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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시골생활. 사람들이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
게시물ID : humorstory_4440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걍하자
추천 : 18
조회수 : 2134회
댓글수 : 27개
등록시간 : 2016/02/16 10: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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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이곳 제가 살고있는 동네에서 차로 한 시간 그리고 두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작은 도시들이 몇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마다 자영업을 하는 한국 사람들이 꼭 한 둘씩은 있었지요.

저는 가게에 박혀서 일 만 하면서 살고있는 그 친구들에게 '사람이 산다는게 뭐냐' 라는 철학적인 질문까지 해대며 바람을 집어 넣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정기적인 친목모임을 만들기로 전화 상으로 의견일치를 보았고, 우선 우리를 비롯해서 다섯가족이 우리집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혀 친구가 될 수 없을것 같은 조합이라도 이 곳에서는 단지 한국사람이라는것 만으로도 죽마고우 못지 않은 친구가 되곤 하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나이들도 비슷하고 아이들도 비슷한 또래다 보니 아주 죽이 맞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을 소개를 하자면,  먼저, 태권도장을 하는 성사범.
예전 글에 썼던 조폭 태권도사범이 아니고,
이 친구는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태권도장으로 투자이민을 왔다는데 밤새도록 잘난 제자얘기만 했습니다.
시의원 제자에 대학교수 제자, 거기다 석유재벌 제자얘기.
그리고 금발 미녀 제자 이야기을 할 때는 옆의 레이디 그룹의 눈치를 보면서 목소리가 작아졌지요.
(다른 사람보다 자세교정을 더 많이 세밀?하게 한다고...)
의외로 나이든 미국사람들이 취미로 태권도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꽤 큰 중국 레스토랑을 하는 박사장.
비지니스 마인드가 대단한 친구인데, 이 친구는 전혀 중국사람 같이 안 생겼는데도 비지니스차원에서 중국사람 행세를 하며 식당을 운영한다고 합니다. 
미국사람들은 그 나라 음식 식당은 그 나라 사람이 요리하고 운영해야 프로페셔널로 인정하고 먹으러 간다고 하거든요.

예전에 LA에 있을때 조그만 피자 레스토랑을 하는 한국분이 있었는데 맛이 괜찮아서 자주 갔었습니다.
홀에서 파자를 만드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가게였는데, 손님들이 왜 너는 이탈리안도 아니면서 피자와 파스타를 만들어 파느냐고 컴플레인을 많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스트레스로 인하여 결국은 일본사람도 아니면서 테리야끼 전문식당으로 바꾸고 말았지요.
(미국사람들은 일본놈 중국놈 그리고 한국분들을 분류하지 않고 싸잡아서 그냥 아시안으로 부르더라고요. 기분 나쁘게...)

잡화점을 하는 깜박이사장.
중학교를 다니다 미국에 왔다는데 여기서 고등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장삿길로 나섰다고 했습니다.
이 곳도 한국의 장터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곳을 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로 시작해서 지금의 만 스퀘어피트(929.0304스퀘어미터)에 달하는 잡화점을 일구어 낸 친구입니다.
성이 이씨에다 눈을 자주 깜박거려서 저는 깜박이사장이라고 불렀는데 본인 말로는 3살때부터 눈을 자주 깜박거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40년은 더 있어야 이 버릇이 없어질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지요.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며....
이친구는 속담을 진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것은 우리중에 이사장이 제일 부자라는 사실이었지요.
이런 모임에는 부담없이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사람이 하나쯤은 필요 하거든요.
이사장 말로는 매상이 지금은 많이 떨어졌지만 한창 잘 나갈 때는 가게에서 돈을 긁어 담았다고 합니다.
하루 일 끝나고 집에 와서 돈 정리하다 지쳐서 잠들기가 예사였고, 아무리 써도 써도 돈이 줄지가 않아서 이 돈을 다 어떡하나 하고 고민을 많이 했었다고 합니다.
(아, 이 말을 믿어 말어...)

칼리지에서 정치학 파트타임강사로 있는 김박사.
사실 김박사가 우리 모임에 있는것은 유유상종을 거스르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김박사는 우리중에서 제일 장사꾼 처럼 생긴 외모와 언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 들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동부에 있는 대학에서 동양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답니다.
미국가서 박사학위만 따면 책임지고 자리 만들어 주겠다던 한국의 지도교수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 교수가 하는 말이,
한국 와 봤자 별 볼일 없으니 웬만하면 들어오지 말고 이 곳에 어떻게 해 보라고...
그래서 이곳 저곳 알아보는데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자리가 나오질 않아서 일단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결정 했는데,
어떻게 이 시골의 조그만 칼리지에 자리를 얻게 되었답니다.

어쨌거나 우리집은 함께 모인 첫 날부터 아이들 때문에 집 안이 뒤집어졌고, 우리 사모님들의 수다에 지붕이 들썩 들썩 했습니다.
그 동안 이 곳에서 쌓였던 언어스트레스를 다 쏟아 내는 분위기 였지요.

남자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자들도 이야기만 하며 밤을 꼬박 새울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보리로 만든 음료수가 함께 하긴 했지만...

새벽 동이 터 올 무렵,
우리는 반은 맥주에 취하고 반은 분위기에 취해서 마치 우리가 십년지기였던 것처럼 서로를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폰 노이만 인가 하는 그 아저씨가 이런 말을 했지요.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에 의해 익숙해진것을 이해한다고 느끼는것 일 뿐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들은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래서 하룻밤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착각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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