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룩스라는 이름은 특이하다. 남녀 공용이기도 하고, 성이기도 한데.
▶ 원래 아버지는 내 이름을 로켓으로 지으려고 하셨다.(웃음) 그렇지만 어머니가 브룩스를 더 좋아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도 야구 선수 브룩스 로빈슨을 좋아하셔서 결국 브룩스가 됐다.
- 아, 명예의 전당 3루수.
▶ 특파원을 했다고 들었는데 역시 야구를 좀 아는군. (웃음) 텍사스 레인저스 취재도 했다던데 나도 텍사스 출신이다.
- 자, 그럼 텍사스 카우보이의 얘기를 들어보자.(웃음) 최근 연승 가도에 계속 7이닝 소화다. 바꾼 것이 있나?
▶ 우선 투구 동작을 좀 가다듬었다. 그리고 2군에 가서 옥스프링 코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KBO리그에서 오래 뛰었고 아주 머리가 좋은 코치이며, 내 마음을 맑게 정리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편안하게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도움이 됐다.
- 그렇다면 큰 변화를 주었다기보다는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느낌인데.
▶ 너무 완벽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성적과 기록도 보게 되고 잘 안 되면 더 잘하려고 하고, 팀 승리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하다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났던 것 같다. 그래서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내 모습을 유지한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 3년째인데 특히 올 전반기가 어려웠다. 어떤 점들이 힘들었나?
▶ 투수는 투구를 얼마나 정확히 잘 던지느냐가 관건이다. 볼카운트에 앞서고 스트라이크존을 적극 공략하고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만, 그 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사실 투수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 결과에 어떻게 대처하고 반응하는지가 투수의 역량과 능력을 좌우한다고 보는데, 나는 실패에 대처하는 점에서 영 제대로 하질 못했다.
안타를 한, 두 개 맞으면 더욱 무리를 해서 힘을 쓰려고 하고 그러다가 빅이닝을 허용하곤 했다. 바로 그런 것이 '굳게임'과 '배드 게임'을 결정짓는 차이다. 그래서 편안하게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하고 수비를 믿으며 던지자 모든 것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 한국 리그와 미국 리그를 비교한다면?
▶ KBO리그에는 정보가 아주 많다. 나도 3년째 뛰고 있고, 팀은 10개뿐이라 정말 자주 많이 대결하게 된다. 그러면서 타자들이나 상대 팀도 투수에 적응하고 또 계속 변화를 준다. 애초부터 타자에게 유리한 리그인데, 그런 점에서 더욱 투수에게 어렵다.
미국은 트리플A에는 그 정도의 정보는 없다. 메이저리그에는 물론 정보가 아주 많지만 30팀이 있고 훨씬 덜 마주치게 된다. 올해만 해도 나는 2,3주 만에 같은 팀을 다시 만난 경우가 몇 번이나 있다. 그래서 투수도 늘 적응하고 변화해야 한다.
니퍼트 같이 이 리그에서 오래 능력을 발휘하는 투수들을 보면서 참고하고 배운다. 좋은 타자가 많은 KBO리그는 투수가 생존하기 아주 까다로운 리그다.
- 2009년 시카고 컵스가 6라운드에 뽑았다. 투수로 뽑힌 건가, 아님 타자?
▶ (웃음) 컵스는 나를 투수로 뽑았다. 그런데 타자로 뽑기를 원한 팀도 많았다. 나는 상당히 빨랐다. 60야드(약 55미터)를 6.5초에 달릴 수 있었다. 대학 빅12리그의 도루왕도 했었다. 파워 히터는 아니었지만 안타를 치고 달리는 능력은 꽤 괜찮았다.
이 리그의 일부 왼손 타자들과 유사했다. 좌측으로 밀어치고 미친 듯이 달려 안타를 만들고 도루를 하고. (웃음) 그런데 외야수보다는 정말로 피칭을 좋아했다. 내가 경기를 주도할 수 있는 포지션 아닌가.
- 그 정도면 롯데에서 대주자로 투입해야하는 것 아닌가. (웃음)
▶ 사실 4,5 경기에서 준석이나 다른 타자 대신에 대주자로 들어갈 뻔 했는데 아직 현실이 되진 못했다. 스파이크도 신고 헬멧 쓰고 모든 준비를 했었는데 나가진 못했는데 언젠가는 대주자로 나서 득점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도루도 하나는 하고 싶다. 빅리그에서도 나의 꿈은 도루 하나였는데 이루지 못했는데, KBO리그에서 이루고 싶다. (웃음)
- 대학 2년 동안에 도루 몇 개를 했나?
