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악처(惡妻) 김씨(金氏) 이야기
□ 세종 9년(1427년 정미) 1월 3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를 지낸 이지(李枝)가 79세의 나이로 죽었음.
이지는 태조 이성계의 사촌 형제 쯤 됨.
고려말 이성계와 함께 왜구도 때려잡고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 하였기 때문에 세종 대왕 시절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종친중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돈녕부의 영사 자리를 하고 있었고 원종공신 2등이었다.
□ 이지는 자기 어머니의 기일(忌日, 제삿날)이 섣달그믐날이고, 아버지 기일(忌日)은 정월 초하루이므로 항상 연말 연초에는 절에 가서 재(齋)올리고 그랬는데 죽기 직전 당시에도 향림사(香林寺)라는 절에 후처(後妻, 두번째 부인)인 김씨(金氏)와 함께 연말 부부 여행 겸 제사를 모시고 있었던 중이었음.
□ 이지가 죽기 전날 밤에 잘 놀다가 들어가 잤는데 다음날 아침,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망함.
1월 3일. 뭐 79세의 나이니 그냥 수명이 다 되어서 자연사한 것으로 여기게 되어 소식을 들은 세종 임금이 늘 하던 데로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관(官)에서 장사지내도록 지시하였음.
□ 그런데 이지의 사망 소식과 함께 다른 소문들이 들려 옴.
이지가 후처(後妻) 김씨(金氏)와 더불어 절에 가서 수일 동안 머물렀는데, 밤에 처 김씨가 중과 간통(奸通) 하다가 이지에게 간통 현장이 발각됨. 그런데 빡이 돌아간 이지가 간통을 발견한 장소에서 중과 후처 김씨를 붙잡아 꾸짖고 구타하였음.
당시 조선의 법에는 간통하는 장소에서 상간자들을 현행범으로 적발 할 경우 이지가 부인인 김씨는 물론 간통을 하던 중을 그자리에서 때려 죽여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정당한 행위였음.
그런데 반항하던 처 김씨가 무려 남편 이지의 불알을 잡아 뜯는 바람에 이지가 죽었다고 함.
이 정도 상황이면 이건 살인 사건 정도로 취급되어야 하는데 그 절의 스님(엔터스님 아님, 진짜 스님임)들은 물론 마침 그때 따라간 수행 노비(奴婢)들이 모두 처 김씨와 친했거나 김씨 측의 노비였기 때문에 이를 숨겨버렸나 봄.
이때 죽은 이지의 전처(前妻)에게서 태어난 큰아들인 절제사(節制使) 이상흥(李尙興)이 충청도 있다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달려왔음.
김씨 측근의 한 남자 종이 김씨에게 “상흥(尙興)이 이 사실을 알면 형조에 알릴 것입니다.”라고 하면 대책을 세우자고 함.
김씨는 이때 남편이 급사하여 너무나 슬픈 나머지 미친(발광,發狂)척을 하여 천치(天癡)처럼 보이게 되어 진술거부 및 묵비권 행사와 심신미약 등의 쑈를 벌여 일이 잠잠해지게 되었다고 함.
할리우드 액션이 역대급으로 잘 먹힌 모양.
□ 그러나 이런 존슨 같은 소문은 역시나 입에서 입으로 잘 전달되는 특성이 있는지라, 여러 사람이 이 상황을 알게 되었고 사건 장소인 향림사가 있던 마을 사람들이 “관청에 알려서 시체를 검사하면 원통함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지의 아들 상흥(尙興)에게 귀띔을 해줬다고 함. 그런데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이 존슨 같은 상황에서 대가댁 맏아들인 상흥은 관청에 특별히 조사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함.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불알이 뜯겨 나가서 죽었고 어머니는 미쳐 지랄을 하고 있으니 이 사실이 공론화되면 한가닥 하던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창피한 일이 아니겠음? 아마도 조용히 그냥 넘어가는 걸로 서로간에 묵시적인 합의를 했나 봄.
□ 이제 이 후처 김씨(金氏)라는 여인네가 어떤 여인네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음.
김씨는 고려말 조선 초 한가닥 하던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지낸 김주(金湊)의 딸이며 처음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화(趙禾)에게 시집을 갔었음.
김씨가 조화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정종1년(1399년)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곽충보(郭忠輔)의 간통 사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음.
또 집안의 남자 종과도 간통을 하고 또 그걸 조화에게도 들켜 조화가 김씨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고 함.
또 태종 5년(1405년)년에는 여러 권력가들의 부인들과 김씨가 밤마다 자주 모여서 계모임 비슷한 걸 하면서 권력가 부인들의 남자 일족들과 추한 소문이 나돌아서 탄핵을 당하기도 함.
김씨는 태종 9년(1409년)에 충주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이유는 궁중에서 일을 하는 궁인들과 친해서 궁중의 여러 가지 말들을 듣고는 또 사사로이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닌 것 때문임. 태종 임금 시절에는 알아주는 사고뭉치 여인이었지만 족보가 개국공신, 권력자들과 얽혀 있어서 어떻게 강하게 조치를 하지 못했나 봄.
□ 태종 임금 시절 김씨의 남편인 조화(趙禾)가 죽자 마침 본처가 사망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지(李枝)에게 시집을 한번 더 가게됨.
당시 태종 15년(1415년)에 김씨의 나이는 57세였다고 함.
그런데 이지에게 시집을 가기로 했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조화와 김씨 사이에는 자식이 있었는데 이 자식들에게 조차 시집가는 당일날까지 비밀로 함.
