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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발의茶 1. 은혜를 입다 (feat. 문산포종)
게시물ID : coffee_12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elltrow
추천 : 17
조회수 : 825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2/02 10: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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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여기에 차 하나가 있습니다. 바오종 혹은 원산바오종이라 불리는 이 차는 우리나라에 한자 그대로 문산포종이란 이름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차는 대

만지역을 대표하는 특산품 중 하나인데 해발 250-650미터 정도의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고도에서 자라고 한해 722톤 가량의 찻잎을 생산합니다

마어마한 양이죠. 그리고 그만큼 인기가 좋다는 뜻이겠지요. 청나라 시대에는 황실에 바치는 진상품이기도 했는데, 재미있는 것이 다른 이물질의 

냄새가 배지 않도록 목화로 만든 종이에 감싸 진상품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종이로 감싼이란 뜻의 '포종' 즉 바오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

니다. 제로 요즘에 이르러서도 깨끗함이나 순수함을 상징하는 소재 중 하나가 바로 면입니다. 깨끗하게 빨아서 쓰면 아기들 귀저기로도 널리 이용되

곤 했으니 제 아이 피부에 닿는 일로 따져보면 사실 더 청정하고 더 깨끗한 무언가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차에서는 향의 개입이 유독 

중요한데 맛이 본래 커피나 술처럼 강하지 않은 까닭으로 여타 냄새가 조금만 개입해도 쉽게 망가지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산포종이 본래 

지녔던 섬세함 혹은 고고함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도 있겠네요.


이 차는 아주 약간, 10%에서 많을 때는 20% 정도에 이르는 발효를 거치는데 완연한 녹차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조금 높고 편하게 즐기기 위한 

밸런스 면에서는 적당하다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발효나 우롱 계열이라 하기에는 분명 녹차에 가깝습니다. 이에 저는 이 차에 대한 감상을 한 

줄로 정의합니다. 미묘함의 줄다리기입니다. 만들어진 정도와 만드는 방식과 결과물로서의 맛과 향 어느 쪽도 서구식의 기준법에 의하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효 정도는 녹차에 가깝지만 맛이나 향은 그와는 전혀 다르죠. 미묘함은 언제나 우리에게 수수께끼로서의 재미와 동시에 정형화 

된 것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호기심에 불을 지르는 재료가 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볍고 산뜻한 식물의 향이 나기 때문에 최근들어 더욱 많은 

이들이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잘 어울리지 않나요? 깨끗하고 순수한 면에 감싸진 섬세하고 가벼운 차. 기본적으로 중후하거나 무겁지 않고 산뜻하니 

가벼운 맛이기 때문에 뜨거운 물에 여러 번 우려 먹는 것이 가능합니다. 대만식 궁푸차로는 짧은 시간 우려내어 대여섯 번도 거뜬합니다. 이건 흡사 

줄다리기 같습니다. 기면 끌려오고, 놓으면 끌려가는데 산뜻하고 가볍다고 해서 대여섯 번의 힘겨루기 중 만만게 봐서는 곧장 끌려가버리고 마니까 

말입니다.


바야흐로 매서운 겨울입니다. 올해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을 것이란 예측도 잠시, 매서움이 본격적으로 날을 세운 몇 주였습니다. 북반구의 여러 

대도시들 가운데 서울이 가장 춥다는 통계도 있었습니다. 서울이 영하 14도를 기록하던 날 모스크바는 영하 5도였더군요. 이렇게 추운 날엔 마치 

얼어 죽을 것 같다며 연신 몸을 부르르 떨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서울 한 복판에서 실제로 얼어 죽는 사람은 없지요.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구

한 겨울이 되면 얼어 죽은 사람 때문에 통곡하던 때가 부지기수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 때는 오리털이나 거위털 패딩도 없었고, 캐시미어나 

폴리에스테르도 없던 시절이었죠. 그래도 면은 있었겠지. 하다못해 이마저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첨단소재과학의 덕으로 이제 면

소재 옷감을 방한의 최후방어선, 내의로 사용하는 시절에 살고 있습니다. 면은 종류가 여럿입니다만 우리 민족이 이용하게 된 기원은 모두 한 

지점에서 시작합니다모두가 알고 있듯 고려 말 공민왕 시절 문익점이 목화씨를 밀반입 한 덕분이었죠. 우리는 은혜를 입는다고 말합니다. 어느날 

문득 곰곰이 이 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문자 그대로 우리는 정말 은혜를 몸소 입고 살더라구요. 오늘은 이 목화에 얽힌 은혜로움에 관해 새삼스런 

