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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고구려사초 제 2세 광명(유류)대제기
게시물ID : history_252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ayDream2017
추천 : 3/12
조회수 : 1770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2/04 23:36:00

지난주에도 자료를 올렸는데 이 책이 위서라고 댓글을 다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비록 이 책이 삼국사기와 달리 어떻게 전해져 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는 하지만, 사대주의적인 삼국사기와 달리 이 책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표현하고, 또 삼국사기에서 전하지 않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게 장점이라고 볼 수 있네요. 

특히 고구려사초 제2대 광명대제 부터 제7대 태조황제까지의 기년은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는 삼국사기 태조왕 93년의 기록을 해결해주는 실마리가 될것이라고 믿습니다. 

즐겁게 감상하되 욕설과 폭언은 삼가해주세요,


第二世 光明大帝紀(광명대제기)

 

元年 壬寅 九月 葬先帝于龍山〈勃利之龍山〉 以遺命禁殉

阿爾妃生子都切

以禮后爲太后

원년 임인(B.C.19} 9월 선제(葬先)를 용산〈발리의 용산〉에 장사 지내고, 선제의 유명으로 따라죽는 것을 금하였다.

아이(阿爾)비가 아들 도절(都切)을 낳았다.

()후를 태후로 하였다.

 

十二月 烏伊黃龍王 摩離卑離王

12월 오이(烏伊)를 황룡왕(黃龍王)으로, 마리(摩離)를 비리왕(卑離王)으로 하였다.

 

二年 癸卯 正月 改元琉璃光明

再思太輔 陜父左輔主民大加 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主宮大加 屋智主穀 勾鄒主刑 都祖主藥 松義主賓 仇都主神

2년 계묘(B.C.18) 정월 연호를 유리광명(琉璃光明)으로 고쳤다.

재사(再思)를 태보로, 협부(陜父)를 좌보 겸 주민대가로, ()분노(芬奴)를 우보 겸 주병대가로, 고루(高婁)를 주궁대가로, 옥지(屋智)를 주곡(대가), 구추(勾鄒)를 주형(대가), 도조(都祖)는 주약(대가), 송의(松義)는 주빈(대가), 구도(仇都)는 주신(대가)로 하였다.

 

三月 閱水陸軍於河濱

3월 하빈(河濱)에서 수군과 육군을 사열하였다.

 

九月 與召后觀稼西河 而如溫湯 獲白獐

9월 소()후와 함께 서하(西河)에서 농사를 살펴보고, 온탕(溫湯)에 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

 

十月 鸞集新庭

10월 난새가 신정(新庭)에 모였다.

 

三年 甲辰 正月 以順奴奴爲沸流治 都彌鄒忽〈密山〉 以灌奴桂婁爲溫祚治 都牛壤 涓奴黃龍荇茶卑離上與召皇后治之 以慰召后之心

3년 갑진(B.C.17) 정월 순노(順奴)와 불노()는 비류에게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미추홀〈밀산〉, 관노(灌奴)와 계루(桂婁) 온조(溫祖)에게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우양(牛壤)으로 하였으며, 연노(涓奴)와 황룡(黃龍)과 행인(荇人)과 구다(句茶)와 비리(卑離)는 왕과 소황후와 함께 다스리도록 하여 소()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三月 納禾姬

3월 화희(禾姬)를 거두었다.

 

五月 與太后皇后如海山 鹽而還 東明神宮成

5월 태후, 황후와 함께 해산(海山)에 갔다. ()과 촉()을 지나서 돌아왔다. 동명신궁(東明神宮, 東明陵)이 완성되었다.

≪견해≫ 원문에 고구려사략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 있으므로 그에 맞추어 해석하였으나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七月 以松氏爲妃

作鶻川離宮 上與召皇后溫公主居之

汗南王溫祚入朝 請移都于尉那城〈鏡泊湖東〉 許之

7월 송씨(松氏)를 비()로 하였다.

골천(鶻川)에 이궁(離宮)을 지어, 왕이 소황후와 온공주(溫公主)와 함께 거주하였다.

한남왕(汗南王) 온조(溫祚)가 입조하여 위나성〈경박호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十月 溫公主崩 春秋二十 上減食二日 召皇后慰止之

10월 온공주(溫公主)가 나이 스물에 죽어, 왕이 이틀 동안 감식하였다. 소황후가 위로하며 그치게 하였다.