당시 상황을 실록 그대로 옮기자면,
어두운 저녁에 이지가 이르니, 조명화(김씨의 아들)가 그제야 알고 이지의 목덜미를 잡고 함께 땅에 쓰러져서 목놓아 슬피 울며 말리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김씨가 이튿날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분이 늙었는가 하였더니, 참으로 늙지 않은 것을 알았다.”
라고 함. 벌써 서로 뭘 한거지?
물론 이지 또한 다음날 대궐의 조회에 불참하게 됨, 태종 임금이 이지가 안 보이자 태종 임금이 이지는 어디갔나? 하고 물어보자,
신하들이 이지는 장가 갔음~ 얼레리 꼴레리. 둘이 밤새도록 붕가붕가 ^^.라고 대답함.
태종 임금이 누구에게 갔는지 물어보니 김씨에게 갔다고 대답함.
태종 임금이 성질내며 한마디 함.
“아니 *발 그걸 어찌 장가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본인 뿐 아니라 공신들에게도 관대하던 태종 임금이 왈칵 짜증을 내자 신하들이 태종 임금의 심기를 깨닫고 바로 이지를 탄핵하기 시작했다고도 전해짐.
□ 다시 사건 당시로 돌아와서,
일단 이지가 불알이 잡아 뜯겨서 죽었다는 소문이 슬슬 퍼지기 시작하여 7월에 드디어 세종 임금에게 보고가 됨.
꼭 이 불알 살해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김씨가 죽은 남편의 이름을 이용해서 금품갈취나 변호사법 위반 행위를 벌이다가 잡혔나 봄. 그래서 그전의 행실들도 발각 되었던 듯.
세종 임금은 이 김씨라는 여인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몰랐나 봄. 물런 세종 임금은 그때 당시 장영실과 물시계 업그레이드 건으로 오유에 "물시계에 필요한 파워 추천 부탁합니다." 라는 글을 올렸다가 열심히 추천테러를 당하던 중이었다고 야사는 전함.
아무튼 세종 대왕이
“이 여자가 과거에도 귀양가고 뭐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니, 좌대언(左代言) 김자(金赭)가 대답하기를,
“두 번이나 밖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하였음. 흐음... 강적인데... 세종 대마왕이 말하기를,
“지금 범한 것은 작은 편이나 이러한 이상한 여자는 외방(外方)에서 죽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함. 그 어질고 백성 살리기를 좋아하던 세종 대마왕께서도 하물며 대가댁 마나님을 한양에서 아주 먼 곳으로 쫓아버리고 굶어죽던지 말던지... 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대사헌(兼大司憲) 이맹균(李孟畇) 등이 다시 상소하여 귀양 정도가 아니라 강하게 처벌하여 아예 죽이자고 주장함. 그런데 이미 이때 조화의 아들들은 하위직이지만 관직을 하고 있는 자가 여러 명이라 처벌하기가 좀 그랬나 봄.
왜냐하면 어머니가 참형이나 교수형 정도를 당할 죄를 지었다면 당연히 자식들도 전부 연좌제에 걸려 귀양가고 노비로 팔려가고 해야 법에 맞는 처분이니까...
그래서 그정도 까지 전부 한방에 보내버리기가 부담스러웟던 세종 대왕은 김씨의 아들 조복초(趙復初)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의 어머니는 서울 10리(里) 밖에서는 원하는데로 거주하되, 서울 안에는 절대로 왕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라고 타협안을 제시하고 김씨는 즉시 김포 통진현(通津縣)으로 쫓겨 갔다고 함.
□ 일단 김씨는 외지로 쫓아 보냈는데 처벌이 약하다고 판단한 신하들이 그 아들들에 대한 처벌도 같이 하자고 주장함.
그러나 세종 대왕은 음란한 행실을 방자(放恣)하게 한 죄는 예전의 일이며, 관작(官爵)을 사칭한 것은 비록 옳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공신(功臣)의 아내가 죄를 범하여도 남편의 공으로 죄를 면하게 된 경우도 있으니, 김씨가 이미 이지(李枝)의 아내가 되어 종실(宗室)에 열을 지었으니 역시 죄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마무리하고 김씨의 아들 중 문관으로써 고을의 수령을 하고 있던 조심의 관직만 파면하도록 함.
□ 지속적으로 김씨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임금은 김씨를 강화도의 움막에서 살도록 명함.
1년 뒤인 세종 10년(1428년 무신)에 사면됨.
그러나 김씨의 아들과 손자들, 김씨 가문의 딸들과 결혼한 남자들은 세조 임금 때까지도 계속해서 중요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승진 자격이 될 때마다 이 사건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되기도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였음.
사족
예전 개인 블로그에 있던 글을 조금 더 유머 게시판에 맞게 각색한 내용이며 출전과 출처는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악처 시리즈를 몇 개 더 올릴 예정인데 여성비하의 의도가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그냥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이야기 정도로 보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특정 신문사의 기사 일부가 실려 있습니다. 글의 내용에 대한 몰입도(?, 오히려 방해가 되려나...)를 높이기 위한 뻘짓임을 밝히며 특별한 의도는 없습니다.
역사 게시판 분위기도 좀 처지는 것 같고 유머 게시판에 먼저 글을 올렸는데 이건 좀 기만적인 행위(?)인듯 하여 역사 게시판에 다시 글을 올립니다. 밑에 한성별곡님 글에 역사 게시판에 읽을꺼리가 너무 없다 히셔서... 뻘글이라도 하나 읽으시라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