얘기 나눠볼까 합니다


 


우리 삶에서 면이 없다면 어떨까요? 아기 귀저기, 온갖 종류의 인테리어 가구나 용품들, 별의 별 것에 들어가는 소재로서의 역할을 다 떠나 놓고 본다 

해도 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 했을지 모른다는 점이죠. 고려시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한 겨울에 얼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

고 합니다. 고려에는 목화가 없었고, 당연히 면으로 실을 뽑아 짠 무명베도 없었죠. 문익점이 중국에서 이 면화를 처음 보았을 때 단순히 처음 보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만 일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우리 강산에서 살던 사람들은 추운 겨울만 되면 몸을 보호해 줄 적당한 옷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 영하 10, 영하 20도가 내려가는데 그에 걸맞게 입을 옷이 없다니요! 여담으로 얼마 전 대만에서는 드문 혹한기로 영상 5도까지 온도가 떨어

졌는데이에 체력이 약한 노인들을 중심으로 사망에 이른 경우가 몇 차례나 보고 되었다고 하죠. 기준치가 얼마냐에 따라 다른 문제지만 인간은 저

마다의 혹한기에 맨 몸으로 버텨낼 수 있는 동물은 분명 아닙니다. 당시에는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추위가 무서워 백리를 나가도 사람 모습 구경하기

어려웠다'  건 허풍이 아니라 잔인한 현실이었습니다. 몇몇 귀족 집안사람들이나 부호들은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습니다. 그도 아니면 

귀한 비단을 아주 두껍게 짜 겨울 의복으로 삼았지요. 하지만 온 백성들이 짐승 가죽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 강산에 온 백성 겨울

옷 삼을 가죽이 그토록 넘쳤다면 우리는 진즉에 가죽 공예의 최첨단을 이룩했겠지요. 엘크도 없고, 무스도 없고, 물소도 없는데 그럼 호랑이나 곰을 

피죽도 못 먹고 살던 백성들이 어찌 때려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비단은 어림도 없는 소리죠. 비단이 그토록 저렴했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비단옷

해 입었다는 말도 없었겠죠. 그럼 당시 사람들은 무얼 입고 지냈느냐? 대부분 베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삼베옷이요. .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삼베 

맞습니다. 여름에 어르신들 바람 잘 통하시라고, 시원하라고 입는 그것. 삼베옷에다가 짚을 엮어서 거적떼기로 만들어 입었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지지 않습니까? 렇게 살아온 역사가 2천 년 이었습니다. 벌벌 떨면서 슬픈 짐승처럼 기어다녔습니다. 이 와중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화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문익점은 본래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왕실을 두둔한 죄를 지어 조선 사대부 600년 역사 내내 평가절하 당했던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 

공민왕 9년 시절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는데, 서장관이라는 벼슬을 얻어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고려사람 최유가 볼모로 잡혀있던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의 왕으로 옹립하려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문익점은 최영 등의 공민왕파를 옹호

하지 않고 덕흥군을 옹호하게 됩니다. 후대의 역사 인식을 놓고 봤을 때 당연히 용서 받지 못할 죄인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정치와 인간성은 별개의 

문제였던 걸까요.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화를 처음 본 순간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목화씨를 고려에 밀반입 시키자 마음 먹었던 것이었죠. 그는 당시 

함께 원나라에 가 있던 김룡이라는 무인과 작당모의를 하게 됩니다. 이에 목화를 생산하는 여러 지역을 살폈지만 경계가 허술해 보이는 곳이 도통 눈

에 띄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통 목화를 심은 밭은 몇 만평이 넘는 광활한 대지인데 비스듬한 산비탈에 목화를 심은 곳을 찾게 되었고 더군

다나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파 한 명이 지팡이를 짚은 채 주변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정도 불과함을 

발견하게 됩니다김룡이 노파에게 먼저 접근합니다. 그런데 계획이란게 영화처럼 멋들어지게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질 않습니다. 노파는 이 두 사람

의 생김새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원나라 사람이 아닌게 티가 나도 너무 많이 났으니까요. 그리고 냅다 소리를 지르죠. 김룡이 당황해서 노파

를 온 몸으로 저지하는 동안 이 백면서생 선비는 냅다 뛰어가 목화 서너 송이를 옷소매 안에 넣고 부리나케 도망칩니다. 둘은 다른 갈레로 흩어져 도망

갔다 숙소로 돌아와 숨을 고르고는 탁자 위에 훔쳐 온 목화 송이를 펼쳐 봅니다. 난생 처음 만져 본 이 식물은 촉감이 보들보들하고 금새 손끝으로 따

뜻한 기운이 옮겨짐을 느낍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요즘 같이 종자 전쟁이 본격화 되어 씨없는 식물이나, 씨가 있어도 발아가 되지 않도록 유전자 조작

을 하는 때가 아니었으니 목화솜 안에 숨겨진 까만 씨앗은 곧 희망이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붓뚜껑을 열고 그 안에 이 면송이들을 잘 숨

겨 간담이 떨리는 출입국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게 됩니다. 




