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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섬은 헤더에게 다른 말을 하는 대신 가볍게 어깨를 올리며 ‘쉽지 않지?’ 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헤더 역시 허탈한 듯 웃으며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쓰고 있는 듯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벼운 한 숨을 쉬며 말을 아꼈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두꺼운 햄버거 두 개가 놓여지자 헤더는 머리 아픈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는 듯이 평소보다 더 흥분하며 얘기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오늘따라 더 맛있어 보이네요, 박사님도 오늘은 넘어갈 수 밖에 없겠네요.”
“하하 정말 그렇긴 하네요, 그럼 저도 오늘은 집중해서 한번 먹어보죠.”
두 사람은 대화 대신 감탄사만을 주고 받으며 순식간에 그 큰 햄버거를 다 먹어 치웠다. 레스토랑에 들어와 리치와 인사하고 자리에 않아 음료를 마신 시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한잔씩 포장하여 레스토랑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딴생각에 빠져있던 그리섬은 정차해 있던 앞차의 빨간 후면 브레이크 등이 앞 유리에서 점점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운전에 집중하지 않은 채로 꽤 먼 거리를 지나온 것을 알아채고는 우선 카스텔 사에 도착하고 근처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자료들을 확인 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섬은 한 손에 들고 있던 테블릿을 조수석에 내려 놓고 운전대를 두 손으로 고쳐 잡으며 앞차에 시선을 고정 했다. 앞서 가졌던 다른 여러 기업들과의 설명회를 통해 이미 관련 업계에서 그리섬은 그가 가지고 있던 화려한 경력은 단지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 그저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괴짜 과학자로 찍혀 버렸고 더 이상 기업들과 미팅을 가지는 것 조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보수적인 기업이미지로 그가 애초에 만나볼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카스텔 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을 때 그리섬은 기존에 가져보지 못했던 강한 기대감이 들었다. 매일 다니던 길이 아니어서 옆으로 보이는 도심의 모습들이 낯설었지만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카스텔 사에 도착하자 압도적인 규모와 높은 수준의 경비를 보고 그리섬은 순간 당황했다. 건물 입구에 차를 멈추고, 운전석 창문을 내려 정문을 지키던 경비원에게 미팅에 참석차 왔다고 얘기할 땐 기업에 방문을 하는 건지 군사 시설에 들어가려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단순히 건설회사라고 생각한데다가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이 카스텔 사에 왜 이렇게 삼엄한 경비 시스템이 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입구를 막고 있던 차단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리섬은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뒤쪽 주차타워에 주차를 한 그리섬은 가져온 서류 가방과 테블릿을 챙겨 들고 건물 후문을 지나 정문 쪽으로 나왔다. 1층의 메인 홀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안내 데스크 뒤쪽으로 걸려 있던 거대한 규모의 특이한 이미지는 정문에서 돌아보니 초 고해상도로 출력한 허블 망원경의 Pillar and Jets라고 이름 붙여진 우주 사진이었다. 마치 고대의 신들의 웅장한 출정식 같아 보이는 그 이미지는 평소 그리섬도 꽤나 멋지게 찍힌 사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편으론 그 이미지가 건설회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소머스 회장이 우주분야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 한편으로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정문으로 나와 바라본 바깥의 풍경은 처음 카스텔 사에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도심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시선을 빼앗던 거대한 카스텔 사의 건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도시는 생각보다 꽤 운치 있고 정겨운 풍경으로 변해있었고, 이제 막 아침의 출근 정체가 풀려갈 쯤이라 도시는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얼른 카페에 들어가 다시 한번 자료를 검색하고 싶었던 그리섬은 주변의 카페들을 둘러 보았다. 문을 연 대부분의 카페는 한산해 보였지만, 그리섬은 막 구운 머핀 냄새가 근사하게 퍼지던 카페에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일단 가져온 자료들을 생각 없이 모두 펼쳐 놓았다. ‘회의 때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헤더에게 전화가 왔다.
“박사님, 어디쯤 오셨어요? 전 좀 일찍 나와서 이제 곧 도착 할 것 같은데.”
“전 벌써 도착해서, 건물 앞 카페에서 커피한잔 하고 있어요. 도착 하면 이리 와요, 여기서 마지막으로 자료들 좀 보고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요.”
“하하, 벌써요? 박사님도 이제 점점 급해지긴 한가 보네요! 정문까지 한 10분이면 도착 할거에요. 카페 이름 알려 주시면 그리로 갈게요. 참! 미리 샌드위치 하나 주문 좀 부탁 드려요!”
10분 정도 더 걸릴 거라는 헤더의 말과 달리 전화를 끊자마자 주문한 샌드위치가 채 나오기도 전에 카페에 도착 했다. 회의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둘은 서로 샌드위치와 머핀을 손에 들고 천천히 가져온 자료들을 다시 살폈다.
23층 대 회의실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생각보다 너무 밋밋해서 그리섬과 헤더는 서로 조금 실망한듯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주변에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이 없어 위에서 내려다 보는 그림은 마치 사막에 덩그러니 서있는 뜬금없는 고층 빌딩에서의 그것처럼 도심을 볼품없게 만들고 있었다. 둘이 그렇게 바깥 풍경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회의실 불이 켜지며, 유리창에 자동 블라인드가 내려왔다. 둘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다 들킨 사람처럼 동시에 회의실 입구를 쳐다봤다.
