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남당유고 -고구려 사초 추모대제기
게시물ID : history_252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ayDream2017
추천 : 1
조회수 : 2920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6/01/30 10:59:58
옵션
  • 펌글

앞에 궁내성 왕실서고에 대한 글이 올라와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글 댓글에 이미 어떤 문서들이 궁내성에 있는지에 대해 이미 국내의 역사학자들이 전부 파악했다는 식의 댓글이 올라왔더군요. 그래서 제가 남당 박창화 선생께서 궁내성에 근무하시면서 필사하신 이 글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추측하기로 원래 고구려 문사에 의해 작성되었으나, 일본에 유입되어서 오랫동안 일본 왕실 문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남당 선생께서 필사하셔서 찬을 다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 글을 감상하시고 댓글을 올려주시되,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악플을 다시거나 저를 공격하시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高勾麗史抄芻至烽美

 

高勾麗史略卷之一

 

始祖 芻牟大帝紀(시조 추모대제기)

 

 

辛巳 與四豪烏伊摩離陜父芬奴 乘玄武方丈大龜 而至普述穆稜河 與三賢再思武骨黙居 逐虎攘鞨 以開順奴 是年 禮后生光明

신사(B.C.40) 여름 네 명의 호걸〈오이, 마리, 협보, ()분노〉과 함께 남쪽으로 와서, 현무〈방장대구〉를 타고  보술〈목릉하〉에 이르렀다. 세 명의 현자〈재사, 무골, 묵거〉와 함께 호랑이를 쫓아내고 갈()족을 물리쳐서 순노(順奴)를 개척하였다. 이해에 예()후가 광명(光明)을 낳았다.

 

壬午 與樂浪卒本定界

納召西奴爲妃

임오(B.C.39) 봄 낙랑(樂浪) 및 졸본(卒本)과 경계를 정하였다.

가을 소서노(召西奴)를 거두어서 비()로 삼았다.

 

東明元年 甲申二二九七 二月 卒本王延陀勃薨 召西奴以國獻順奴 卒本之民推上爲皇帝 卽位於沸流谷西城山勃利縣 二龍山 國號高句麗 建元曰東明

命漢素造船 鄭共製兵 馬黎畜馬皆漢人也

末曷大擧入寇 上親征斬首千級

동명 원년〈단기 2297 갑신(B.C.37) 2월 졸본왕(卒本王) 연타발(延陀勃)이 죽었다. 소서노(召西奴)가 나라를 순노(順奴)에 바치고, 졸본사람들이 왕을 황제로 받드니, 비류곡 서성산〈발리현 이룡산〉에서 즉위하였다. 나라이름을 고구려(高句麗), 년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한소(漢素)에게 배를 만들고, 정공(鄭共)은 병장기를 만들고, 마려(馬黎)는 말을 모아서 기르게 하였다.〈모두 한인(漢人)이다.

말갈(末曷)이 대거 들어와서 노략질하므로, 왕이 친정(親征)하여 1천 급의 목을 베었다.

 

五月 訪松讓于沸流湯原, 與沸流谷 以德義曉之 妄稱仙族而不屈 遂奪其珍宝妻子而来

5월 비류〈탕원, 비류곡과는 (연못, )을 경계로 한다.〉의 <송양{松讓}>을 찾아가 덕()과 의()로 타일렀으나, 망령되이 선족(仙族)이라 칭하며 굽히지 않기에, 진보()와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七月 松讓入寇 破之虜獲二千口 約貢而示縱

7월 송양(松讓)이 들어와 도적질하기에, 격파하고 2천명을 사로잡았다. 조공을 약속하고, 용서함을 보였다.

 

八月 鍊于汗濱三姓 歸者二千余人

8, 한빈〈삼성〉에서 군사 훈련하였는데, 되돌아 온자가 2천여 명이었다.

 

十月 祀隧祭豊 扶餘鳩含麥而

10월 수제(隧祭祭天)를 지내서 풍년에 감사하였다. 보리를 머금은 부여(扶餘)의 비둘기가 왔다.