 

四年 乙巳 二月 勸耕 巡戍

4년 을사(B.C.16) 2월 농사를 권장하고,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을 순시하였다.

 

八月 劉河蚕師

8월 유하(劉河)를 잠사(蚕師)로 하였다.

 

九月 馬公主及雉姬入宮 平氏生女

9월 마공주(馬公主)와 치희(雉姬)가 입궁하였다. 평씨(平氏)가 딸을 낳았다.

 

十二月 芬奴伐北沃沮敦河〈皮盧肥場〉平之

12 ()분노가 북옥저(北沃沮) 돈하〈피노비장〉를 평정하였다.

 

五年 丙午 正月 以香公主妻高婁

5년 병오(B.C.15) 정월, 향공주(香公主)를 고루(高婁)에게 시집보냈다.

 

三月 紫蒙王涉臣女皐豆妻乙豆智 曼公主妻沸流

置車騎府

3월 자몽(紫蒙)왕 섭신(涉臣)이 딸 고두(皐豆)를 을두지(乙豆智)에게 시집보냈다. 만공주(曼公主)를 비류(沸流)에게 시집보냈다.

거기부(車騎府)를 두었다.

 

五月 互市溝婁〈雙山〉

5월 구루〈쌍산〉에 호시(互市, 국제교역시장)를 열었다.

 

八月 與召后勸稼西河 十羊五

8월 서하(西河)에서 소후(召后)와 농사를 돌아보고, (한사람 당) 양 열 마리와 돼지 다섯 마리씩 키우기를 장려하였다.

 

十月 大閱滸口〈呼蘭〉

10월 허구〈호란〉에서 병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六年 丁未 四月 增漢 而招一技者 厚祿給妻

爲松妃築豆谷行宮

6년 정미(B.C.14) 4월 한관(漢館)을 늘리고, 한 가지 기술에라도 있는자는 불러들여서 후하게 녹봉을 주고 짝도 지어 주었다.

송비(松妃)를 위하여 두곡(豆谷)에 행궁(行宮)을 지었다.

 

七月 拔盖馬城〈開魯〉 虜其王小噲 約貢牛馬

7월 개마성개로을 빼앗아, 그 곳의 왕 소쾌(小噲)를 사로잡았다. 소와 말의 조공을 약속하였다.

 

七年 戊申 正月 艴太子薨 四歲 皇后如汗南

7년 무신(B.C.13) 정월 불()태자가 네 살에 죽었다. 황후(소서노)가 한남(汗南)으로 갔다.

 

五月 解明生

上如汗南 迎后而歸 有魚遊詞

5월 해명(解明, 송비의 소생)이 태어났다.

왕이 한남(汗南)으로 가서 황후(소서노)를 맞이하여 돌아왔다. 어유사(魚遊詞)가 있다.

 

八年 己酉 五月 柴吉子昌特立

翊公主入宮

8년 기유(B.C.12) 5월 시길(柴吉)의 아들 창특(昌特)이 섰다.

익공주(翊公主)가 입궁하였다.

 

九年 庚戌 四月 田于箕山七日 得眞珠於桂后陵 返于凉谷〈鶻川 行宮〉 雉姬與禾姬相罵而去 雉鄭共女也 家在汗濱 上追止樹下 有黃鳥詞

9년 경술(B.C.11) 4월 기산(箕山)에서 7일 동안 사냥을 하다가, 계후(桂后)의 무덤에서 진주를 주워서 양곡골천 행궁으로 돌아왔다. 치희(雉姬)가 화희(禾姬)와 서로를 욕하다가 (친정으로) 돌아갔다. 치희는 정공(鄭共)의 딸이었고, (친정)집은 한빈(汗濱)에 있었다. 왕은 나무아래에서 추격을 멈추었다. 황조사(黃鳥詞)가 있다.

 

八月 素奴女可治妻羊太子

太輔大房良請退 不許

8월 소노(素奴, 비리왕)가 딸 가치(可治)를 양태자(羊太子)에게 시집보냈다.

태보 대방량(大房良)이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十年 辛亥 正月 沸流太輔

10년 신해(B.C.10) 정월 비류(沸流)를 태보로 삼았다.