▶한 시즌에 25~26개 정도 했다. 50경기 조금 넘게 뛰었으니 꽤 한 셈이다. 나는 금요일 경기에 선발로 등판했고 토, 일, 화, 수요일 경기에는 외야수로 뛰었다. 3할5리 정도를 쳤고 정말 야구를 신나게 즐기던 시절이었다.
- 취재를 하다 보니 '금요일 밤 선발'이라는 말이 나오더라. 의미가 큰 것 같은데?
▶ 대학 야구는 금, 토, 일 주말에 컨퍼런스 라이벌과 경기를 펼친다. 그래서 금요일 밤 경기의 선발 투수가 중요하다. 내가 늘 금요일에 던졌기에 '프라이데이 나이트 피처'라는 별명도 들었다.
- 사실상 에이스라는 의미네. 그리고 시카고 컵스에 6라운드에 뽑혔는데 75만 달러의 계약금이면 상당히 큰 액수를 받았다.
▶ 실은 2학년 시즌 막판에 좀 저조해서 그렇지 1,2라운드 얘기가 계속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학교로 돌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었다. 텍사스 A&M 대학 생활이 정말 즐거웠고, 감독님과는 여전히 연락을 자주 하고 지낸다. 그리고 지금도 그 도시에 살아 오프 시즌이면 학교를 찾아가곤 한다. 그래서 내 의지를 꺾으려면 꽤 큰 액수가 필요했다.(웃음) 그러나 정말 행운의 기회였고 지금도 감사할 뿐이다.
-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 때는 프로에 드래프트되지 않았는데.
▶ 나는 뒤늦게 자랐다. 대학에 가서 20cm도 넘게 컸고 체격도 훨씬 커졌다. 다행인 것이 대학을 간 것은 내겐 축복이었다.
- 텍사스 주 유발데라는 도시는 어디인가?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 부모님이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나 자라셨고 나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유발데로 이사를 했는데 멕시코 국경에서 북쪽으로 45분 거리에 있는 인구 1만5000명의 작은 도시이다.
아버지는 엔지니어셨고 어머니는 교사셨는데 나는 그곳에서 자랐다. 유발데는 사슴 사냥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사냥을 아주 좋아하셨고 나도 어려서부터 사냥과 낚시를 하며 컸다.
- 사슴 사냥을 하며 자랐다니.
▶ 그냥 큰 사슴을 쏘는 건 아니고 개체 수 조절에 따라 사냥철이 있다. 그곳엔 곰 같은 사슴의 천적이 없고 산사자가 조금 있는 정도고 뱀은 아주 많은 곳이다. 사슴이 너무 많아지면 풀숲이 황폐해지고 자연 환경이 깨져 사슴 사냥이 허용됐다. 새도 아주 많다. 총 소유가 안 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다. (웃음)
- 어려서부터 야구를 했겠다.
▶ 물론이다. 아버지 테리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드래프트한 내야수였다. 어깨도 강하고 수비가 좋았다. 5살 위의 형 러셀도 오클라호마 대학 야구부를 거쳐 양키즈 마이너에서 더블A까지 뛰었다.
남동생은 텍사스텍 대학에서 내야수로 뛰며 강타자로 날렸는데 어깨 부상으로 그만뒀다.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야구를 했고 가족 모두 함께 야구 여행을 다니고 선수로 뛰고 그랬다.
- 어려서 다른 스포츠도 했었나?
▶ 풋볼 팀에서 뛰었다. 텍사스 아닌가. (웃음) 그런데 아버지랑 형, 동생 모두 쿼터백을 했는데 나만 쿼터백이 아니었다. 왼손 쿼터백을 기용할 팀은 없었다. 와이드리시버와 수비수를 했다.
- 태어날 때부터 왼손잡이인가?
▶ 그렇다. 엄마 디에나가 어려서부터 오른손을 쓰도록 해 글쓰기 등 일상생활은 오른손으로 하지만 스포츠는 전부 왼손으로 한다. 그런데 집에서 나만 유일하게 왼손잡이에 나만 투수를 했고, 결국은 나만 빅리그에 진출했다. (웃음)
- 메이저리그 데뷔 때 집안에서 대단했겠다. (프로 3년만인 2012년 8월7일 데뷔전)
▶ 전날 오후 4시경에 빅리그 승격 소식을 듣고 당장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날 부모님과 형, 동생 모두 비행기를 타고 샌디에이고로 날아왔다. 첫 타자(크리스 데노피아)를 3구삼진으로 잡았을 때 가족들 모두 난리가 났었다.
