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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가 연극을 보았던 곳인 창음각>
변법개혁운동이 실패로 끝난 직후 서태후는 조카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여 황제를 혐오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관람할 연극의 주인공을 황제를 상징하는 못된 양아들로 만들어, 이 양아들이 자신을 길러준 부모를 죽이자 그 업보로 천둥의 신 뇌공雷公이 내리친 벼락에 맞아 죽는 결말을 참으로 좋아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양아들이 맞는 벼락을 다섯 배는 더 강하게, 그리고 비의 신 우사雨師를 추가해 더더욱 참혹하게 연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태후가 황제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태후는 마음같아서는 그를 죽이거나 폐위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녹록치 않았습니다. 후에 영록이 꺼낸 '황제 폐위' 건에 대해 이홍장의 대답은 보시다시피 굉장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단 말이오! 이건 역모요! 처참한 꼴을 당할 것이오? 서방의 외교관들이 항의할 테고, 각 성의 신하들이 반기를 들 것이오, 제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거란 말이오!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구려!"
결국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되 이전처럼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 이를 위해서라도, 태후가 황제를 죽였다는 풍문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서태후는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자신이 다스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공사관 드테브 박사가 11월 18일 광서제를 진찰하러 자금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를 따라간 의사 중 한명은 황제와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황제는 장식이 없는 좁고 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고, 의자는 황금빛 공단으로 만든 방석으로 덮여 있었다. 황제가 쓰고 있는 겨울 모자에는 고관의 방울이나 단추 역할을 대신하는 붉은 비단 장식과 매듭이 달려 있었다. 짙은 자줏빝의 호박을 단 외투에는 흔히 보이는 용의 자수가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비시에르 씨가 곧이어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황제는 부드럽지만 병색이 완연했다. 매끈하게 면도된 수척한 얼굴에 검고 깊은 눈은 황제가 제 나이인 스물여덟이 아니라, 그 나이의 절반을 갓 넘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비시에르 씨는 병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는 것과, 그나마 드테브 박사가 돌볼 수 있어서 매우 다행이라는 것. 그리고 병의 성격과 원인을 자신에게 자세하게 알려주면 좋겠다는 것 등등을 이야기했다. 그 동안 황제는 대답하기 거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제의 말을 잘 듣기 위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대군에게 눈짓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내 맥박부터 보게 하라." 그래서 드테브 박사는 황제의 오른편에서 오른쪽 손목의 맥박을 짚었다. 면담은 50분 정도 걸렸다. 환자는 태후에게 동의를 구한 뒤 옷을 벗어 청진을 할 수 있게 했다.
박사의 진찰 결과, 황제는 메스꺼움, 구토, 호흡 곤란, 이명, 현기증 증세와 신장 부위의 통증, 배뇨이상 등을 앓고 있음이 드러났고, 드테브 박사는 이를 바탕으로 그가 만성 신장염을 앓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광서제는 몸의 이상과 별개로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실권을 완전히 잃은 뒤, 태후를 만날 때는 항시 무릎을 꼬박꼬박 꿇는 반면 황제인 자기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태후 앞에서처럼의 예의를 보이지 않는 태감들을 보며 상당한 괴로움을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광서제는 태감들이 와 인사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또는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분개한 모습도 웃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대에 유폐된 뒤 황제는 서양 번역서를 읽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소일하였습니다.(광서제의 풍금 실력은 능수능란했다 합니다.)자신이 사용하던 오르골이 망가지자 다시 수리하고는 중국 음악까지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때때로, 종이에 원세계의 이름을 쓴 뒤 활을 쏘아 종이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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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준簿俊>
그렇다고 해서 서태후가 광서제를 폐위시킬 생각을 완전히 버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899년 그녀는 도광제의 손자인 단군왕端郡旺 재의의 차남 부준을 보경제保慶帝로 칭하고 제위에 올리려고까지 했습니다. 물론 유럽열강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요.(이 즉위식날 러시아 사절단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요)
궁정 속 모습은 이럭저럭 흘러가고 있는 반면 자금성 밖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혁명파와 개혁파로 분열된 지식 계층 사이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고, 급진혁명파들은 만주족 암살을 기원하거나 황제를 폐위해야 한다는 글을 신문에 싣기도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이념은 전국으로 퍼져갔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만주 정권과 전제정치의 전복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약 3년 전인 1895년 10월 광주에서 무장 봉기를 계획했으나 실패하였던 한 혁명가는 중국 각지에 민권, 민생, 민족주의를 뜻하는 삼민주의三民主義 이념을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이후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구제달로驅除撻虜, 회복중화回復中華, 창립민국創立民國, 평균지권平均地權을 주장했습니다. 1912년 중화민국이 세워짐으로서 자신의 뜻을 이룬 이 혁명가의 이름은 바로 손문孫文이었습니다.