 

四月 鍊于南口

解術生

4월 남구(南口)에서 군사를 훈련하였다.

해술(解術)이 태어났다.

 

十一年 壬子 四月 涉臣反 芬奴拔其都城〈昆都〉 臣南莽

雉姬鵲姬皆生女

11년 임자(B.C.9) 4월 섭신(涉臣, 자몽왕)이 반란하여, ()분노가 그의 도성〈昆都〉을 빼앗자, ()신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치희(雉姬)와 작희(鵲姬)가 모두 딸을 낳았다.

 

十三年 甲寅 正月 阿爾后崩 春秋三十三 后皇后前夫仇台女也 性溫慈貞敏 生都切太子及三公主

金蛙王殂 帶素立

13년 갑인(B.C.7) 정월 아이(阿爾)후가 춘추 서른셋에 죽었다. 아이후는 소황후(소서노) 전 남편 구태(仇台)의 딸이다. 성품은 온자(溫慈, 부드럽고 인자함)하고 정민(貞敏, 마음이 곧고 총명하고 민첩함)하며, 도절(都切)태자와 공주 셋을 낳았다.

금와(金蛙)왕이 죽어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十四年 乙卯 正月 都切如柵城 娶帶素女

14년 을묘(B.C.6) 정월 도절(都切)이 책성(柵城)으로 가서, 대소(帶素)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七月 溫祚立柵于漢山 以再思公主妻之

7월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에 목책을 세웠다. 재사공주(再思公主)를 온조에게 시집보냈다.

 

十月 帶素引五萬軍入寇松江〈通江〉 大雪七日 凍死者十九 悔不聽解素之諫

10월 대소(帶素)가 군사 5만을 끌고 와서, 송강〈통강〉에서 노략질하다가 7일 동안 큰 눈을 만났다. 얼어 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었으며, 해소(解素)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十九年 庚申 八月 託利斯卑傷逸豕于長屋澤〈小興湖〉 命坑之而不豫 皇后與巫跌禱謝之

武骨左輔 高婁右輔

19년 경신(B.C.1) 8월 탁리(託利)와 사비(斯卑)가 장옥택〈소흥개호〉에서 달아난 돼지를 상하게 하였다. 그들을 땅에 묻으라고 명하였으나, 왕이 편안하지 못하여, 황후와 무당이 지나쳤음을 사죄하여 빌었다.

무골(武骨)을 좌보로, 고루(高婁)를 우보로 삼았다.

 

二十年 辛酉 正月 都切太子自柵城歸 未幾薨 帶素自愧其失而還都切 而留其女故都切悲傷不起

20년 신유(A.D.1) 정월 도절(都切)태자가 책성(柵城)에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대소(帶素)는 그의 실수를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도절을 돌려보냈으나, 대소의 딸을 머무르게 한 연유로 도절이 슬퍼하며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견해≫ 도절은 임신한 대소의 딸과 함께 고구려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것 같다. 이 때에 도절이 죽었다면 도절의 자식이라도 돌려주어야 옳은 일은 아닐까?

 

五月 沸流薨 年三十七 上減食以慰皇后 以阿爾女眞公主妻沸流子 曼公主改嫁于都助 陜父太輔 太輔大房良薨 年八十二 賜其妻穗公主年穀

5월 비류(沸流) 37살에 죽었다. 왕이 감식하여 황후(소서노)를 위로하였다. 아이(阿爾)의 딸 진공주(眞公主)를 비류의 아들 양인()에게 시집보냈다. 만공주(曼公主)가 도조(都助)에게 개가(改嫁)하였다. 협보(陜父)를 태보로 삼았다. 태보 대방량(大房良) 82살에 죽었다. 대방량의 처 수공주(穗公主)에겐 매년 곡식을 내리도록 하였다.