“회의실에 이렇게 전망대 같은 창은 참 안 어울리죠? 건물을 디자인할 때까지만 해도 저 넓게 트인 창이 답답한 회의실 분위기를 좀 더 환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부조화한 그림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다시 벽으로 바꾸려다가 생각을 바꿨죠. 이 회의실에 올 때마다 저 창이 제게 ‘좀 더 신중하게 예상하고 판단하자’ 라는 제 사업철학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거든요. 반갑습니다. 소머스 입니다, 사실 영광입니다가 더 어울리는 인사이겠네요. 전부터 꼭 한번 그리섬씨를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반갑습니다, 소머스 회장님. 사진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네요! 얼마 전 잡지에서 매 초 당 수입이 4달러라고 하던데, 저한테 이런 시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그런가요? 앞으로 그리섬씨와 같이 일하게 된다면 그 수입이 시간당 4달러가 될 수도 있겠네요. 옆에 이 아름다운 숙녀분은 일행이신가요?”
“네, 이쪽은 헤더 맥퀸입니다, 저와 함께 연구하고 있는 제가 아는 가장 똑똑한 과학자죠.”
헤더는 그리섬의 어설픈 농담이 민망했는지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그리섬이 소개하자 소머스 회장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실물이 훨씬 좋은데요 회장님? 반가워요, 헤더라고 합니다.”
소머스 회장은 50대 후반의 나이에 은발의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근육질의 몸에 피부가 무척이나 좋았고 늘 웃고 있는 인상으로 실제 보이기는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초 거대기업의 총수답게 매스컴의 노출이 지나칠 정도로 많았지만 소머스 회장은 그것을 피하기 보다는 적절히 대처하며 이용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이 자신의 매너와 겸손함을 자연스레 느끼게끔 하는 재주가 있었고 이 때문에 그에게는 그 흔한 스캔들 한번 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에게 외모로 칭찬을 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네요. 반갑습니다.”
소머스 회장과 같이 들어와 입구 쪽에 그대로 서있던 다른 한 명은 세 사람이 인사하는 것을 보고는 별다른 소개 없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이번 미팅은 다른 실무진들 없이 저랑 두분 이렇게만 진행하면 좋을 것 같네요. 물론 소문으론 들어 보셨겠지만 사실 저희가 시작해 보고자 하는 우주관련 Project가 아직은 대외비고 정식으로 발표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아 제가 두 분을 좀더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지 못하는 점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그리섬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회장의 말에 대답하려 할 때 헤더가 먼저 얘기했다.
“와! 좋은데요? 뭔가 비밀스러운 느낌의 회의, 그럼 비밀회의 시작해 볼까요?”
헤더는 그리섬 쪽으로 얼굴을 살짝 돌려 그리섬에게 가볍게 윙크를 하며, 준비한 노트북 컴퓨터를 프로젝트에 연결했다. 그리섬도 헤더를 보며 가볍게 웃음을 짓고, 블루투스로 노트북과 연결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소머스 회장은 회의실 중간의자에 앉아 두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수첩을 하나 꺼내어 들고 일부러 딴청을 부렸다. 준비한 PPT를 이것 저것 테스트 해보던 헤더는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로 그리섬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의 불이 꺼지고 프로젝션에서는 첫 화면으로 영화 맨 인 블랙 첫 번째 편의 마지막 장면인 거대한 외계인들이 우주가 안에 들어있는 구슬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재생 되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 왔었습니다. 하지만 딱히 제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더 잘 보이고 싶거나 욕심이 있어 공부에 집중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모르는 것,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알아내고자 했었고 남들 보다 좀 더 유별났던 그런 습관들이 결국은 저를 학자의 길로 인도 하더군요. 이 후 과학자가 되어 나사의 연구팀에서 리더를 맡으며 여러 연구를 진행할 때나 기업의 산하 연구 기관에서 일을 할 때에도, 저는 제가 궁금해 하던 어떤 것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며 학자로서의 욕구를 채워 갔었고 나름 그 생활에 만족 하고 살고 있었죠. 그러던 중 저와 여기 있는 헤더는 BS사에서 화성 크루즈 여행 Project 연구의 일환으로 표면을 탐사하던 로봇에게서 한가지 특이한 표본 데이터를 받게 되었습니다. 데이터가 말해주고 있던 그 물질은 바로 생명체의 혈액이었습니다. 처음 그 데이터를 받았을 때, 저는 그것이 혈액일 수도 아니면 우리가 기존에 알지 못한 어떤 다른 물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 새로운 궁금증을 어떤 방식으로 알아가야 할까 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도 고민을 했었죠, 내가 생각지 못한 가능성이 뭘까? 이게 만약 정말 생명체의 혈액이라면 어디서 어떤 가닥을 잡아 연구를 시작해야 할까? 그러다 문득 한가지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전 우주에 생명체라고 불릴 수 있을만한 것 들이 지구 말고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가설들을 세워보다 언뜻 스쳐갔던 이 짧은 생각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회장님께 소개해 드릴 이 연구의 시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