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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초. 그리고 삼국사기 불신론.
게시물ID : history_252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쉬킨
추천 : 18
조회수 : 2007회
댓글수 : 106개
등록시간 : 2016/02/05 17:04:23
역사게시판 공지가 무산 된 이후 게시판이 망가지면서
 
봉인이 풀린 것 마냥 그동안 수많은 유사역사가 올라 왔습니다
 
대놓고 환빠의 경우 상식의 차원에서 지양되다 보니
 
역사를 몰라도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지만 
 
대륙백제나 고구려의 숨겨진 역사 같은 경우
 
우리나라 역사의 사료 부족과 익숙한 민족주의등을 이유로 구분이 쉽지 않은게 현실입니다.
 
때문에 일반인을 상대로 한 낚시질도 용이하고 낚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최근 역사 게시판에 올라온 고구려 사초 같은 자료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설명 드리면 남당 박창화라는 분은 구한말 한학을 공부한 소설가로
 
역사관련에 조예가 깊어 역사 논문과 역사 소설을 많이 남긴 인물입니다.
 
박창화가 필사를 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의 경우
 
역사학계에서 지금도 진위 논란이 거세죠.
 
 
하지마 화랑세기와 달리 고구려 사초의 경우 학계의 관심은 커녕
 
위서 논란 자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1. 박창화 본인이 이미 한학에 조예가 깊고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말고는 전해 진 사서가 없음으로 참고할 서적이 없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고구려 사초가 역사라고 인정된다면 박창화가 쓴 소설들
 
을블대제기니 소수림대제기니 소설 역시
 
역사서겠죠 역사서 형식을 빌려왔다고 소설이 사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사례로 영조대왕의 유지를 발굴하고 썼다고 주장한
 
소설 영원한 제국 역시 역사서가 된다는 논리입니다
(물론 소설 말미에 창작이라고 밝히지만 그걸 안밝힌다고 모르지 않죠)
 
 
2. 삼국사기의 편찬 당시 김부식이 삼국사기 표를 통해 밝혔듯
 
당시에 전승된 모든 역사서를 참고했음을 밝히고 있으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 그가 국가의 감수국사로 모든 서적을 열람해 사서를 편찬했음에도
 
고려시대 중기에 이미 참고할 서적이 너무 부족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삼국사기의 절반 가량을 중국사서를 찾아서 부족한 부분을 채웠으며
 
유학자인 김부식이 유교에서 말한 합리적이지 않은 괴력 난신의 기이한 이야기는
 
역사가 아님으로 쓰지 않는다는 유교적 역사서술 방법인 춘추필법을 어겨가면서
 
삼국 건국신화를 기록하기 위해 신화까지 차용하여 기록하였을 정도입니다.
 
고려 중기 무렵 이미 삼국의 건국초기 기록이 신화형식만 전승될 정도로
 
삼국의 건국과정의 역사기록에 탈루가 심하였기에 건국과정의 기록을 보충하기 위한 차선책이었고
 
삼국유사가 이때 삼국사기에서 괴력난신을 이유로 건국과정 같은 중요부분만 기록되고
 
나머지 탈루가 된 기록의 멸실을 안타까워하며
 
괴력난신(신화적 전승)의 부분을 보충하여 삼국유사를 제작하게 되었음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고려 중기 말기의 상황이 이러한데 1천년이 지나
 
조선 말에 고구려의 초창기 역사를 무려 편년체 형식으로 세밀하게 기록한
 
사서가 나타났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내용이죠.
 
 
3. 고구려 사초가 아니라 하여도 박창화는 이미 유기를 위서로 제작한 바 있습니다.
 
고구려 사초와 비슷하게 고구려 초반기 역사를 소설로 만든 유기와
 
마치 발굴된 유기의 내용인 것처럼 고려시대 인물의 저작 형식으로 만든 두가지 판본이 발견된 바있습니다
 
한학자이자 소설가인 박창화가 고구려 초창기 관련 소설을 어떤 방식으로 제작했는지
 
알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죠.
 
고국원제기.png
* 박창화가 남긴 고구려 사초의 원본입니다. 고국원왕을 쓰다 왕이란 칭호가 뽀대도 안나고
 
맘에 안드니 맘대로 고국원제라로 중간에 고치고 이런식이죠..필자가 임의로 수정해 가며 쓰는 그런 글을
 
우린 사서라는 단어가 아닌 소설이란 단어로 지칭합니다.  
 
(사족 : 고구려는 환빠들 소망 처럼 열제니 대제니 이런 칭호로 왕을 안불렀습니다.
 
광개토 대왕비에서 나왔듯 " 태왕" 이라 자칭하였고 그 의미가 곧 만주와 한반도를 통치하는
 
천손의 아들로 황제입니다.)
 
 
 
4. 그리고 모든 일의 원인 삼국사기 불신론
 
 
이런 말도 안되는 소설이 역사서로 둔갑하는 것은
 
연원이 깊은 삼국사기 불신론 때문입니다.
 
