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츠가 일으킨 말썽으로 인해 네덜란드와 일본과의 관계는 냉랭해졌고, 하라도에 거주하고 있거나 억류 중이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곤혹을 겪으며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인질 신분으로 이곳에 있던 네덜란드 선원들은 여전히 감금 중이었으며, 그 중 일부는 무관심 속에 이질을 앓으며 죽어갔습니다. 누이츠의 아들 로렌초도 있었습니다.
쟈크 스페크스의 VOC 총독 업무는 오래 지속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 부분 해결에 만큼은 큰 공헌을 하고 떠났습니다. 누이츠는 일본 측의 태도를 누그러 뜨리기 위하여 좀 잔혹하다 싶은 방법으로 처리하는데, 바로 '전' 대만 총독이자 일본 대사인 누이츠를 일본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쇼군의 판결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짜증나게 했던 대상이, 이렇게 풀죽은 생쥐 꼴이 되어 온 모습을 보고 자못 유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언제 어떻게 판결 할것이라는 말도 없이 몇년간 붙잡아 두다가 다시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런 움직임으로 VOC와 일본과의 긴장 관계는 어느정도 해소가 되었고, 네덜란드인들은 일본에서 무역 활동을 다시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630년대에 들어서면 여러가지 제한 조치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한편, 정지룡은 내륙에서 반란 진압 업무를 맡고 그 일이 해결되자 이번에는 산간 지방으로 떠나게 됩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정성공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온 시점이 그때였고, 정성공의 눈에 자신의 아버지는 해적이자 밀수꾼이 아니라 (아마도 정지룡하고는 가장 안 어울리는 대상일)명나라 조정의 부름하에 싸우는 충신으로 보였습니다. 이는 정성공의 훗날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정지룡이 어떠한 의도로 명 조정의 부름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막 회복한 세력으로 명과 대놓고 적대하기에는 아직 무리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만, 만일 명나라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었던 시기라면 정지룡은 내륙에 온 이상 두번 다시 바다를 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정지룡의 신변을 정부가 보장한다고 해도, 아마 북방에서 지내는 신세가 될 테고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는 삶은 그것으로 끝날것이 자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명은 정상이 아니었죠.
분명한것은 정지룡이 이때쯤 해적 두목이라는 입장에서 조금 더 멀리 보기 시작해서 여러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그때서야 자신의 아버지 정소조가 그토록 가문의 영광에 집착했는지 깨닫게 된듯하고, 여러가지 벼슬을 돈주고 사서 정씨 가문을 그럴듯 하게 꾸몄습니다. 또한 아들 정성공에게는 모든 재력을 총동원해서 비범한 영재로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정지룡의 입장과는 별개로 VOC는 또 다시 다른 움직임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내륙으로 떠나면서 정지룡은 친우 쟈크 스페크스에서 여러가지로 잘 봐주고, 우리 가문과 우호를 유지하자는 연락을 보냈지만 이 친서를 받을 즈음의 스페크스는 짦은 대타 업무를 끝내고선 짐을 꾸리고 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으며 현재는 일본에 억류 중인 피터르 누이츠의 후임으로, 한스 푸트만스가 신임 대만 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푸트만스는 누이츠보다는 조금 더 현지에 대한 정보를 익히고 왔으며 여러가지 흉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 VOC가 남중국해에서 가장 바라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건 자명했으며, VOC가 남중국해 진출을 시도한 그때부터 똑같았습니다. 중국내의 항구 거점 마련. 푸트만스는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획득한 경위등을 연구해보면서, 중국 정부와 전쟁을 벌여 항구를 얻는것는 자살 행위고, 좀 더 괜찮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푸트만스는 해적을 키우려고 작심합니다.
중국 정부가 손을 쓸수도 없을만큼 해적이 커졌을때, VOC가 이를 해결하면 마카오 같은 작은 항구라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 푸트만스의 계략이었습니다. 문제는 해적이 이제 없다는 것입니다. 정지룡이 죄다 소탕해버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푸트만스는 가상의 해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VOC에서 해적을 고용해 약탈을 벌이게 한 후, 자신들이 나서서 이를 해결하는 척 하자. 그리고 해안가 도시를 봉쇄하여 식량 공급을 막아 해적을 키우자. 어처구니 없도록 무례한 생각이었지만 푸트만스는 이 계획을 밀고 나갔습니다. 해적도 해적이고, 조금 더 남중국해를 혼란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바타비아에 있는 VOC 본사의 총독이 이를 반대하면 일은 골치 아파집니다. 그래서 푸트만스는 총독이 교체되는 틈을 노리기로 합니다. 쟈크 스페크스가 돌아가고, 신임 총독인 헨드릭 부르베르(Hendrick Brouwer)가 취임하는 그 공백기 동안 하문을 포위하여 식량 공급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식량 공급이 끊겨 사람들인 배를 굶으며 죽어가거나, 아니면 해적질을 하러 바다로 나왔습니다. 또다시 난장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한 푸트만스는 과거 정지룡의 동료였던 유향(劉香)이라는 자를 고용해서 복건 연안을 계속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푸트만스에게는 다행이게도, 신임 총독 부르베르는 이런 미친 계획에 대해 몹시 흡족스런 반응을 보이며 지원을 했습니다. 이 이방인들의 분탕질로 인해 명나라 해안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고, 푸트만스는 만족스러워하며 중국 정부가 이쪽에 손을 내밀기를 기다렸습니다. 명 조정이 이쪽에 손을 내밀면, 유향은 공격을 못하게 제어하면 되고 잔챙이 해적들은 각각 격파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은 이 흉악한 외국인들에게 손바닥을 벌리는 대신, 자신들이 가둬놓은 인물을 다시 바다로 풀어놓는 수를 썻습니다. 다시는 뭍에서 나오지 못할것 같았던 정지룡이 귀환한 것입니다. 즉 정지룡을 바다로 되돌아오게 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네덜란드인들이었습니다.