그러나 궁중의 문제, 정치문제, 사회 여론보다 더더욱 거대한 불운이 청 제국을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말 북경 인근의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굶주린 주민들은 비의 신 우사雨師가 푸른 눈의 서양인들에게 홀려 비를 내려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먹는 문제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생리욕구이기 때문에, 이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사람의 판단력이 혼미해집니다. 이는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여서, 기아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모든 불행을 서양 선교사들에게 돌렸습니다. 항간에서는 다채색 눈을 가진 외국인들이 땅속을 꿰뚫어보고 그 안에 묻힌 보물들을 훔쳐가 청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제 청에서는 서양인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하였고, 1898년경, 그런 분노와 두려움이 응축되어 백성들은 거리로 튀어나와, 그들 자신을 '의화단' 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몇달 뒤 수만 명의 농부들로 구성된 의화단이 수도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붉은 두건을 쓰고 붉은 윗옷과 붉은 허리띠를 착용한 의화단의 우두머리는 미친듯이 울부짖고 춤을 추었고, 다른 대원들은 아무 의미없는 주문을 외우며 무술을 연마하였습니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습니다. 그들 중 일부를 차지했던 여성 대원들은 스스로를 홍등조紅燈照라고 부르며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그들은 짧은 소매의 붉은 윗옷과 꽉 끼는 바지를 입었고, 마법의 힘이 서려있다고 믿어지는 붉은 손수건을 들고 다녔습니다.
<여성 의화단원>
권민들이 믿는 의화단의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조소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들은 100일간 훈련하면 총상을 입지 않고 400일을 훈련하면 하늘을 날 수 있다 주장했으며, 천병天兵과 천장天將을 불러들인답시고 괴상한 주문을 외워댔습니다. 우스운 것은 총과 대포는 '서양 것들' 의 무기이니 창칼만을 고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떠받드는 신인 옥황상제, 관우, 제갈량, 서초패왕 등이 자신들을 수호할 것이라 여겼는지는 몰라도 너무나 오만방자했습니다. 권민들의 구호에 대해 알려드리자면, 그들은 이렇게 외치고 다녔습니다.
"한 마리 용(황제), 두 마리 호랑이(경친왕, 이홍장), 300마리 양(외국인과 관련있는 수도에 있는 관원들)을 잡아죽이자!"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행위는 광기에 가까워집니다. 그들은 벨기에의 천주교도를 대나무 장대에 매달아 '쇠사슬을 어깨뼈에 뚫어넣고 철창속에 가두어 사방으로 끌고 다녔'으며, 몽골중부교구의 천주교도 5000명중 3200명이 피살당합니다. 직예성에서는 3000여명의 천주교도들이 모두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들의 칼끝은 비단 천주교도만을 겨냥하지 않았습니다. 서양산 연필 한 자루라도 몸에 소지하고 있는 것이 발각될 시에는 가차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이 모습은 당시 기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안의 낮에는 불지르고 약탈하며, 불길이 밤낮으로 이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바로 신자로 지목하여 온 집안을 살륙했다. 경사에서 죽은 자가 십수만명이다. 그들이 사람을 죽일 때는 칼과 창으로 사지를 도륙내는데, 그중에는 태어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의화단이 교민과 백성을 죽이는데 여러가지 잔혹한 도구들을 사용한다. 절구로 찧기, 불태워서 갈기, 산채로 매장하기, 사지분리, 요참 등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들은 서양선교사들의 묘지를 파헤쳐 하나도 화를 입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들은 무지하고 무모했습니다. 북경 거리에 붙은 의화단 금지 칙명 바로 옆에, 의화단원들은 '석 달 안에 모든 외국인들을 몰살시킬것' 을 촉구하는 내용의 방을 붙였습니다. 이는 누가 보기에도 도전적인 어투였습니다. 문제덩어리 권민들을 감싸준 이는 다름아닌 서태후였습니다.