 
일제시대 일본의 식민사학을 이끈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가 부정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역사서라고 폄훼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삼국의 건국 연대가 일본 야마토 보다 오래 되었고
 
임나일본부와 같은 기록이 삼국사기에서 부정이 되며
 
신라시대 초기 기록에선 일본을 해적 집단 수준으로 묘사한 사서를 두고
 
삼국사기가 부정확 하고 왜곡 된 사서라 그러하다는 논리였죠.
 
 
광복 이후 역사학계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그토록 힘들었습니다
 
일본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삼국사기 초기 기록만 불신한다란 절충에서 부터 시작한 연구가
 
이제는 초기기록 불신론도 극복을 하고
 
오히려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다른 사서를 비교하기 시작하고  
 
삼국사기를 통해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도 영향을 주는 단계에 오는데
(백제 수도 풍납토성의 발굴이 대표적 사례죠. )
 
5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어찌보면 민족사학의 쾌거라 할 수 있죠.
 
 
근데 재밌는게 거꾸로 다시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장하는
 
새로운 집단이 생겨났으니
 
소위 재야사학이라며 유사역사학을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정당화 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부정했듯
 
이들은 환단고기니 대륙백제니 등을 주장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부정합니다.
 
 
소위 김부식이 유교 사대주의자라 역사를 왜곡했다 이거죠.
 
이는
 
유교적 역사서술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물론 신채호가 일찍히 비판하였듯 김부식은
 
금나라에 사대를 하며 과거 나름 황제국을 지향한 
 
고려국의 위상과 달리
 
사대주의적 관점을 피력한 유학자입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김부식의 견해 역시 그런 역사관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죠
 
 
문제는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이고 그런 역사관을 가졌다는 것과
 
역사적 사실을 창작하고 왜곡한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유교적 역사관의 사대주의 사관 보다 중요한 가치가
 
공자가 유교를 창시한 이래 주장한 춘추필법으로
 
그 기본핵심이 "술이부작" 저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 입니다
 
 
유교를 배운이의 삶의 목표가 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에 있듯
 
역사에 대한 존중을 종교이념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유교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창작하는 행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단지 사료와 사초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을 저술하며
 
그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가치관을 담을 뿐이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영역이 아닙니다.
 
당연히 여기에 사대주의니 자주적이니 등 가치관의 논쟁은 될 지언정
 
사실의 존재 유무가 아닙니다. 
 
 
없는 역사를 창작하고 왜곡하는 건
 
거꾸로 근대 일본 식민사학자나 현대 환빠들이나 하는 짓이죠
 
 
김부식의 유교적 사관이란게 이러한데
 
사대주의자라 역사를 왜곡했으니 삼국사기는 믿을 수 없는 사서고
 
고구려 사초? 같은 서적이 진실된 역사를 담았다 주장하면
 
정말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하물며 김부식의 경우 진삼국사기표에서
 
삼국의 역사서 소실이 많아 참고할 서적이 없음을 토로하며
 
합리주의를 지향하는 유교적 가치관에 위배 되면서까지
 
우리가 아는 동명왕의 건국설화와 박혁거세의 설화와 같은
 
신화적 기술까지 부족한 기록을 보충한다는 목적으로 담았습니다
 
더불어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이란 것도 지나친 망상입니다.
 
 
유교의 사대주의가 중화사상이란 이념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것은 성리학 사상의 출현 이후고
 
한반도에 완전히 이식 된 것도 조선 중기 이후입니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가 대표적 사례죠
 
고구려 본기 백제 본기 신라본기라고 칭합니다.
 
사실상 황제국이란 의미죠.
 
제후국은 세가라 표현합니다.
 
 
조선 초기 명나라를 치자며 우리가 원나라, 금나라가 못 될게 무엇이냐 하던
 
패기 넘치던 조선 초 관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사에 조차
 
고려 세가로 표현하는데 삼국사기는 본기라고 칭합니다.
 
고려시대 외와내제의 표본을 찾자면 이런거겠죠
 
 
김부식의 사대주의는 천하의 질서를 논하는 것이고
 
유럽처럼 다국가의 세력균형이 아닌
 
중원을 차지한 1개국가가 동아시아 생산지대의 80% 인구의 90%를 점유하는
 
비대칭 구조의 국제질서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국제관이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근대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난하는 것이 오히려 지나친 평가죠.
 
 
삼국시기를 불신 하는 이유는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문헌 사료가 전무하다 싶은 한반도 역사에서 유일하며 또한 가장 오랜된 사료
 
삼국사기를 부정함으로써 한반도 고대사에서 문헌 사료의 공백을 주장하고
 
그를 통해 역사에 존재 한적 없는 왜곡된 주장을 펴기 위한 것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 주장을 위해 삼국사기를 부정했고
 
현대시대에는 한국의 환빠들이 유사역사학을 유포하기 위해 부정할 뿐이죠.
 
 
 
모두 역사학과 무관한 정치적 논리의 산물이고
 
역사에 해악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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