 

十一月 與黃龍定界 割箕丘老岺以東 羊吉以女妻烏伊 徵其民以築真珠城珠河

11, 황룡(黃龍)국과 기구〈노령〉의 동쪽으로 경계를 정하였다. 양길(羊吉)이 딸을 오이(烏伊)에게 시집보냈다. 황룡의 백성을 징발하여 진주성〈주하〉을 쌓았다.

 

二年 乙酉 正月 徵黃龍馬三千匹 鍊于中川拉林河 羊吉憂惧死

2년 을유(B.C.36) 정월 황룡(黃龍)의 말 3천 필을 징발하여, 중천〈납림하〉에서 훈련하였다. 양길(羊吉)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다 죽었다.

 

二月 桓那國吉林女主桂婁来降 為夫人

2월 환나국(桓那國)여주 계루(桂婁) (스스로) 찾아와 항복하여, 부인(夫人작위)으로 거두었다.

 

四月 召后生子沸流 為人多情而懦弱

4월 소후(召后소서노)가 아들 비류(沸流)를 낳았다. 사람됨은 다정(多情)하나 나약(懦弱)하였다.

 

六月 松讓懸鹿漂都 以國来献 為多勿候多勿故鄕之意 解慕漱之地也

6월 송양(松讓)이 현록표도(懸鹿漂都사슴을 매달아 도읍이 떠내려 감.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고구려사략에 자세함)하여 나라를 바치므로, (송양을) 다물후(多勿候)로 삼았다.多勿故鄕의 뜻으로 解慕漱의 땅이다.

 

七月 黃龍男三千為軍 女五千為婢 冶工三十所 兵船二百成

7월 황룡(黃龍) 장정 3천을 군인으로, 여정 5천을 비()로 삼고, 야공(冶工대장간) 30개소와, 병선(兵船) 200척을 만들었다.

 

八月 烏伊等伐河北今通河木蘭巴彦以北地 鞨平之 以其地為湯西質山二郡 樹木塹天獐鹿無盡 乃鍊兵而畋之

畜神馬五十匹於石河七虎力河

8월 오이(烏伊) 등이 하북〈통하, 목란, 파언 북쪽 땅〉의 갈()을 평정하였다. 그 땅을 탕서(湯西)와 질산(質山) 2개의 군으로 삼았다. 수목이 낮은 형세여서 노루와 사슴이 무진(無盡)하여 병사훈련으로 사냥하였다. 석하〈칠호력하〉에서 신마 50필을 길렀다.

 

≪견해≫ 우리의 역사랑 직접 연관성이 있는 없는 중화(中華)의 기사와, 기년이 상충(相衝)하는 신라와 백제의 기사는 옮기지 않았다.

 

三年 丙戌 三月 二龍見于鶻嶺 相都未營

3년 병술(B.C.35) 3 ()룡 두 마리가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도읍할 자리를 살폈으나 건설하지 않았다.

 

≪견해≫ 남당은 고구려의 초도(初都)를 발리현(勃利縣) 이룡산(二龍山)이라 비정하였는데, 그 이름이 붙은 연원에 관한 설명이다.

十月 祀隧 群鳩播麥于神田

 

桂婁生子高 為人尙義忠 為小后

10월 수제(隧祭祭天)를 지내고, 구맥(鳩麥)을 신전(神田)에 파종하였다.

계루(桂婁)부인이 아들 고루(高婁)를 낳았다. 사람됨은 의(), (), ()를 숭상하였다. 소후(小后)로 작위를 올렸다.

 

十二月 宝得黃龍主女禾為妃

召祖天于河濱哈爾濱 

12월 보득〈황룡왕〉의 딸 화()를 비()로 삼았다. 조천(祖天)을 하빈〈합이빈〉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四年 丁亥 正月 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鞨十部落 逐于水黑龍江

與樂浪主柴吉獵于河南富錦

4년 정해(B.C.34) 정월 탕동〈오둔하 상류지방〉에 있는 갈() 10부락을 정벌하여 〈흑룡강〉 밖으로 쫓아내었다.

낙랑(樂浪) 시길(柴吉)과 함께 하남〈부금〉에서 사냥하였다.