 

二十一年 壬戌 艴奴掌牲薛支逐逸豕 至國內尉那岩〈烏屯河古城同〉 見麋鹿魚富裕 宜五穀 多茂林大樹藥泉神山 以爲可都之地 三月 謁上 請建都

21년 임술(A.D.2) 불노(艴奴, 발노 혹은 절노)부의 희생물을 관장하는 설지(薛支)가 도망간 돼지를 좇아 국내(國內) 위나암〈오둔하 고성동〉에 이르러, 고라니와 사슴(麋鹿)와 물고기가 부유(富裕, 풍성하고 넉넉함)하고 오곡(五穀)이 알맞으며 나무가 우거지고 큰 나무가 많으며 약천(藥泉)과 신산(神山)이 있음을 보고, 도읍으로 하기에 적당한 땅이라 하여, 3월에 왕을 알현하여 도읍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견해≫ 설지(薛支)의 출신지인 불노(艴奴, 발노 혹은 절노)부를 언급하는 것은 천도(遷都)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불노(艴奴, 발노 혹은 절노)부는 소서노의 졸본(卒本)을 의미한다.

 

四月 畋于尉中林〈在尉那岩近地〉 與皇后相都于國內〈解慕漱與柳花相逢故曰國內〉

4월 위중림〈尉那岩과 가까운 땅〉으로 사냥을 나가서, 황후(소서노)와 함께 국내〈解慕漱와 柳花가 만났던 곳이어서 國內라 한다.에 가서 도읍을 할 곳인지를 살펴보았다.

 

≪견해≫ 소서노의 사망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서 애매하게 기록하였다.

 

九月 與皇后又如國內熊心〈金山〉合歡〈吉祥〉尉那岩等地 而仍遊沙勿澤〈湍湖〉 訪隱者位沙勿于澤畔石上 載而歸 皇后曰 “山間賤夫 何用乎” 上曰 “不然 伊尹呂尙皆此類也” 以玄公主爲鵲太子妃

再思公主生溫祚子多婁

9, 황후(소서노)와 함께 또 국내(國內)의 웅심(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만난 곳)〈금산〉, 합환〈길상〉, 위나암(尉那岩) 등의 땅을 살피러 갔다가, 사물택〈단호〉을 놀러가서, 은거하고 있던 사람 위사물(位沙勿)을 택반(澤畔, 못 가에 있는 약간 평평하게 된 땅)의 바위에서 만나 (수레에) 태우고 돌아왔다. 황후가 말하기를 “산 속에 사는 미천한 사내를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이윤(伊尹, 湯을 도와서 夏를 멸하고 殷을 세운 재상)이나 여상(呂尙, 姜太公)도 이와 같은 사람이었소.”라고 하였다.

()공주를 작()태자의 비로 삼았다.

재사(再思)공주가 온조(溫祚)의 아들 다루(多婁)를 낳았다.

 

二十二年 癸亥 十月 移居尉那岩 是爲北都 作新宮於銀川岺下

22년 계해(A.D.3) 10월 위나암(尉那岩)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곳이 북도(北都). 은천령(銀川岺) 아래에 신궁(新宮)을 지었다.

 

十二月 田于質山陰〈綏化〉五日不返 陜父諫 曰 “天子之畋在於鍊兵 今風雪如此 暴露 獵騎而行樂可乎” 上以陜父初附於沸流 有蘊意 至是罷之 陜父以瓢浮海入新羅

12월에 질산음〈수화〉에서 5일 동안 사냥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협부(陜父)가 간하여 말하기를 “천자가 사냥을 함은 병사를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풍설(風雪)이 이와 같은데 눈과 바람에 노출되어 말을 타고 사냥함이 가히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협부가 처음에 비류(沸流)에게 붙어서 (마음속에) 쌓여 온 것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파면하였다. 협보는 표(, 바가지)로 해(, 바다, 나라, 호수, 크다)를 건너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견해≫ 1. 협부의 간언은 구구절절이 옳은 이야기이다. 사냥에 동원된 병사들의 불만을 대신하여 이야기 하였을 뿐이므로, 파면한 것이 잘못이 있다고 지적해 오던 바이다.

 

         2. 협부는 고구려의 건국공신으로 추종세력도 만만치가 않았을 것이다. 협부가 고구려를 등지고 망명하였을 경우 그 일족에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므로 일족의 안전을 위하여 자살하지 않고 신라도 떠난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협부는 추모의 용양군(龍陽君)이어서 소서노가 미워했다고 한다.