후대 사학들은 문익점이 정계 복귀를 위해 정략적인 선물로 이걸 가져왔다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 노림수가 사실이었든 아니든 관계없이 문익점은 바

로 파면되었고 고향인 산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선물이고 뭣이고 간에 꺼내볼 틈도 없었던 셈이죠. 문익점은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합니다. 고향에

서 재배를 결심하게 됩니다. 장인어른과 함께 실험을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다섯 개를 심어 보았는데 겨우 하나 살아남게 

됩니. 그러니 만약 이 한 그루를 살리지 못하면 모든 고생이 한낱 거품으로 돌아가고 마는 상황입니다. 애간장이 탑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흐릅

니다. 그 3년 동안 문익점이 터득한 것은 목화씨 껍질에 묻어 있는 기름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오줌에 담궈 기름

기를 제거하는 방법이었죠. 문익점은 그간의 공로를 그 즈음 인정받아 관직에 복귀하게 됩니다만 중앙으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경상도 안찰사로 

지방 근무를 떠나게 됩니다. 그는 정치적인 미련을 접고 목화 재배에 인생을 걸기로 마음 먹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본격적인 재배를 해 보기로 

한 그는 우선 적합한 땅을 찾기 시작합니다.그 과정에서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 땅에 눈길이 머물게 되었고, 본격적인 목화 재배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

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이 목화 종자의 보급이 그의 생전 동안 전 국토로 번지지는 못했습니다. 본격적인 농사의 한 갈래로 여겨지지도 못했죠. 그 

유 중 하나는 바로 목화를 재배하는 것과 별개로 이것을 어떻게 솜에서 실로 뽑아내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이 인도에서 온 

승려였습니다. 그는 두 가지 도구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면화에서 씨를 뽑아내는 도구를 중국에서는 '취자거라 부릅니다. 그리고 실을 잣는 

도구를사거라 했죠. 문익점은 씨를 빼내는 것을 앞으로씨아라 부르자 했고, 실 잣는 도구는물레라 부르기로 결정합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물레

의 탄생입니. 그 이름은 문익점의 큰 아들 이름이기도 합니다. 문래였던 것이죠. 그리고 문래의 아들 문영은 명주베 짜던 도구를 개량해 무명베 짜는

도구로 만드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그렇게 문익점과 그의 장인, 아들과 손자, 그리고 이름 모를 인도의 승려의 노고로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지난 2천 년의 추위와 고달픔이 

해결됩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그를 정적 숙청의 한 갈래로 여긴 때문인지 사적이고 인류애적인 공로까지 파 묻으려 했으나 양심적이었던 남명 조식 

선생은 <목면화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날 중국의 후직씨와 같도다.” 그렇지 

않습니까?  의식주가 생명보존의 기본이라면 그는 의복으로 우리 민족을 구원했던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는다는 말. 얼마나 감동적이고 고마운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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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란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이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베풀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죠. 베풀다라는 단어의 뜻을 찾으면남의 일을 돕거

나 차려 벌림으로써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라 나옵니다. , 은혜와 베품이란 같은 운명과 역할을 공유하는 단어가 되겠네요. 목화가 우리에게 베푸

는 은혜란 명확합니다. 지금에서야 여러 직물들이 개발되고 합성되면서 순수한 그 역할의 폭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그 가치란 

비견할 데 없는 고마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마움의 크기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깊은 고난과 역경의 세월 위를 밟으며 지나온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구덩이가 크면 물이 깊이 잠기는 법입니다.


면화는 우리 민족 2천 년의 추위를 해결해 준 고마운 물건이었습니다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한편으로는 또 다른 방식의 수난을 상징하는 

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가난했습니다. 당시 목화는 농촌의 살림을 책임지는 핵심 작물 중 하나였습니다. 무명베를 

짤 만큼 남겨두고 나머지는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식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목돈을 마련할 길 없는 서민들은 목화만을 바라보며 한 해를 보냈

습니다무명베는 식구들 한 해 입을 옷감이었습니다. 나머지 솜은 이부자리와 겨울 옷 안에 넣을 용도로 팔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시집오실 때 

친정 어머게서 솜으로 가득 채운 자리이불 한 폭을 건네 받으셨습니다. 그 솜은 이제 우리 누이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그 솜은 

돌아가신 외할머니 어린 시절 직접 누벼 뽑은 인생사의 한 자락 아래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이제는 사라진 이 대를 물리는 솜이불이 당시에는 집안 

살림의 가장 바닥에 위치한 밑천이 되곤 했습니다.


