 인도 귀족들이 차지하던 자리는 영국 관리에게 넘어가고 힌두교의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들은 이전 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하면서 큰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한 산업 혁명과 더불어 들어온 값싼 영국산 면직물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인도의 주요 산업이었던 면직물 산업은 붕괴시켰습니다.
이 과정은 다소 과장은 있을 지 모르지만 당대 인도인들에게 정말 말을 할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가령 인도의 맨체스터라고 불리던 섬유 산업의 중심지인 다카는 인구가 15만에서 3~4만에 불과할 정도로 감소했습니다, 도시의 일부는 폐허가 되었고, 목화의 하얀색은 인도인 직공들의 뼛가루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처우는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것이 영국의 도움으로 문명화를 이루었다는 인도의 비참한 현실이었지요.
여기에 무거운 세금과 지배층인 영국인들의 고압적인 태도 역시 인도 민중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 반영 감정을 자극하기에는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이 충분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했으며 식민 통치에 있어 그들의 의견은 단 1%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853년에 생긴 법률 위원회는 모두 유럽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마치 현지 의회인 것 처럼 행세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인도인과 인도의 문화, 종교 등을 무시하는 처사가 세포이의 항쟁을 촉발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세포이들은 박봉에 시달리면서 여기 저기 정복 전쟁에 차출되어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또 이들의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는 영국 장교들의 행동으로 점차 긴장 관계가 커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일은 어쩌면 처음 부터 예견된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든 인도인들이 세포이의 반란에 동조한 것은 아닙니다,
세포이들만 놓고 보더라도 세포이 3개 군중 벵갈군은 75개 보병 연대중 44개의 보병 연대가 항쟁에 참여하였고 29개의 비정규 기병 연대와 22개 비정규 보병 연대가 전원 참가했습니다만 뭄바이의 경우 3개 연대만이 호응했고 마드라스 군의 경우는 단 한개의 연대도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이 때까지 각지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토후들도 이해관계와 종교적인 문제에 따라 방관을 하고 있었던 데다, 대다수는 도리어 동인도 회사 즉 영국에 매우 협조적이었으며 무굴 제국 = 인도의 압제자 라는 공식아래에 무굴 제국의 국교인 이슬람에 반발하였던 시크교도들과 인도인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도들은 방관하였는데, 도리어 네팔의 지배자 장 바하두르와 같은 시크교도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세포이 항쟁의 진압에 압장섰습니다.
고작해야 1848~1856년 에 걸쳐 인도 총독 달하우지 경의 랍세 독트린 아래에 강합적인 병합 정책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아와드와 얀시를 비릇하여 벵골에서 호응이 있었고 7개 토후들과 무굴 제국의 잔존 세력이 그 뒤를 이어 손을 잡은 정도였는데, 문제는 지도층이 이런 말은 그렇지만 매우 능력적으로 빈곤했다는 점입니다.
바하두르 샤 2세를 비릇하여 브라만 등 상층부의 대부분의 인원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둘째치고 제대로 된 규합이 안되어 전황이 불리해지자 토후들은 매수 공작에 넘어가 배신을 하기 시작했으며 영국이 지배권을 상실한 지역에서는 지주와 토후들이 그네 들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는데만 급급했습니다, 신흥 지식층과 부유한 상권 계층 그리고 무슬림이나 소수 민족의 동포들은 반란에 냉담했습니다, 즉 유일 무이한 전투 병력인 벵골군을 상대해야 할 적은 마드라스와 뭄바이의 세포이 동포들이나 영국군뿐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영국은 당시 중국의 전황이 매우 안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천만 파운드의 전시 국채까지 발행하면서, 직접적인 지배를 천명했고 칸푸르의 대 학살을 비릇하여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비록 근거 없는 카더라가 대다수라지만 연일 대서 특필되어 인도에 대한 증오는 결코 꺼질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영국군을 비릇하여 펀잡과 네팔의 시크교도들과 구르카용병을 비릇하여 인도 내의 소수 민족들과 마드라스 뭄바이의 세포이들까지, 철저한 진압이 뒤따랐고 1858년 3월 반란의 중심지 아와드의 락나우가 함락되면서 반란은 끝났습니다, 정확히는 1858년 7월 8일 평화 협정이 발표된 이후에도 1년여간 산발적인 게릴라 전이 뒤따랐지만 이미 넘어간 전세를 뒤집을수는 없었지요.
이 전쟁에 있어 가담자에 대한 처벌은 매우 잔혹했습니다, 행군로를 따라 나무마다 목매달린 반란군의 시신은 과수원의 과실이 맺히듯 주렁주렁 매달렸고, 사로잡힌 세포이들은 소와 돼지의 피를 먹어야만 했고 과거 무굴제국이 사용했던 대포를 사용한 처벌은 말을 할수도 없었습니다.
이 세포이의 항쟁 이후 영국은 기존의 이원화된 지배 체제를 뒤엎고 영국 여왕 폐하가 다스리는 직할지로서 일원화된 체제를 구성합니다, 또한 종교에 대한 문제를 깨닫고, 외부로는 관용을 내부로는 무슬림과 힌두교도 사이를 이간하는 정책으로 돌아섰으며 기존의 1:6의 비율까지 나왔던 영국인과 인도인의 군 내의 비율을 1:1~1:2까지로 축소하는 한편 소수 민족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민족간 대립을 부추겼습니다, 진급에 있어 인도 출신 영국군 장교는 1차 세게 대전까지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도인에게 최신형 병기는 단 한번도 지급되지 못했습니다.
실제 이러한 정책은 어느 정도 효용을 본것이 인도 제국 이후로 물론 그 이전도 그러했습니다만 단 한 번도 인도 전역을 지배한 통일 국가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인도 공화국의 성립도 이러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인 대립으로 얼룩졌고, 지금도 진통은 계속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