 

二十三年 甲子 二月 以解明爲東宮 算十七 母松后夢鸞乘日而出 性英明好勇 形皃亦多肖上 故以皇后女珍公主妻之 大赦國中

松后生無恤于銀川新宮 朱光留室 故名宮曰朱留 白鶴盤回岺上 故名岺曰鶴盤

鵲太子浮海入新羅

23년 갑자(A.D.4) 2, 해명(解明)이 나이 17세로 동궁이 되었다. 어머니 송후(松后)가 난새가 떠오르는 곳으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 성품은 영민하고 총명하며 씩씩하였으며, 얼굴 또한 왕을 많이 닮았다. 그런 연유로 황후의 딸 진공주(珍公主)를 시집보냈다. 나라 안의 죄수들을 널리 사면하였다.

송후(松后)가 은천(銀川)의 신궁(新宮)에서 무휼(無恤)을 낳았다. 붉은 빛이 실내에 머물렀다하여 궁의 이름을 주류(朱留)라고 하였다. 흰 학이 고개 위를 선회하였다고 하여 고개 이름을 학반(鶴盤)령이라 하였다.

작태자(鵲太子)가 해(, 바다, 나라, 호수, 크다)를 건너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二十四年 乙丑 九月 田于箕山 得羽澤 妻以鱒公主 有畜獸才

24년 을축(A.D.5) 9월 기산(箕山)에서 사냥하다가, 우택(羽澤)이라는 사람을 얻어 준공주(鱒公主)를 시집보냈다. 짐승을 길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二十六年 丁卯 四月 解邑朱生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遣兵及粮于溫祚 以助伐韓 三年

26년 정묘(A.D.7) 4월 해읍주(解邑朱)가 태어났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땅으로 옮겨 살았다.

대소(帶素)의 형제 8명이 재위를 다투며 서로를 죽였다.

온조에게 병사와 군량을 보내서 한(, 마한)의 정벌을 도왔다. 3년 동안 이어졌다.

 

≪견해≫ 통설은 온조가 마한연방을 일시에 정벌할 능력이 없었으며, 마한의 우두머리가 되는 나라를 병합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유리가 만약 온조에게 병사를 보내어 백제의 마한 정벌을 도왔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백제를 도운 일을 해명(解明)이 반발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二十七年 戊辰 三月 賜解明死 是年二十一 黃龍王烏伊以弓授解明 解明折之 曰 “非我有力也 弓自不勁” 烏伊大慙 皇后奏 曰 “解明不愛其妻 而侮辱國老 陛下何不責之” 上乃召解明責之 曰 “不愛珍女 違父母也 侮辱國老 輕社稷也 交通後宮 淫亂之兆也 寧其生不若死” 解明悲憤 立槍於礪津〈八虎力河支流〉而死 國人哀其好勇而死

新羅以女妻鵲太子

溫祚遷都漢山〈安圖〉

27년 무진(A.D.8) 3월 해명(解明)에게 죽음을 내렸다. 이해 21살이었다. 황룡왕(黃龍王) 오이(烏伊)가 보궁()을 해명에게 주었는데, 해명이 활을 부러뜨리며 말하기를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고 활이 튼튼하지 못하오.”라고 하였다. 오이가 크게 참담해 하였다. 황후가 아뢰어 말하기를 “해명은 자기 처 (진공주)를 아끼지 않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하였는데도, 폐하는 어찌하여 해명을 꾸짖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해명을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진(공주)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함이요, 나라의 노신을 모욕함은 사직을 가벼이 여김이요, 후궁들과 교통(交通, 서로 사귐)함은 음란할 징조이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해명은 슬프고 분하여, 여진〈팔호력하 지류〉에서 창을 세워 자진하였다. 나라사람들은 용감하게 죽음을 슬퍼하였다.

신라(新羅)가 왕녀를 작태자(鵲太子)에게 처로 주었다.

온조(溫祚)가 한산〈안도〉로 천도하였다.

 

≪견해≫ 1. 통설은 해명(解明)에게 죽음을 내린 유리왕을 석연치 않게 보고 있다. 위의 글에서는 유리가 해명에게 죽음을 내린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2. 고구려사초에는 작태자(鵲太子)를 탈해(脫解)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년상의 문제로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신라의 석()씨 계보는 고구려 작태자(鵲太子)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옮겨 적었다.