초기에 청 조정은 외국의 요청에 따라 의화단 진압에 나섰으나 진압되기는 커녕 날로 규모가 커지자 서태후는 오히려 이들을 '자기 편' 으로 만들었습니다. 1900년 1월 11일, 그녀는 권민을 옹호하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습니다.
당연히 많은 관원들이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서양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소리인데, 이를 어느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광서제는 앞으로 일어날 파탄을 예상했는지 이부시랑의 손을 잡고 중얼거리며 "더 상의하여 처리하라" 라고 말했다 합니다. 이에 대한 서태후의 반응은 "황제는 상관하지 마시고,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라는 대답 한 마디였습니다.
서태후라고 이런 권민들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개혁세력, 혁명세력, 서양열강이 모두 자신에게 등 돌린 상황에서 믿을 것은 하층민들의 민심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태상시경 원창袁昶이 권민들의 술법은 거짓된 것이라고 아뢰자 태후는 그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습니다.
"법술이 믿을 수 없다니, 인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인가? 지금 중국은 쇠약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의지할 것은 인심뿐이다."
의화단원들의 세력은 급속히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고위직 관원들도 이에 합류하였고, 그중에는 황제가 될 뻔했던 부준의 아버지 단군왕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의화단원들의 법술이 사실인지 조사하기위해 파견되었던 관원들 전부가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습니다.
사실 의화단은 가뭄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생성된 단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이리저리 짖이겨지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독일은 산동성 항구 청도를 점령했고, 영국은 산동 북부의 위해威海와 구룡반도를 발아래 두었습니다. 러시아는 여순을, 프랑스는 해남성을, 일본은 대만을 손에 넣어 청이 망국분열될 상태에서 굶주린 백성이든 고관대직이든 서구열강에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0년 여름, 서구 열강은 자국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병사 2000명을 파견하였고, 6월17일 이 병사들이 다구 포대를 청군으로부터 빼앗음으로서 두 군대 사이에 전면전이 발생했습니다. 서태후는 급히 어전회의를 열어 서구 열강에 선전포고하기로 결정내렸습니다.
"외국인은 우리에게 적대적이었고, 우리의 통일된 영토를 침범했고 우리 백성을 짓밟았다. 그들로 인해 고통받은 일반 백성들은 모두 복수심에 차 있다. 그래서 용감한 의화단원은 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인을 죽였다."
서태후의 지지가 확고해지자 의화단은 외국인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이는 청군들도 뒤지지 않아서, 산서성에 부임된 육현은 군인들을 동원해 178명의 선교사와 수천에 이르는 청나라 기독교 개종자들을 학살했습니다. 해머 신부는 기독교도들을 학살하였던 당시 모습을 회고하며 말하기를,
"3일 동안 길거리로 끌려다녔고, 모두가 아무렇지않게 그를 고문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전부 뽑히고, 손가락, 코, 귀가 잘려 나갔다. 그런 다음 기름을 적신 천으로 그의 몸을 싸맨 뒤 거꾸로 매달아 발에 불을 붙였다."