 

七月 宮室成 茅茨土階

7월 궁실이 완성되었다. (짚 등으로) 지붕을 잇고, 흙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九月 禾妃生子乙豆智 以柴吉女柴花妻陜父

9월 화()비가 아들 을두지(乙豆智)를 낳았다. 시길(柴吉)의 딸 시화(柴花)를 협부(陜父)에게 시집보냈다.

 

五年 戊子 正月 召后生子溫祚 為人英偉有智 上曰真吾子也 沸流猶汝而溫順 此子猶我而豪爽后笑 皆汝出也 何有真乎

設漢舘以敎民

幸羅淵拉海 拿荇騎 探其虛實

5년 무자(B.C.33) 정월 소()후가 아들 온조(溫祚)를 낳았다. 사람됨이 영특하고 뛰어나며 지략이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진정 내 아들이오. 비류(沸流)는 당신을 닮아 온순하고, 이 아이는 나를 닮아 호탕하고 의지가 굳세오.”라고 하였다. ()가 웃으며 말하기를 “모두 당신 자식인데, 어찌 진짜가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한관(漢館)을 설치하여 백성을 가르쳤다.

나연〈납해〉으로 행차하여 행()의 말을 탄 이를 사로잡아, 행인의 허실을 조사하였다.

 

六年 己丑 正月 桂后生女曼

6년 기축(B.C.32) 정월 계()후가 딸 만()을 낳았다.

 

五月 幸質陽通江 沿滸呼蘭河作站 而攻祖天 遁于北棘克山

5월 질양〈통강〉에 행차하여, 호〈호란하〉를 따라 역(}을 세우고, 조천(祖天)을 공격하니, 북극〈극산〉으로 숨었다.

 

七月 芬奴定荇南蘭西肇安達等地 進駐滸原〈■■ 天都也 黃龍修文而沈酒 荇人好仙而荒淫

7 ()분노가 행남〈난서, 조동, 안달 등의 땅〉을 평정하고 호원(滸原)에서 진주(進駐)하였다. 조천(祖天)의 도읍이었다. 황룡(黃龍)국은 문()을 닦으나 술에 빠져있고, 행인(荇人삼국사기 태백산 동남)은 선()을 좋아하나 황음(荒淫)하였다.

 

十月 拔北棘 天走海山 以荇人國為荇東荇西荇南三郡

10월 북극(北棘)을 빼앗자, ()천은 해산(海山)으로 도망갔다. 행인국(荇人國)을 행동(荇東), 행서(荇西), 행남(荇南) 3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七年 庚寅 三月 定官秩 一品 三輔 紫袖金花銀魚 二品 大卿主兵刑民宮穀 紫衫金花銀魚 二品 次卿主神賓藥農畜 紫衫銀花銀魚 三品 小卿大注簿大將軍大使者大對盧 紫衫銀花銅魚 四品 上大夫于台沛者將軍大仙人大評者 緋衫銀花銅魚 五品 中大夫都尉仙人使者評者 同而雉花等

7년 경인(B.C.31) 3월 관직의 질서를 정하였다. 1품인 공〈삼보〉은 자주색 소매, 金花 머리장식, 銀魚 허리장식을 하고, 2품 대경〈병사(), 형벌(), 백성(), 궁실(), 곡식()을 담당〉은 자주색 적삼, 金花 머리장식, 銀魚 허리장식을 하고, 2품 차경〈제사(), 손님접대(), 의약(), 농업(), 축업()을 담당〉은 자주색 적삼, 銀花 머리장식, 銀魚 허리장식을 하고, 3품 소경〈대주부, 대장군, 대사자, 대대로〉은 자주색 적삼, 은화 머리장식, 동어 허리장식을 하고, 4품 상대부〈우태, 패자, 장군, 대선인, 대평자〉는 붉은색 적삼, 銀花 머리장식, 銅魚 허리장식을 하고, 5품 중대부〈도위, 선인, 사자, 평자〉는 4품과 같으나 (은화 대신) 꿩 깃 등을 머리에 꽂았다.

 

≪견해≫ 고구려사략에도 나머지 부분을 보충바랍니다.

 

四月 勸農

4월 농사를 장려하였다.

 

八月 虜句茶海龍王閃尼女主

8월 구다〈해룡〉왕 섬니〈女主〉를 사로잡았다.