 

七月 都助太子薨 年二十四 解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松讓 妄自誇張 累被叱責 見解明之死 慾爲東宮 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曰 “在自修 而不在請” 煩悶自焦 觸暑而吐歐 不起 時人曰 “勇亦死 懦亦死”

7월 도조(都助)태자가 24살에 죽었다. 해명(解明)의 동복형으로, 성품은 외조부 송양(松讓)을 닮아서, 망령되이 자신을 과장하다가 여러 번 꾸짖음을 받았다. 해명이 죽은 것을 보더니 동궁이 되고자하여, 자기 처 만공주(曼公主)로 하여금 왕에게 청하라고 하였다. 만공주가 말하기를 “(동궁자리는) 스스로를 닦음에 있는 것이지, 청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번민하여 스스로 불타오르더니, 더위를 느끼자 토하고 게워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용감해도 죽고, 나약해도 죽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二十九年 庚午 六月 赤蛙攻黑蛙于茅川〈葦沙河〉 鏖之 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來朝而去

鵲太子爲新羅太輔

29년 경오(A.D.10) 6월 모천〈위사하〉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여, 격렬하게 싸웠다. 사람들은 대소(帶素)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

재사(再思)공주가 내조하였다가 돌아갔다.

작태자(鵲太子)가 신라의 태보가 되었다.

 

三十一年 壬申 七月 漢人田譚與索頭相爭 請救於勾鄒 勾鄒使延丕〈召后侄子〉擊譚殺之 嚴尤來寇 虜其將卒二千餘 馬仗無數 印顆十二 拓地七百餘里

31년 임신(A.D.12) 7월 한인(漢人) 전담(田譚, 新 遼西大尹)이 색두(索頭)와 싸우다가 구추(勾鄒)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구추가 연비(延丕)〈소후의 조카〉를 보내서 전담을 쳐서 죽였다. 엄우(嚴尤)와서 도적질하기에, 엄우의 장졸 2천여 명을 사로잡고, 노획한 말과 병장기가 셀 수 없었으며, 인과(印顆) 12개에 넓힌 땅이 7백여 리였다.

 

≪견해≫ A.D.14년 기사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十月 以公主妻乙豆

10월 양공주(公主)를 을두지(乙豆智)에게 시집보냈다.

 

三十三年 甲戌 正月 以無恤爲東宮 敎以弓馬用兵之術

33년 갑술(A.D.14) 정월 무휼(無恤)을 동궁으로 삼고, 활쏘기와 말 타기와 용병술을 가르쳤다.

 

七月 以豆公主妻高婁

7월 두공주(豆公主)를 고루(高婁)에게 시집보냈다.

 

八月 烏伊領兵二萬伐涉臣 拔勾麗城 虜涉臣而歸 紫蒙十二國悉平

8월 오이(烏伊)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섭신(涉臣, 자몽왕)을 쳐서 구려성(勾麗城)을 빼앗고, 섭신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자몽(紫蒙) 12국을 모두 평정되었다.

 

≪견해≫ A.D.12년 기사와 연결된다.

 

十月 摩離亦引兵二萬 拔貊窟貝沙〈海拉爾 南屯〉而還

帶弗殺帶素而自立〈弗帶伯之子 一作金蛙子〉

10월 마리(摩離)가 군사 2만을 이끌고 맥()의 소굴 패사(貝沙)〈해랍이 남둔〉를 빼앗아 돌아왔다.

대불(帶弗)이 대소(帶素)를 죽이고 자립하였다.〈대불은 대백의 아들이다. 어떤 책에는 금와의 아들이라고 한다.

 

三十七年 戊寅 四月 解術溺死礪津 祭須尋其尸 葬王骨岺〈八虎力下畔向陽山〉

37년 무인(A.D.18) 4월 해술(解術)이 여진(礪津)에서 익사하였다. 제수(祭須)가 그 시신을 찾아, 왕골령(王骨岺)〈팔호력하반향양산〉에 장사를 지냈다.

 

七月 烏伊薨 得子毛獜立 伊之婿也

7월 오이(烏伊)가 죽어 보득(, 황룡왕)의 아들 모린(毛獜)이 섰다. 모린은 오이의 사위다.

 

≪견해≫ 여기서부터는 고구려본기와 기년이 다르다.

