辻 政信 (つじ まさのぶ) 1902년 10월 11일 ~ 1961년 7월 20일
대한독립군 비밀공작요원 2호 구 일본군 장성. 무다구치 렌야와 함께 인간 과부제조기
생긴것과 같이 똘끼가 매우 충만한 첫손에 꼽히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다.
계파적으로 이시하라 칸지의 영향을 받아 만주국의 건국이념인 오족협화를 실제로 믿고 있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는 줄곧 '작전의 신'이라고 불렸는데, 이게 자칭 신이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목차
1 경력
2 근성론과 활약(?)상
2.1 노몬한 전투(할힌골 전투)
2.2 싱가포르 전투
2.3 필리핀
2.4 과달카날 전투
2.5 패전 후 활약
2.6 정계 진출 후의 활약
3 주변인들이 본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
3.1 태평양 전쟁 당시의 평가
3.2 '개인'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
4 종합적인 평가
1 경력 ¶
당시의 최신식 학문기관이던 육군대학을 3등으로 졸업하였고, 수많은 정치적인 위기와 파벌 싸움속에서도 자신의 입장과 권력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수완가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가 입장과 권력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패전이 확실시 되자 츠지 마사노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것이란 설이 중론이다.
그가 공식적으로 남긴 말과 행보를 볼 때 출세길에 오르기 위해 남을 이용하고, 모략을 꾸미는 전형적인 권력지향형 인간이었던 점은 사실인 듯하다. 츠지 노유의 고향에는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흠좀무.
2 근성론과 활약(?)상 ¶
상식을 무시한 채 근성을 강조하였는데,
"일본군의 정신력은 대단하고, 적군은 나약한 정신력을 가졌기에 백전백승한다."라는 주장을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계속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정신승리와 근성론은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군의 행동양식이지만
츠지 마사노부가 그 시초이자 일본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기에 근성론 = 츠지 마사노부로 통한다.
2.1 노몬한 전투(할힌골 전투) ¶
츠지 마사노부 : 근성으로 돌격한다!
일선 지휘관들: 평원에서 닥돌이라니 이건 미친 짓이야. 당장 작전 수정해야 해.
츠지 마사노부: 닥쳐.
지휘관들의 이의가 수차례 건의되었지만 결국 작전은 실행되고야 말았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참패.
일본군은 다진 고기가 돼서 들판에 거름으로 뿌려졌다. 덤으로
그 당시 소련군 지휘관은 소련군 장성중에서도 개념인으로 유명한 게오르기 주코프.
그런데, 츠지 마사노부는 패전을 보고하면서
"소관의 작전계획은 완벽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와 감투정신의 부재로 패전."
이라고 대본영에 보고한다.
결국 일선부대 연대장이 줄줄이 할복 자살. 일부 일본군 병사들(부사관과 장교 포함)은 처벌이 두려워 탈영하고
몽골-만주 일대의 마적단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처벌이 두려워 송환을 거부하고 소련에 남은 포로들도 있다고 할 정도.
일본군 다수가 탈주한 뒤 마적이 된 사태에 대해 조사가 진행되었고,
원인을 제공한 츠지 마사노부는 좌천당한다.
애초에 일본 육군의 주적은 소련이었고 모든 전략과 작전계획 등의 무게가 북방에 있었다.
남방은 말그대로 오지였었는데... 남방으로 좌천된 츠지는 남방에서의 작전계획을 마련하는 등 열심히 일을 해 놓았고
추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은 부랴부랴 남방작전을 준비했는데
그게 다 츠지가 짜 놓은 계획이었고 결국 일본 육군은 초반의 남방작전계획을 전적으로 츠지에게 의지했고
그게 초반에 싱가포르등을 함락시키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2.2 싱가포르 전투 ¶
노몬한 전투 이후 한직으로 내쫓겼다
천운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싱가포르와 말라야를 침공하던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25군에 참모로 임명되고
근성론을 앞세우며, 대한 독립을 위해 활약하기 시작한다.
'작전의 신'이란 말을 공개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상관인 야마시타 토모유키가 얼마나 츠지에게 학을 떼었는지 후에 본인이 일지에 썼다는 인물평이 가관이다.
"츠지 중령은 제일선에서 돌아와 사견을 늘어 놓으며 여러 말이 많다.
이 남자는 고집이 세고 잔재주가 능한 교활한 자라서 국가의 큰 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소인이다.
