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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승부조작과 싸운 사내' 서생명, 넋이 돼 한국을 찾다
게시물ID : baseball_1168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좋은연인
추천 : 2
조회수 : 40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7/21 10:59:13
한국화장품 에이스, 서생명을 추억하다

1958년생 쉬셩밍은 타이완 문화대학 야구부에서 에이스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타이완 육군 야구부에서 복무한 뒤, 1984년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 입단해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제대 후 남편이 ‘웨이치엔’이란 팀 소속으로 활약했는데, 한국화장품과 자매결연을 한 관계였어요.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란 소문을 들은 강태정 감독님이 관심을 보였고, 스카우트를 제의해서 한국에 오게 됐죠.” 시에롱야오 씨의 말이다. “당시만 해도 타이완엔 프로야구가 없어서, 잘하는 선수 대부분은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했어요. 한국에 진출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죠. 남편이 타이완 출신으로는 한국야구 1호 선수일 거예요.”
 
당시 쉬셩밍의 한국행은 아내 시에롱야오 씨의 강력한 권유로 이뤄졌다. “대신 조건을 걸라고 했어요. 한국에 가면 선수 생활을 하며 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게 해 달라는 조건이었어요. 당시 타이완에는 프로가 없었기 때문에, 선수 은퇴한 뒤의 삶이 막막했거든요. 그래서 은퇴 이후 교사를 하기 위해, 중앙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등록해 학업을 병행하게 됐죠. 한편으로는 남편의 한국행을 계기로 후배 타이완 선수들의 한국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시에롱야오 씨의 말이다.
 
결국 쉬셩밍은 결혼 5일 만에 한국에 왔고, 한국화장품 선수가 됐다. 한국에서 4년간 생활하면서 첫 아이도 얻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어요. 아들은 지금 미국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고, 딸은 타이완에서 중학교 영어 교사로 일해요. 부모에게서 조금은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하하.” 시에롱야오 씨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당시로써는 생소한 너클볼에 140km/h대 빠른 볼을 앞세워, 쉬셩밍은 빠르게 실업야구 정상급 투수로 올라섰다. 입단 첫해인 1984년 실업리그 최우수투수를 수상했고, 1985년엔 여름철리그에서 3승-가을철리그 5승을 올려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6년에도 봄철대회 우승과 가을철리그 최우수선수상, 1987년엔 여름철대회 우승과 서라벌기대회 우수투수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마지막 해인 1988년에도 한국화장품을 여름철리그 정상에 올렸다.
 
1980년대 중반은 프로야구가 탄생하고 실업야구가 서서히 저물어 가던 시기였지만, 한국화장품은 그 어느 팀보다 화려한 멤버를 자랑했다. 강태정 감독을 비롯해 양상문, 김재박, 강기웅, 노찬엽, 이효봉 등이 쉬셩밍과 한솥밥을 먹었고 유영준 NC 다이노스 단장도 포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실업리그에서의 빼어난 활약에도, 쉬셩밍은 한국프로야구 선수로는 뛸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 선수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고, 국외 선수의 계약은 재일교포 선수로만 국한됐기 때문이다. “남편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뤄지지 않았죠. 그래서 많이 속상해했어요. 결국 1988년 한국생활을 접고 다시 타이완에 돌아가야 했죠.” 시에롱야오 씨의 말이다.
 
다행히 한국에서 보낸 5년은 쉬셩밍 부부에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시에롱야오 씨는 “매일 콩나물국 먹던 기억이 난다”며 깔깔 웃었다. “선수들이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숙소 앞 식당 아주머니가 매일 콩나물국을 끓여줬어요. 어제 식사하러 갔더니 메뉴가 하필 전주 콩나물국밥이지 뭐에요. 그래서 '콩나물국 너무 많이 먹어서 지겨워'라고 했죠.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네요.” 시에롱야오 씨가 말했다.
 
한국화장품 팀원들과 추억을 회상할 땐 눈가가 촉촉해졌다. “동료 선수들, 가족들과 정말 친하게 지냈어요. 마치 한 가족처럼 지냈죠. 우리 아들이 태어났을 땐, 선수들과 선수 아내들이 아이를 돌아가면서 돌봐주곤 했어요. 이번에도 한국 와서 백운초등학교 선수 가족들이 너무나 환대를 해줘서, 옛날 한국 생활할 때 기억이 나더라구요. 그 시절 생각하며 방에서 혼자 울었죠.” 시에롱야오씨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 시절 쉬셩밍과 함께한 팀원들이 이제는 한국프로야구를 이끄는 리더가 됐다. 양상문은 LG 트윈스 감독이 됐고 강기웅과 노찬엽은 프로팀 코치로 활약 중이다. 쉬셩밍과 배터리를 이뤘던 유영준도 현재 NC 단장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그때 알고 지낸 분들이 지금은 다들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어서 기쁘고, 기분이 좋아요. 특히 유영준 NC 단장에겐 너무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살 때도 항상 남편과 저를 잘 챙겨줬어요. 이번에도 한창 시즌 중인데도 저희 숙소까지 찾아와 주고, 잘 챙겨줘서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시에롱야오 씨의 말이다. 
 