 

三十八年 乙卯 正月 北都大震 移于東都

居太

38년 을묘(A.D.19) 정월 북도(北都)에 큰 지진이 있어, 동도(東都)로 옮겼다.

묵거()를 태보로 하였다.

 

三十九年 庚辰 三月 立東明神廟于龍山中岺〈勃利廟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 以蘚兩公主妻多婁 而賜正胤冠 以爲汗南傳國之璽

39년 경진(A.D.20) 3월 룡산(龍山) 중령(中岺)〈발리묘령〉에 동명신묘(東明神廟)를 세웠다.

재사(再思)공주와 다루(多婁)가 입조하여, ()과 백() 공주 둘을 다루에게 시집보내고, 정윤관인(正胤冠)을 주어 한남(汗南)의 전국옥새(傳國玉璽)로 삼게 했다.

 

≪견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A.D.10년에 이미 온조가 다루(多婁, 감아의 아들로 혹은 馬婁라고도 함)를 태자로 봉한 기록이 있음에도 여기에 다시 백제의 태자를 봉하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인지 의심하여야 한다.

 

만약 고구려왕이 백제의 태자를 정하여 주었다면 백제내분이 촉발되거나,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온한 기사만 등장하는 것은 유리의 사망으로 온조가 고구려의 왕으로 등극하였으며, 온조가 자신의 직할령을 다시 재사(再思)공주의 아들 다루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九月 田于骨句川〈遜河〉 東宮得神馬 狀如巨婁 上曰 “東明復興之兆”

9월 골구천(骨句川)〈손하〉에서 사냥하다 동궁이 거루(巨婁)를 닮은 신마를 얻었다. 왕이 말하기를 “동명(東明)이 부흥할 징조로다.”라고 하였다.

 

十月 扶余獻赤烏一頭二身

10월 부여(扶余, 동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견해≫ 동부여가 고구려와 백제의 하나 됨을 축하하는 선물을 보낸 것이다.

 

四十年 辛巳 二月 摩離薨 子義鹿立 其母素奴女也

40년 신사(A.D.21) 2, (비리왕) 마리(摩離)가 죽어, 아들 의록(義鹿)이 섰다. 의록의 어머니는 소노(素奴, 비리왕)의 딸이었다.

 

四十二年 癸未 十一月 帶弗來侵 大破其軍於鶴盤岺下.

42년 계미(A.D.23) 11월 대불(帶弗)이 쳐들어 왔기에, 그 군대를 학반령(鶴盤岺, 무휼의 출생지) 아래에서 크게 깨뜨렸다.

 

四十四年 乙酉 二月 高婁太輔 松義左輔 乙豆智右輔主兵

44년 을유(A.D.25) 2월 고루(高婁)를 태보로, 송의(松義)를 좌보로, 을두지(乙豆智)를 우보 겸 주병(대가)로 삼았다.

 

四十七年 戊子 八月 太后崩 春秋八十五 葬於豆谷東原

47년 무자(A.D.28) 8 ()태후가 춘추 85세에 죽어, 두곡(豆谷) 동원(東原)에 장사를 지냈다.

 

十月 上與皇后 崩于豆谷離宮 上春秋六十八 皇后八十三 皆葬于太后陵內 東宮卽位於豆谷離宮

10월 왕과 황후가 두곡(豆谷) 이궁(離宮)에서 죽었다. 왕은 춘추 68세였고, 황후는 춘추 83세였다. 모두 태후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 동궁이 두곡이궁에서 즉위하였다.

 

≪견해≫ 유리왕의 배우자인 황후(皇后)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으나 추모경에 나와 있는 소서노의 나이와 같고, 백제왕기와 삼국사기 백제본기 소서노의 사망시기와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 해에 온조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論曰 “光明嚴毅 少許謹於守成 勸於擢才 治天下四十年 兵精粮足 可謂賢矣 陜父解明召后之事 皆有欠焉”

찬자는 “광명(光明)은 엄숙하고 굳세어 수성(守成)함에 삼가 함이 적었으며, 인재 발탁을 권장하여 천하를 40년간 다스렸다.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풍족했으니 가히 현명하다 할 만하였다. (다만) 협부(陜父), 해명(解明), 소후(召后)의 일에는 모두 흠결이 있었다.”라고 생각한다.
출처 http://cafe.daum.net/sijeong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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