이 남자에게 일을 시키려면 조심해야 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남긴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는 '교활한 인간' 이었다.
마사노부에게 큰 일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보아 야마시타의 평가는 매우 적절했으나,
도조 히데키는 이런 평가에 상관없이 마사노부를 중용했고 이는 뒤에 큰 파멸을 불러온다.
2.3 필리핀 ¶
야마시타 토모유키의 간청에 필리핀 14군으로 파견나간 작전의 신.
여전히 근성을 외치는 지휘를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14군 전체에 "미군 포로를 처형하라."라는 구두명령이 발신된다.
아무리 일본군이 포로 학대니 뭐니 악명이 높아도, 일단 당시 일본군의 방침은 포로의 생포였는데,
갑자기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의구심을 품은 대령 하나가 문서로 기록 된 공식적인 명령을 상부에 요구하게 된다.
갑자기 날아든 명령확인 요청에 작전본부(대본영)은 "그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라는 답변을 하게 되고
14군 내의 자체조사결과 츠지 마사노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포로의 감시를 엄중히 하라."란 명령을
포로 학살로 왜곡하여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명된다.
포로 학살 명령이 파견온 아저씨의 개소리란 것에 놀란 14군은 명령을 즉시 철회하지만,
이미 '죽음의 바탄 행진'(물과 식량을 주지 않고 연합군 포로와 난민들을 다른 포로 수용소를 향해 행군시켰으며 탈락자는 총살했다)이 터지고 난 뒤라 10,000여명의 포로가 사망했다.
전쟁이 끝난 뒤 당시 14군의 사령관 홈마 중장은 죽음의 행진후 죄책감에 전역했는데요
바탄 행진이 일어나는 상황을 방치하였다는 죄로 전범 재판결과 총살형에 처해졌으나,
공식적인 개입이 확인 되지 않은데다 숨어있던 츠지 마사노부는 기소조차 되지 않아 전범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케하는 시비거리 중 한가지로 남았다.
2.4 과달카날 전투 ¶
과달카날 전투는 이미 이치키 지대의 1차 공격이 전멸로 끝난 상태였기에
대본영은 전황 파악을 위하여 작전의 신인 츠지 마사노부를 과달카날로 파견한다.
가와구치 소장의 필사적인 2차 공격마저도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말려 패배한 상태에서
츠지 마사노부는 "근성으로 험난한 밀림을 빠르게 돌파한 후 대원 모두 착검한 채 야습한다."란 근성론을 기반으로 한 계획을 세운다.
2차 공격에서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경험한 가와구치 소장은
"이런 정신나간 계획은 전멸을 불러올 뿐이다."라며 좀더 합리적인 작전계획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미군은 비행장에서 테니스나 치면서 놀고 있고 가와구치 소장은 감투정신이 부족하여 소극적인 지휘를 한다."
라고 대본영에 보고하여 가와구치 소장은 본국으로 송환되고,
츠지 마사노부의 지휘로 이루어진 '야밤에 반자이 어택' 은 전멸로 끝난다.
태평양 전쟁 이후 작성된 미군의 문서에는 과달카날 전투에선 가와구치 소장의 2차 공격만이 미군에게 실로 지대한 위협이었다고 평가했다.
근데 멀리서 '돌격!'을 외치던 츠치 마사노부는 최전선에서 굶어 죽는 병사들을 보자
"あれは餓島だ(여기는 굶주림의 섬이다)",
"길가에는 텅 빈 반합을 손에 쥔 채로 굶어 죽은 병사들이 무더기로 썩어가고 있다"
라고 대본영에 보고하면서 철수를 주장했다고. 뭥미?
2.5 패전 후 활약 ¶
방콕에서 마지막 패전 소식을 들은 뒤, "나는 민족의 재건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잠적했다.
그런데 1946년 9월에 태국의 라마 8세가 의문의 총기 폭발 사건으로 죽었는데 탈출을 위해 츠치 마사노부가 관여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 주장은 라마 9세의 협조를 받아 사건을 조사한 윌리엄 스티븐슨이 "혁명의 왕"이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다만 츠지 마사노부 본인의 책인 "잠행 3천리"에선 이미 1945년에 태국을 탈출했으며,
라마 8세가 죽은 시점에는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있던 사람이 방콕으로 돌아와서 라마 8세를 살해한다는것은 이상하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
라마 9세가 자신의 개입을 숨기려고 윌리엄 스티븐슨을 이용해 츠지 마사노부가 라마 8세를 죽였다는 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긴 하다.