솜을 뽑아낼 때는 항상 까만 목화씨가 달려 나옵니다. 이 씨는 짜서 등잔불 키는 데 썼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 짜고 남은 깻묵은 소 사료가 되었지요

화 따고 남은 목화대는 땔감용 불소시개가 되었습니다. 추수가 끝나고 이어지는 목화 수확까지 마무리하고 나면 긴긴 겨울의 입구가 찾아옵니다

그 때부터 우리 어머니들은 겨우 내내 무명베 짜는 지루하고 기나긴 밤길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그 시절 저 머나먼 두만강 이북 북녘땅의 어머니들 

시 물레를 잣으며 혹독한 시베리아의 겨울을 보냈습니다. 어느날 그들에게 지옥행 열차가 당도합니다. 묻는 사람도 따지는 사람도 없는 이상하고 

기묘한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돌아갈 수 없는 조선 땅을 바라보며 혹독한 연해주의 허허 벌판을 목화밭과 밀밭으로 풍요롭게 일군지 100

이 되던 때였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연해주의 조선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어머니들의 값진 노동력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들은 미래 모스크바의 

일급당원들의 풍요로운 삶을 뒷받침 할 중앙아시아의 너른 벌판으로 어머니들을 강제 이주시킵니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우리 어머니들은 우즈베키스

탄 광활한 벌판 한 가운데로 실려 갔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개간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어머니들은 그곳에서 다시 한 평생 목화밭을 일구었습니다.

조선족 한인들은 그곳에서 집단농장 꼴호즈를 조직하고 목화농사를 시작합니다. 마치 19세기 목화농장의 흑인 노예와 같은 삶의 시작입니다. 한인 여

들은 해가 뜨기 전 새벽에 목화밭으로 나갔고, 저녁 별이 머리 위에 총총해 지면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그녀들의 뼈가 뒤틀어지기 시작합니다. 다리

는 기형적으로 삐뚤어지고, 무릎이나 팔과 등의 근육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틀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삶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버려진 민족이었을까요. 우리 겨레가 아니었을까요. 살아남은 당시대 할머니들은 여전히 목화따고 물레 돌리며 부르던 조선 여인들의 노랫말을 기억

합니다.


콜콜.jpg
고려인들이라 불리었던 당시 꼴호즈 농장에서 목화 농사를 짓던 여인들


문산포종을 감싸던 목화종이를 보면 살짜기 노란 빛깔로 물든 색이 곱습니다. 목화솜으로 짠 면은 있는 그대로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주변의 어느 것

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영향을 미치려는 욕심도 없고, 더러움은 몸소 깨끗이 닦아 냅니다. 그 가슬가슬한 면은 만지면 만질수록 사람을 평온하게 하

고 광택없는 유백의 흰 빛깔은 보면 볼수록 우리를 차분하게 합니다. 은혜로움이 베푸는 일과 같다면 순면이야말로 그 이름에 적합할 것입니다. 그리

고 또 하나 그런 이를 한 명 떠올려 보라면 누구든 주저하지 않고 그 이름을 생각할 것입니다.어머니입니다. 인간에게 은혜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를 이해하는 감정이 존재하는 한 결코 구태의연한 표현일 수 없는 대상이 있다면 어머니가 아닐까요. 저는 하얀 면을 볼 때마다 티없이 깨끗함만 주고

자 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차를 방송에, 방송을 차에 곁들이며 즐기시는 모든 여러분. 이제 올해도 벌써 한 달이 저물었습니다. 내가 나이 한 

살 더 먹었다 것에 괜히 시크해지곤 하지만 그건 실상 가슴 아픈 일도 아닐거에요. 우리가 나이 먹어 가는 만큼 어머니는 한 걸음 더, 우리와 멀어지

고 계시니까요사랑한다 말하는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매일 혼자 차 마시고 공부하고, 일상의 눅눅함이 싫어 사랑하는 오유에 연재 한 번 시작해봐도 좋겠다 싶어 글 써 보았습니다. 

이야기가 유익하다 싶거나, 추천해 주실 분이 계시다면... 이어 나가는 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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