주변에 모두 파드리스 팬이었는데. (웃음) 내 삶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야구를 했고, 그리고 그 중에 내가 최고 레벨에서 뛰는 순간을 맞았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축제였다. (그날 레일리는 4이닝 7실점 패전 투수가 됐습니다.)
- 빅리그로 간다고 통고를 받았을 때의 심정이 상상이 된다.
▶ 미국에선 감독실에서 찾는다는 건 보통 좋은 일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웃음) 당시 아이오와 주의 드모인에 있는 트리플A에서 뛰고 있었는데 갑자기 감독이 부른다기에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을 하며 들어갔다. 그랬더니 마디 피비 감독이 내게 내일 샌디에이고에서 선발로 등판한다고 하더라. 나는 어리둥절해서 "샌디에이고요? 어느 팀에서 뛴다는 말인가요?"라고 되물었다. 비행기 표를 받고 방을 나왔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전혀 예상치 못했었나?
▶ 전혀. 당시 컵스 메이저 선발진은 단단했는데 갑자기 맷 가자가 팔꿈치 뼛조각 통증으로 빈자리가 생긴 것이었다. 트리플A에서는 메이저로 간다고 동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래서 운동장으로 나가 엄마, 아빠, 아내, 형, 동생 모두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통화가 되지 않다가 결국 형이 전화를 받았다.
평소에 우린 문자를 주로 했었기에 내가 전화를 걸고 빅리그로 간다고 말하니까 잠시 침묵하다가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아내는 친정 가족들과 하와이 여행 중이어서 첫 경기는 못 오고 두 번째 경기에 왔다.
- 빅리그는 첫 승리도 곧 거뒀는데. (두 번째 등판에서는 퀄리티 스타트하고 패전)
▶ (세 번째 등판인) 신시내티와의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였다. (2012년 8월 18일) 5⅓이닝 동안 3점인가 주고 승리 투수가 됐다. 그날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알폰소 소리아노가 바로 그날 400홈런인가를 친 날이었기 때문이다.
라커 바로 옆자리를 썼는데 늘 미소가 떠나지 않는 아주 조용하고 진정한 프로였다. 늘 일찍 운동장에 오고 정말 열심히 운동하고 준비하는 선수였다.
-3년 만에 빅리그에 올라갔을 정도로 발전이 빨랐는데 메이저에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 야수에서 완전히 투수로 변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빠르게 빅리그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컵스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고 엡스타인을 비롯해 새로운 수뇌부가 자리를 잡았고, 전에 뽑았던 선수들은 정리되기 마련이다. 그게 야구라는 비즈니스다. 물론, 내게 전혀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는 할 수는 없고 그것을 잘 잡지 못한 탓도 있지만, 기회나 역할이라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그렇지만 삶은 얼마나 예측불허인가. 그것이 한국이라는 기회로 이어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 만 27세에 갑자기 한국행을 결정했다.
▶ 컵스에서 2년간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르내렸다. 2013년 스프링 캠프 때 컵스는 선발만 8명이 있었다. 나는 트리플A에서 선발로 시즌을 시작했고 가끔 빅리그로 불려갔지만 불펜으로 잠깐 뛰고 며칠씩 앉아 있다가 다시 마이너로 가곤했다. 그러다가 2014년 초 웨이버에 공시되자 곧바로 미네소타가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다시 LA 에인절스로 뽑혀갔다. 그러다 팔꿈치에 약간 통증이 있어서 두 달 정도를 쉬어야했고, 애리조나에서 재활 등으로 그렇게 2014시즌이 지나갔다.
시즌 후 도미니칸 윈터리그에서 다시 몸을 만들고 빅리그에 재도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아주 잘 던졌고, 에인절스에서도 나를 빅리그 캠프에 부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전 롯데 감독님을 만났고, 내게 큰 관심을 보였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오퍼를 하지는 않았고, 롯데가 오퍼를 하면서 그렇게 한국으로 오게 됐다.
아내와 상의하고 한국과 부산, 롯데 자이언츠 등도 알아봤는데 광안리 다리며, 팬이 가득한 사직구장이며 모든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결과적으로 정말 특별한 결정이 됐다. 동료들, 구단 직원들 모두 정말 잘 대해주고, 특히 팬들은 이기든 지든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부산은 아주 특별한 곳이다.