어쨌든 이후 전범 시효가 풀릴 때까지 은거해오다 시효가 풀리자마자 언론사에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기사를 내줄 것을 요구하며 일본으로 귀국했고,
태평양 전쟁 당시 자신의 눈부신 활약(헛소리들)을 책으로 써내 큰돈을 벌었고 이 돈을 선거자금으로 하며 정계로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2.6 정계 진출 후의 활약 ¶
그딴게 있을거 같아? 그냥 저냥 세월만 보내다가 61년 캄보디아로 여행간 후 실종된다.[1]
단, 이게 단순한 관광 여행이 아니라,
당시 한참 격화되는 베트남전과 관련해서 2차 대전 때 자신이 깔아놓았던 비선조직들을 챙겨
모종의 일을 저지르려다가 미국 or 소련 or 중국의 손에 제거당했다는 가설이 설득력이 높다.
유력한 것은 라오스 반군들의 손에 죽었다는 설.
3 주변인들이 본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 ¶
3.1 태평양 전쟁 당시의 평가 ¶
태평양 전쟁 당시 동료 장교들에게...
"상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매도하기 일쑤다."
"지휘관의 명령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독단 전횡을 저지른다."
란 평가를 받았으며, 특이하게도 도조 히데키는
" 장래에 국군의 요직을 충분히 떠받칠 수 있는 인물" 이라고 평가했다.
도조 히데키의 안목? 무다구치 렌야 따위가 심복이었는데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3.2 '개인'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 ¶
이런 막장 행보와는 달리, 놀랍게도 츠지 마사노부 개인에 대한 평가는 꽤 높은 편이다.
깔끔한 용모에 친절하고 심지 곧은 성격을 가지고 있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언제나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말도 안돼.
실제로 태평양 전쟁에선 항상 전선에서 현장의 분위기를 살피고 [2]
일선 병사들에게도 자주 나타나 병사들의 생활고충을 듣고 사치를 부리는 부하 장교들을 벌 하는 등 모범적인 장교의 모습을 보였는데
이 행동에 대해 동료 장교들은 시찰을 나가고 병사의 상담을 자처하는 츠지 마사노부의 행동을 기행으로 취급하여
개인적인 처신과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크게 다르다는 사례를 남기었다.
초급장교 코스를 밟으며 중대장으로 있을 땐 부대원들이 그를 신처럼 숭배햇단 일화가 전해지며,
훈련중 낙오한 중대원을 들처업고 대신 소총을 들고 돌격한 일화도 있다.
일본군에서 참모는 전선시찰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츠지는 예외로 전장시찰을 직접나가고 부상도 여러차례 입는 등[3] 야전부대에서의 평가는 매우 높다.
또한 25군의 직속 상관이던 참모장 이케타니 한지로는 "일반병들을 잘 대해주니 최전선의 사단 참모로 굴리면 딱이다."라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4 종합적인 평가 ¶
"무능하면서 성실한 지휘관은 유능한 적군보다 더 악랄한 적이다."
어느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개인'의 정의와 목표에 지나치게 얽매였고
나아가선 도모한 일이 실패할 경우 책임을 지지 않는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책임감 없는 이상주의자.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은 직간접적으로 수만은 된다.
종전후 작성되어 2005년경 공개된 CIA 극비문서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는 남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만화 지팡구에도 등장하는데 역시나 여기서도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답게 근성론을 부르짖는다.
"물량이 제한적인데 반해 인간의 정신력은 무한하다"
"필승의 신념이야말로 우리 야마토 민족의 최대 무기"
라는 병맛 넘치는 대사가 그것.
그런데 쿠사카가 츠지 마사노부 머리에 권총을 들이밀며
'그 필승의 신념으로 이 총알을 피한다면 무한한 정신의 능력을 인정하겠다' 라고 하자 바로 버로우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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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다가 1968년 사망처리 된다.
[2] 노몬한 사건 직전 당시 관동군 참모부가 참모들에게 적정시찰을 지시하면 츠치의 보고가 가장 세밀했다고 전하며, 흑룡강 부근의 조사 임무를 맡았을 때는 직접 헤엄쳐 조사했다고 한다(…).
[3] 자신의 몸에는 소련, 미국, 영국, 중국의 총탄이 다 들어있다고 말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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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엔하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