사실 서태후는 서양세력과 완전히 등을 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는데다 이런 잔인성에 충격을 받아 육현에게 그러한 행위를 그만두라고 명령했습니다.
1900년 8월 4일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군으로 구성된 1만 8000명의 군대-일본인 8000명, 러시아인 4800명, 영국인 3000명, 미국인 2100명, 프랑스인 800명,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인은 각각 58명, 53명이었고, 독일인은 너무 늦게 도착해 연합군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는 권민과 정부군을 상대하며 파죽지세로 진군했고, 이들과의 전쟁에서 조정은 열흘만에 베이징을 내놓게 되어버렸습니다.
황제는 북경에 남아 열강과 강화조약을 맺고 스스로 정권을 인수할 생각이었으나, 궁지에 몰린 서태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8월 15일 그녀는 서안으로 피신하면서 광서제까지 억지로 끌고갑니다. 이 과정에서 황제의 총비였던 진비珍妃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서양인들이 성안으로 쳐들어오려 한다. 바깥은 난리가 나서 누구도 제 한 몸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야. 만일 그들에게 치욕을 당하면 황실의 체통은 전부 끝장이고 선대 조상들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쯤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선조의 체면을 깎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너는 아직 젊어서 말썽이 나기 쉽다. 우리는 잠시 몸을 피신하려 하나 젊은 너를 데리고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마마는 몸을 피하시옵소서. 황상을 북경에 두시어 정세를 돌보도록 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 말이 태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태후는 얼굴색이 변하더니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당장 죽음을 코앞에 둔 것이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게냐!"
"저는 죽을죄가 없사옵니다!"
"죄가 있든지 없든지 너는 죽어야 할 것이다!"
"황상을 한번만 뵙게 해주소서. 황상은 저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황상도 너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저 계집을 우물 곳으로 집어넣으라! 게 누구 없느냐?"
결국 옆에 있던 태감 최옥귀와 왕덕환이 진비를 붙들어서 정순문 안 우물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진비는 계속 황제를 뵙게 해달라 외치다가 결국에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황상, 베풀어주신 은혜, 내세에서 갚겠나이다!"
이후 서태후는 최옥귀를 내쫓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은 진비를 우물에 밀어넣을 마음이 없었는데 최옥귀가 환심을 사려고 무리했던 것이기 때문' 이었다 합니다. 그냥 덤터기 씌우는 것에 불과하지요. 이후 얼마 안 되어 최옥귀는 다시 돌아왔고, 제 2총관으로 승진했다 전해집니다.
<진비가 빠져죽었다는 진비정珍妃井>
위의 내용은 최옥귀가 그때 일을 회고한 내용인데, 다른 태감은 진비가 태후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였고, 그때 황제도 옆에 있었다며 전혀 다르게 회상하기도 하여서 사실인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어찌되었건간에 이런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무시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서태후는 머리에 쪽을 지고 수수한 푸른 겉옷을 걸친 채로 노새 마차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황제 또한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아 한족들이 입는 검은색의 얇은 비단 겉옷을 입은 상태였다 합니다. 도피 첫날 밤 황제는 이슬람 사원에서 묵었는데, 기도 매트를 깔고 등나무 쓰레받기와 손잡이 없는 빗자루를 회색 의자 덮개로 감싸 만든 것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하는 초라한 신세였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면 오물로 뒤범벅된 바닥은 신을 더럽혔고, 바닥에는 구더기가 이리저리 기어다니는데다 수많은 파리때와 모기때는 얼굴을 잡아먹으려는 듯했습니다. 대청국의 황족들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서태후는 회래현에 도착해 그 현의 행정수장이었던 오영吳永에게 황제와 태후에게 만한전석의 일품요리와 친왕, 고관들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영은 어떻게든 이 요구를 충족시켜주기위해 요리사를 시켜 음식 재료를 좀 모았지만, 주방으로 조리하러 가던 중 패잔병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가까스로 녹두, 수수, 귀리를 끓인 죽이 담긴 큰 냄비 세 개를 준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중 두 개는 굶주린 병사들이 먹어치우고 말았고요. 오영이 남은 냄비 하나에 보초를 세우고 가까이 오는 자가 있으면 발포하겠다고 엄포를 내놓고서야 병사들은 그 냄비를 황족들에게 양보했다 합니다.