 

≪견해≫ 계루(桂婁)부인은 구다(句茶)와의 전쟁 중 황산(黃山)에서 화살에 맞았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곳 또한 황산(黃山)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소재하는 집안(輯安)과 거리를 생각해 볼 부분인 듯.

 

十月 親行隧祭祭天 置郊豕神鹿

10 (왕이) 친히 수제〈祭天〉를 행하였다. 교시(郊豕희생용 돼지)와 신록(神鹿희생용 사슴)을 제물로 했다.

 

十月 桂皇后以創毒崩 上慟哀之 作吾妻曲 后能騎射 荇人句茶之戰 扈駕立功 中流矢於黃山 春秋三十二 葬于眞珠山珠河 子高婁曼公主皆賢 是年 召后始養蚕 得絹綴織之 以爲帝依

10(고구려사략 11) ()황후가 상처의 독기로 인하여 죽었다. 왕이 서럽게 슬퍼하며, 오처곡(吾妻曲)을 지었다. 황후는 기사(騎射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를 잘하여, 행인(荇人), 구다(句茶)와의 전쟁시에 어가를 뒤에서 호위하여 공을 세웠다. 황산(黃山)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았는데, 춘추 32세였다. 진주산〈주하〉에 장사 지냈다. 아들 고루(高婁)와 만()공주 둘 다 현명했다. 이해에 소()후가 누에치기를 시작하여 비단을 짜고 옷을 지어 제()의 옷을 만들었다.

 

八年 辛卯 正月 沿黑水黑龍江立亭

黃龍主宝得殂 于仁從弟

8년 신묘(B.C.30) 정월 흑수〈黑龍江〉의 물가를 따라 역참(정자)을 세웠다.

황룡(黃龍)주 보득(宝得)이 죽어, 우인(于仁, 보득의 從弟)이 섰다.

 

八月 卑離西扶餘紫蒙鮮卑来貢

8월 비리(卑離서부여)와 자몽(紫蒙선비)이 조공하여 왔다.

 

十月 不豫 簡政

10 (왕이) 편안하지 못하여 정사를 간략히 하였다.

 

九年 壬辰 五月 柵城巫

類利彈雀

9년 임진(B.C.29) 5월 책성(柵城)에서 무당이 왔다.

유리(類利)가 참새를 쏘았다.

 

十月 烏伊等伐北沃沮猶太人自治州 破十二部落

召后生馬公主 問禮后事

10월 오이(烏伊) 등이 북옥저〈유태인자치주〉를 쳐서 12부락을 깼다.

()후가 마()공주를 낳고, ()후의 일을 물었다.

 

十年 癸巳 二月 營西都阿城于鴨水 以質朴為主

10년 계사(B.C.28) 2월 압수(鴨水)에 서도(西都)를 세웠으며, 질박(質朴치장 없이 수수하게)함을 위주로 지었다.

 

九月 白鸞来集西都王臺 故名之曰鸞臺 上與召皇后居之

9월 흰 난새들이 서도(西都)의 왕대(王臺)에 모여들기에, 난대(鸞臺)라 이름 지었다. 왕과 소()황후가 이곳에 거주하였다

 

十一月 尉厭芬奴弟馬黎菸狗等伐北沃沮 拓地千餘里 以其生口八萬 置於杜訥原伯都訥之西北之西 名曰梁貊谷洮南大賚開通之間

11월 위염〈부분노의 동생〉, 마려(馬黎), 어구(菸狗) 등이 북옥저(北沃沮)를 쳐서 천 여리 땅을 넓혔다. 북옥저(北玉沮)에서 살던 사람 8만을 두눌원〈백도눌의 서북〉 서쪽 땅에 살게 하고, 양맥곡〈조남, 대뢰, 개통의 사이〉이라 이름하였다.

 

十一年 甲午 五月 幸梁貊谷 遇卑離主素奴相見 以其不敬 来東都 松讓妄稱北扶余之仙宗 素奴妄稱嫡孫 其谷 故伐之

11년 갑오(B.C.27) 5월 양맥곡(梁貊谷)으로 행차하여 비리(卑離) 소노(素奴)와 마주쳤다. 그가 불경(不敬)하여 동도(東都)로 잡아왔다. 송양(松讓)이 북부여(北扶余) 선종(仙宗)이라 망령되이 칭하더니, 소노가 북부여의 적손(嫡孫)임을 망령되이 칭하며, 양맥곡의 경계에서 막은 연유로, 그들을 정벌한 것이었다.