- 한국 야구는 예상대로던가?
▶ 타자들의 리그라는 것은 알고 왔다. 그런데 와 보니 정말 뛰어난 재능의 선수들이 많았다. 빅리그에서 뛸 정도의 수준의 선수가 많았다. 미국 타자들이 파워는 더 강할지 모르지만 한국 타자는 삼진 잡기가 정말 힘들다. 눈과 손의 조화가 정말 뛰어나고 참을성도 대단하다.
공을 아주 잘 보고, 정말 잘 던졌다고 생각한 공도 안타로 만들어버린다. 스카우트에게는 미국에서 어떤 투수를 데려와야 할지 정말 난감할 것 같다. 아무리 좋은 구종이 있어도 레퍼토리가 단순하면 KBO 타자들은 이내 파악하고 만다.
- 외국인 선수로서 어려움은 어떤 것들인가?
▶ 꾸준해야 한다는 것. 솔직히 우리는 용병의 신분이고 매일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많은 이닝을 던져야 하고, 존재감을 과시해야 한다. 경기 결과는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팀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계속해서 입증해야 한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두 내게 정말 잘 해주고 동료이자 형제 같은 느낌이기에 감사한다. 정말 좋은 사람들과 함께 뛰게 되어서 행복하다.
- 야구 외에 한국의 삶은 어떤가?
▶ 야구 외에도 할 것이 정말 많은 것도 즐거움이다. 자갈치 시장이나 바다의 절에도 가고 식당이나 쇼핑센터, 해운대에도 간다. 아내는 9월에 첫 딸을 낳는데 아주 활동적이라서 쉬는 날이면 늘 함께 많은 곳을 다닌다. 삼겹살, 갈비, 된장찌개 등 한국 음식도 아주 맛있고, 부산의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고 우호적이다.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에 사는 우리의 삶 자체를 즐기고 있다.
- 팬들의 질문도 있다. '레형광'이라는 별명을 아나?
▶ (웃음) 들어는 봤다. 그러나 대단한 투수였다는 주코치님 만큼의 역할을 롯데에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비교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 마운드에서 껌을 씹는 것이 도움이 되나?
▶(박장대소) 팬들도 알아챘군. 마운드에서 나는 굉장히 투쟁적이고 공격적이다. 껌을 씹으면 조금 안정이 되기도 하지만 또 별 상관이 없기도 하다. 사실 지난 몇 경기는 씹지 않기도 했다. 경기력과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자는 누구인가?
▶ 음....... 좋은 타자가 많아서. 최형우. 좌타자인데도 삼성 때부터 상대하기 정말 까다로운 타자다. 파워와 함께 모든 곳으로 때릴 줄 아는 능력, 유인구에는 좀처럼 속지 않고 정말 아웃시키기 어려운 타자다.
- 멘탈 트레이닝도 하나?
▶ 물론이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시각화(visualization) 훈련을 많이 한다. 매일 마운드에서 던질 수는 없으니 특정 타자를 상대한다거나, 특정 상황에서 던지는 것 등을 시각화 훈련을 많이 한다.
- 마지막 질문이다. 레일리에게 코리아는 어떤 의미인가?
▶ 코리아는 내게 엄청난 기회를 주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코리아에 오지 않았더라면 한국과 한국사람, 그리고 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 없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피상적으로 들었던 코리아와는 전혀 다르다. 생각이나 행동이 다른 점도 있지만 미국이 잘하는 것이 있다면, 한국이 잘하는 것이 있다. 배울 것도 많고 존경할 점도 많다. 그리고 야구에 관해서는 내가 훨씬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뛰어난 타자들, 작은 구장, 타자에게 유리한 리그, 그런 점들이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고 많은 것을 배우게 했다.
물론, 언젠가는 빅리그에서 다시 뛰겠다는 꿈은 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나는 더욱 좋은 투수가 됐고, 머물 수 있다면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 뛸 수 있게 된 점에 정말 감사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는 박세웅과 송승준 신구 조화에 레일리의 역투, 그리고 다시 가세한 림드블럼을 앞세워 후반기 반전을 노립니다. 전반기 막판부터 후반기 시작까지 이어진 레일리의 꾸준한 호투는 눈길을 끕니다. 구위와 기술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에서 안정을 찾았다는 점에서 후반기에도 좋은 기세가 이어질 가능성을 기대케 합니다. 후반기에는 레일리가 대주자로 나서 도루도 하고 득점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출처 | http://v.sports.media.daum.net/v/201707210951293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