승부조작 검은 손길, 목숨을 걸고 뿌리치다

5년간의 한국 생활을 끝낸 쉬셩밍 부부는 1988년을 끝으로 타이완에 돌아갔다. 이후 쉬셩밍은 원화대학교에서 투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다, 1990년 미전 드래곤스 투수코치로 프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스바오 이글스 코치를 거쳐 1995년 스바오 이글스 감독직에 올랐다. 
 
평탄할 것만 같던 쉬셩밍의 감독 경력. 하지만 타이완 프로야구를 뒤덮은 승부조작의 악령이 쉬셩밍을 덮쳤다. 그에겐 ‘생명’의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웨이치엔 드래곤스 감독 시절인 1999년, 승부조작 가담에 거절했단 이유로 괴한의 흉기에 찔려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시에롱야오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느 날 경기가 끝난 뒤, 남편이 집에 오려고 차에 올라탔어요. ‘나쁜 사람들’이 차 뒷좌석에 타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 사람들이 흉기를 들고 위협하면서 ‘거액을 줄 테니 내일 경기를 져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거절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경기를 9-1로 이겼죠.”
 
승부조작을 거절한 대가는 5일 뒤 물리적인 테러로 돌아왔다. “아침에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집 앞에서 4명의 괴한이 차에서 내려서, 흉기로 남편의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를 깊숙하게 찔렀어요. 큰 부상이었죠.” 시에롱야오 씨가 지금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시 사건은 타이완 모든 일간지와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큰 파문을 빚었다.
 
“남편이 크게 다친 이후, 타이완의 모든 사람이 '쉬셩밍은 다치면서까지 승부조작을 거절한 사람'인 걸 알게 됐어요. 승부조작범들도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됐죠. 이후엔 다시는 그런 제의를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제안해 봐야 통하지 않는 사람인 걸 알게 된 거죠.” 

피습 사건 이후 쉬셩밍의 생활도 많이 달라졌다. “남편은 그날 이후 밖에서 다른 사람과 술도 안 마셨어요. 선수단 숙소에서도 어느 방에 자는지를 철저하게 비밀로 했죠. 호텔 직원에게조차 실제 묵는 방과는 다른 방을 알려줄 정도였어요.”
 
쉬셩밍은 칼에 찔리고 다칠지언정 야구인으로서의 양심과 자존심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리그 전체가 승부조작 악령에 빠져들 동안에도 마지막까지 양심을 지켰다. 생명의 위협을 겪으면서까지 승부조작을 거절한 쉬셩밍의 이야기는, 두 차례나 승부조작 사태를 겪고도 전혀 달라진 게 없는 KBO리그 구성원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라" 쉬셩밍의 메시지

피습 사건 이후에도 쉬셩밍은 감독으로서 화려한 경력을 이어갔다. 직업 봉구팀 가오핑 레이공 감독, 라미고 몽키스 감독을 지내다 중신 웨일스에서 투수코치와 감독을 지냈고, 이후 이롄 프로야구단과  EDA 라이노스에서도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2013년 8월 24일, 경기 후 집으로 돌아가다 급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뒀다. 향년 55세,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시에롱야오 씨는 “남편이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밝혔다. “통풍이 있었고, 신장도 좋지 않았어요. 신장 이식수술을 받느라 장기간 입원하기도 했었죠. (팸플릿을 펼쳐 보이며) 여기 이 사진이 신장 이식수술 받고 퇴원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에요. (지갑을 열어) 여기 이 사진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함께 찍은 사진이구요.” 시에롱야오 씨는 그렇게 말하곤 사진을 잠시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생전 쉬셩밍 감독이 가장 중요시한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시에롱야오 씨는 “자존심, 그리고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도 강조했어요. 경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끝나지 않았다면 아직 희망도 있는 거라고 말했어요. 선수들에겐 ‘모든 사람이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자부심을 가져라’고 말하곤 했어요.”

시에롱야오 씨는 이날 고척스카이돔에서 직접 본 한국 야구팬들의 응원 열기가 부럽다고 했다. “타이완 야구장은 이렇게 관중이 많지가 않아요. 한국은 관중도 정말 많고 응원도 열광적이라서, 한편으로는 속상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시에롱야오 씨는 함께 방문한 초등학교 선수들이 이런 한국의 야구 열정을 직접 보면서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무엇보다 한국 선수들이 감독과 코칭스태프를 존경하고, 잘 따르는 모습도 보고 배웠으면 합니다.” 시에롱야오 씨의 말이다.
 
시에롱야오 씨는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 모두와 연락이 닿지 않아 아쉽다”며 당부의 말을 건넸다. “남편의 옛 동료들도 이젠 다 나이가 들었잖아요. 남편은 먼저 떠났지만, 그분들은 항상 건강하길 바랍니다. 이번 방문에선 사람을 많이 못 만났는데, 다음에 왔을 땐 좀 더 많은 분과 만나고 갔으면 해요.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교류를 시작으로 한국과 타이완 야구의 교류가 보다 활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구요.” 
 
남다른 야구 사랑과 한국을 향한 애정을 베풀다 떠난 쉬셩밍. 이제는 그의 아내가 뒷일을 맡아 타이완과 한국 사이에 야구를 통한 우정의 다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30년 전 쉬셩밍 부부가 그러했듯, 쉬셩밍의 후예들에게도 이번 한국 방문이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으로 오랫동안 가슴에 간직되길 기대한다. 
출처 http://v.sports.media.daum.net/v/20170721080025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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