오영은 황태후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황폐한 여관의 방을 깨끗이 정돈하고 의자 몇몇개에는 쿠션을 놓아주었습니다. 이에 태후는 감동하여 눈물을 터뜨리고는 오영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식사가 다 준비되자 모두 개걸스럽게 먹어치웠고,(당시 황제는 젓가락을 가져오지않아 수수 줄기를 젓가락 삼아 먹었다고 합니다.)서태후는 후식으로 달걀 몇 개를 주문했습니다. 오영이 가게의 빈 서랍에서 달걀 다섯 개를 가져오자 태후는 세 개를 먹고는 두 개를 황제에게 양보해주었습니다.
이러한 눈물나는 피란길 동안 이미 외국 공사단은 화의안을 제출한 상태였습니다. 서태후는 '엄중 처벌' 할 원흉 조항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즉각 화의안 전부를 수용하겠노라고 밝혔습니다.1901년 2월 광서제의 명의 아래 화의요강을 비준한다는 전령을 내린 그녀는 "중국의 물적 자원을 다 바쳐 열국의 마음에 흡족하도록 노력하노라. 뼈저리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책의 조서를 반포하노라." 하며 태세전환을 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뻔뻔하게도 "금번 이 조약은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국토를 분할하는 것도 아니다. 열방의 양해에 유념하고, 우매한 폭도들의 무지몽매함에 통한하노라. 사후 회상해 보니 흥분과 분노가 교차하노라." 라고까지 합니다. 그렇게 1901년 9월 7일 맺어진 신축조약辛丑條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은 4억 5천만 냥을 배상한다.(당시 중국 1년 세입은 2억 천만 냥이었습니다.)
2.외국인에게 죄를 지은 관원들을 처벌한다. 위로 친왕으로부터 아래로 각 부와 현의 지방 관원에 이르기까지 100여 명에 달하는 자를 사형, 감금, 유폐에 처한다. 동시에 대사를 각각 독일과 일본에 파견해 사죄한다.
3.청 정부는 배외排外단체를 조직하거나 가입하는 그 일련의 행위도 엄금조치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각 지방관은 관할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외국인을 상해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즉각 진압하지 못하는 자는 삭탈관직하고 영원히 재임용하지 않는다.
4.북경 동교민항東交民巷에 대사관 구역을 설치하고, 각국은 대사관 구역에 군대를 주둔할 수 있으며, 중국인은 대사관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불허한다.
5.북경에서 천진 해안까지 이어지는 주변의 각종 포대를 철거시킨다.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이어진 철도 연변의 전략요충지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킨다.
1940년 11월 31일까지 지불해야 했던 은 4억 5000만냥은 연리 4%이자가 붙어 이를 합치면 9억 8000만냥에 달했습니다. 또한 이 외에도 의화단 운동에서 죽은 200명의 외국 병사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워주기로 약속하고, 의화단 활동이 창궐했던 45개의 도시에서는 5년간 과거를 실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또한 청은 약 2년간 무기 수입을 금지당하면서 완전 무장해체당합니다. 그렇게 화북과 내몽골을 석권하고, 231명의 외국인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으며 수천 수만명의 중국 기독교인을 처참하게 살육한 일화단의 난은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서태후는 1902년 2월에야 북경에 돌아옵니다. 이제 청 제국 신민들의 조정에 대한 기대는 바람앞의 촛불처럼 사그라들었습니다.
다음편에 계속..
진짜 근 한달만에 다시쓰네요ㅜㅜ 그냥 내버려둘까 하다가 완결내보고 싶어서 이렇게 늦게나마 씁니다.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