 

八月 烏伊拔不而城洮南 徙其大姓於湯東 以烏伊為其假王

8월 오이(烏伊})가 불이성〈조남〉을 빼앗고, 그 곳의 큰 성씨들을 탕동(湯東)으로 옮겼다. 오이를 (비리)가왕(假王임시왕)으로 하였다.

 

十二月 烏干伊弟馬黎等伐長岺長岺高顯〈■ 以毒氣軍多傷

12월 오간(烏干오이의 동생)과 마려(馬黎) 등이 장령〈장령〉과 고현(高顯)을 쳤다. 독 기운 때문에 많은 군사들이 상하였다.

 

十二年 乙未 正月 親至長岺 觸氣而還

12년 을미(B.C.26) 정월 친히 장령(長岺)에 행차하였다가 () 기운을 느끼어 돌아왔다.

 

七月 親征西河長春拔之 本黃龍地 與長岺共反者也 使尉厭守之 幷伐長岺

7월 서하〈장춘〉를 친정하여 빼앗았다. 본디 황룡(黃龍)의 땅으로, 장령과 함께 반란하였다. ()위염에게 서하를 지키게 하고, 장령(長岺)을 쳐서 아우르게 하였다.

 

九月 禾妃生羊太子 為小后

9월 화비(禾妃황룡 보득의 딸)가 양()태자를 낳자, 소후(小后)로 삼았다.

 

十月 摩離拔海山 虜祖天 上謂天 黃龍文而淫 汝國仙而淫 文仙皆好道 過則敗 食色皆好道 過則傷 汝知之乎天叩頭請命 命居湖上養氣

10월 마리(摩離)가 해산(海山)을 쳐서 조천(祖天)을 사로잡았다. 왕이 ()천에게 말하기를 “황룡(黃龍)은 문()을 하나 지나치고, 너희의 나라(荇人)는 선()을 하나 지나치다. ()과 선()은 모두 좋은 도리()이나, 지나치면 무너지게 된다. 먹는 것이나 색()은 모두 좋은 도리다. 과하면 (몸을) 상하게 한다. 그대는 그것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천은 머리를 조아리며 처분하기만을 청하랐다. (왕은 조천에게) 호수위에 살면서 기운을 북돋우라 명하였다.

 

十三年 丙申 二月 烏伊拔高顯

13년 병신(B.C.25) 2월 오이(烏伊)가 고현(高顯)을 빼앗았다.

 

五月 尉厭拔南口遼源 以乙音為玄菟太守 以營南口 音召皇后外兄也

納造船大加漢素女平氏 為夫人

5 ()위염이 남구〈요원〉을 빼앗았다. 을음(乙音)을 현도(玄菟)태수로 삼아 남구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을음은 소()황후의 외가 오빠이다.

조선대가 한소(漢素)의 딸 평()씨를 거두어 부인(夫人작위)으로 삼았다.

 

九月 播麥于西河 與平氏如溫湯九臺

9월 서하(西河)에서 보리를 파종하고, 평씨(平氏)와 함께 온탕〈구대〉엘 갔다.

 

十月 畋于杜訥原 置鯉宅十所養鯉之沼兼造陶器 故以窯爲鯉宅 召后與諸妃公主習羹

10월 두눌원(杜訥原)에서 사냥하고, 이택(鯉宅잉어를 기르는 늪에서 陶器를 만들기 등을 겸하였기에, (기와)가마를 이택이라 하였다) 열 곳을 두었다. ()후가 모든 비()와 공주를 거느리고 어탕() 끓이기를 익혔다.

 

十四年 丁酉 二月 祖天荇南沛者

14년 정유(B.C.24) 2월 조천(祖天)을 행남(荇南) 패자(沛者태수)로 하였다.