정지룡은 귀환 하고 나서 즉시 네덜란드인들에게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푸트만스는 일이 이렇게 되자 정지룡부터 제거해야하겠다고 생각했고, 1633년 7월 13일 중무장한 함선 12척을 하문으로 보내 배에 붙은 어패류를 때내고 있던 정지룡의 함선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정지룡은 당황하지 않고 네덜란드 인들의 비겁함을 조롱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준비 되지 않은 상대를 기습해서 얻은 승리가 어찌 명예롭겠느냐?"
푸트만스는 이런 쓸모 없는 서신은 무시하고, 명나라의 조정과 병부 관리들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자신이 정지룡을 비롯한 해적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으며, 만주족을 막아내는데 필요한 대포와 총, 병사들까지 모두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명나라 조정에선 긍정적으로 답변을 해서, 네덜란드 인들의 막강한 해군력에 주목하고 있으며 기꺼이 협상하겠다고 나왔습니다. 푸트만스는 댓가로 중국내 항구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내 고위 관리들은 조심스럽지만 나쁘지 않게 이를 여긴다는 서한을 답장으로 보냈습니다.
푸트만스는 신이 났습니다. 전임 대만 총독, 아니 쿤을 비롯한 VOC 전체가 그토록 해도 안되던 일이 자신이 나서자 이렇게 술술 풀리던 것입니다. 자신감이 넘치던 그였지만, 가을이 지나자 뭔가 좀 이상하다는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동안 푸트만스가 그토록 열렬하게 서한을 교환한 상대는, 명나라 조정 따위가 아니라 정지룡이었던 것입니다.
정지룡은 가짜 고관을 내세우고 직인을 위조해 서한을 받아쓰게 해서 보내고, 푸트만스의 편지 속에서 그의 계략과 작전을 몹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명 조정의 고위 관리들에게 푸트만스의 서한은 단 한통도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격노한 푸트만스와, 이미 준비를 끝내놓은 정지룡간의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푸트만스가 자랑하던 12척의 중무장이 된 네덜란드 선박들은 하문을 계속 봉쇄하다가 전염병, 암초, 태풍등의 이유로 되돌아가고 8척만 남았습니다. 8척의 함선의 선원들이 지루해하며 시간을 보내던 무렵, 갑자기 저쪽 바다에서 작은 배가 150여척이나 떠밀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타고 있지 않았고, 대신 다른게 타고 있었습니다. 불이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타는 작은 배들인 그렇게 떠밀려 왔고, 네덜란드 선원들은 기겁하며 달아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물길은 얕았고 중무장도 오히려 방해가 되어 선박은 너무 무거웠습니다. 결정적으로, 화염에 휩싸인채 다가오는 배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두개의 선박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침몰했고, 다른 선박하나는 대만으로 퇴각하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VOC의 기세를 잠재운 정지룡은 그들의 지시를 따르던 유향에게 좋은 말로 설득하려 했습니다. 유향은 이에 응하는 척하다가 공격을 감행했고, 정지룡의 형제 정지호, 정지연이 사망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정지룡은 머리 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수백척의 함선을 모조리 동원해 유향의 가족가 그의 추종자들을 남김없이 학살했습니다. 유향은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나선, 대만에서 수치심과 굴욕암을 삼키고 있던 푸트만스에게 넌지시 손을 건네 자신의 통제 아래서라면 중국 본토와의 교역을 재개할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지룡의 함선이 대만을 왔다갔다 했고, 정지룡은 다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푸트만스도 헛된 꿈은 버려야 했으나 그럭저럭 이윤을 조금씩이나마 회복할순 있었습니다.
정지룡의 인생의 정점은 이곳입니다. 물론 조금 있다 남명 정권을 모시며 평국공(平國公)에 오르는등 그의 갈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 시대 이후로의 역사는 정성공의 시대였습니다.
다만, 정성공의 이야기를 하려면 그 당시 명나라가 무너지는 순간과 남명 정권의 성쇄를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