 

八月 柳花太后崩于柵城 擧哀于東都 遣仇都松義 吊賻作像 立聖母神廟于南岺龍爪溝岺

8월 유화(柳花)태후가 책성(柵城)에서 죽어, 동도(東都)에서 거애(擧哀초상이 났음을 알림)하고, 구도(仇都)와 송의(松義송양의 아들)를 보내어 부의하고 (성모)상을 만들었다. 남령〈용조구령〉에 성모신묘(聖母神廟)를 세웠다.

 

十五年 戊戌 五月 東巡至 楽浪浮海 柴吉納女鵲

15년 무술(B.C.23) 5 (왕이) 동쪽을 순행하였고, 낙랑(樂浪)은 바다()를 건너와, 시길(柴吉)이 딸 작()을 바쳤다.

 

≪견해≫ 고구려사략에 의하면 고구려와 낙랑의 경계가 엄리대수라고 하였다. 엄리대수란 흥개호를 말하는 듯 하다.

 

八月 閱神馬二千匹于汗濱

以馬黎敎溫祚 上與召后 往聽

8월 한빈(汗濱)에서 신마(神馬) 2천 필을 검열하였다.

마려(馬黎)에게 온조(溫祚)를 가르치도록 하고, 왕과 소()후가 때때로 가서 청강하였다.

 

十六年 己亥 正月 多勿候松讓薨

平氏生女漢

16년 기해(B.C.22) 정월 다물후(多勿候) 송양(松讓)이 죽었다.

평씨(平氏한소의 딸)가 딸 한()을 낳았다.

 

十七年 庚子 八月 行聖母祭 解素柳花所生金蛙子送禮后及類利

17년 경자(B.C.21) 8월 성모제(聖母祭)를 지냈다. 해소〈유화가 낳은 금와의 아들〉가 예()후와 유리(類利)를 보내 주었다.

 

十八年 辛丑 五月 御馬巨婁死

18년 신축(B.C.20) 5월 어마(御馬임금의 말) 거루(巨婁)가 죽었다.

 

六月 禾后崩 春秋三十三 葬于桂后塚西

6월 화()후가 춘추 33살에 죽어, ()후 무덤 서쪽에 장사를 지냈다.

 

十月 上與禮后類利謁神隧 召皇后退居牛壤穆稜站

10월 왕이 예()후와 유리(類利)를 데리고 신수(神隧동명대제)를 찾아뵈었다. ()황후가 우양〈목릉참〉으로 물러났다.

 

十九年 壬寅 正月 以類利為東宮

19년 임인(B.C.19} 정월 유리(類利)를 동궁으로 삼았다.

 

二月 鵲氏生鵲太子

2월 작()씨가 작()태자를 낳았다.

 

四月 上崩於西都 東宮卽位 仙記曰上不樂居位 釼璽于東宮 九月 乘龍上天 遺棄玉鞭 為龍山陵

4월 왕이 서도(西都)에서 죽어, 동궁이 즉위하였다. 선기(仙記)에는 “왕은 보위에 있는 것이 즐거워하지 않아,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고, 9 (왕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왕의 채찍이 버려 둔 곳이 용산릉(龍山陵)이 되었다.”라고 한다.

 

禮后生女再思

()후가 딸 재사(再思)를 낳았다.

 

≪견해≫ 고구려사략에는 재사(再思예씨의 딸)의 출생이 7월이라 하였다.

 

論曰 東明以不世出之英主 年未四十 席卷東土 開七百年之基 可謂聖矣 後之阿骨打忽必烈亦有所不及処矣 但其尙屬未開之 后妃之制未爽 胎弊於後 急於創業 未克其壽 惜矣

찬자가 살피기를 “동명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 뛰어난 임금이었다. 나이 40 이전에 동쪽 땅을 석권(席卷)하여 700년의 기초를 열었다. 가히 성인이라 할 만하다. 후세의 아골타(阿骨打의 시조)나 홀필렬(忽必烈, 의 쿠빌라이)도 또한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다만, 아직 속하지 않은 미개척지가 남아 있었다. 처음에 후비(后妃)의 제도가 시원스럽지 못하여, 후에 폐단을 낳게 되었다. 나라를 창업하는 것이 급하였기에 자신의 수명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도다.”라고 생각한다.

출처 http://cafe.daum.net/sijeong7101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