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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섬은 운전대 위에 한 손으로 태블릿을 받쳐들고 새벽까지 정리한 프리젠테이션 자료들을 보며 발표 순서를 대뇌였다. 같은 내용의 회의를 수십 번도 더한 그리섬 이였지만, 이번은 그 전의 상황과는 많이 다른 터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와 건설 부분으로 세계 최대의 거물 기업인 카스텔 사에서 그에게 먼저 설명회 제안을 하였고, 그 무렵 카스텔 사에서는 우주 사업을 차세대 주력 사업으로 정할 것이 라는 소문이 돌던 때였기 때문이다. 나사에서 나와, 우주 크루즈 여행으로 첫 민간 왕복비행을 성공한 BS 사에 들어 갈 때 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섬은 이렇게 기업들을 전전하며 연구 개발비 지원을 구걸하며 다닐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BS 사에서 화성 왕복 비행이라는 상품 개발을 목적으로 사전 연구를 선두 지휘할 때 가지게 된 아주 작은 호기심 덩어리는 이내 커다란 바위가 되어 다시금 그를 사업자에서 과학자로 돌아올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 건지 안개 속에 습기가 무거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출근 시간의 차들이 몰리기 시작할 때쯤엔 자동차 앞 유리가 뿌옇게 흐려졌다. 회의 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와 늦을 걱정은 없었지만 그리섬은 괜한 조바심이 났다.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도심으로 연결되는 진입로에 다다르자 차는 이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리섬도 자꾸만 급해지는 마음을 돌려 보려 처음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 그날을 떠올렸다.
“그리섬 박사님, 어제 전송된 화성 표면 데이터가 좀 이상한데요? 한번 보시겠어요?”
“헤더 주임님, 박사님 소리는 이제 좀 그만 붙여주세요, 그 말 들을 때마다 제가 정말 나이 많은 노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하다 구요.”
“하루 이틀 듣는 말도 아닌데 이제 적응 좀 하시죠 그리섬 박.사.님.?”
22살에 하버드에서 우주 항공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나사에 들어와 다시 1년만에 수석 연구원이 된 그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는 그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늘 불편했다. 그가 발표한 논문은 단번에 학계의 찬사를 받았고, 전세계 언론은 그를 21세기 최고의 두뇌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느꼈던 주변의 시선은 천재를 보는 존경과 부러움이라기 보다는, 괴물을 보는 두려움과 경계에 가까운 것 이였고, 때문에 정작 그 자신은 그럴수록 자꾸 자신이 고립되어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그리섬은 주변인에게 될 수 있는 한 가볍고 평범한 사람으로 비쳐지고자 노력했다.
“탐사로봇 4호에서 전송된 영상과 데이터에요.”
“화면 아래 쪽 표본체취용 구멍 부분을 잘 보세요”
헤더 맥퀸은 화면을 정지 시킨 뒤 얘기한 부분을 확대했다.
“지면에서 깊이 상 20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인데, 작지만 확연히 색깔이 빨갛게 주변 얼음부분과 다른 곳이 있죠?”
“이건 채취한 표본 데이터에요. 처음엔 너무 지면과 가까운 곳이라, 뭔가에 의해 이 부분에 구멍이 파인 뒤 지표면의 황 성분이 이 부분에 고착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여기 채취한 성분 분석표 좀 보세요.”
헤더는 이미 혼자 몇 번이나 확인한 듯 살짝 구겨져 있는 데이터 용지를 넘겨주며 말했다.
“이거 보세요. 이건 무기질에서 나올 수 있는 성분이 아니에요. 물을 제외한 나머지 성분비를 보세요! 박사님은 이게 뭐일 것 같아요?”
헤더는 빨리 자기가 바라는 대답을 해달라는 듯 그리섬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섬은 넘겨받은 데이터 용지를 보다 말고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화성 표면에서 혈.액. 이 발견 됐다고 말하고 싶은 거에요?”
헤더는 대답대신 마치 주인이 던진 공을 물어온 뒤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그리섬도 헤더의 그런 표정을 보고 데이터를 다시 한번 천천히 확인 해 보았다. 데이터는 그 샘플의 성분이 확실히 생명체의 혈액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더처럼 무언가 엄청난 발견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흥분 보다는 두 가지 의문점이 먼저 떠올랐다. 첫째는 단순 데이터가 보여주는 성분들만으로 이것이 혈액이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놓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여태까지 화성의 극 지방을 탐사한 프로젝트는 이전에도 많이 있었고, 더욱이 탐사로봇이 샘플을 채취한 지역은 착륙 선이 내리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후 각각의 탐사로봇이 목적지점을 갈 때 꼭 거치는 지점 이였다. 그런데 이전에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이 성분이 그 지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지는 않다는 얘기고 탐사 로봇이 전송한 사진 속의 그 장소에만 이러한 성분이 있었고 그걸 우연히 발견 했다는 것은 과학자로써 인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주임님, 아직 흥분하기는 이른 것 같은데요? 실물이 오기까지는 단정 할 수 없으니, 일 단 기다려 봐요.”
헤더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박사님! 이건 확실해요! 다른 가능성이 있어요? 정말이요? 너무 신중한 거 아니세요? 올해 노벨상은 우리가 받을 거라고요!”
“채취된 샘플들 한 달이면 도착 할 텐데 우리 축배는 그 때 들죠, 주임님. 확실하게 확인 하고 한달 후에 이 사실을 발표할 수 있을 땐 제가 정말 근사하게 저녁 살게요.”
그리섬보다 5살이나 연상이긴 하지만 헤더 역시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젊은 나이에 BS라는 초 거대 기업에서 그리섬과 같이 핵심 Project를 맡게 된 수재였다. 풍기는 외모로만 보면 그녀는 과학자 보다는 배우나 모델이 더 어울려 보였다. 짧은 커트 형식의 금발에 짙은 눈썹과 큰 눈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입술이 유난히 붉어 늘 맨 얼굴로 다니는 그녀지만 마치 화장을 한 것처럼 얼굴이 전체적으로 또렷했다. 학생 시절부터 수영을 했다는 그녀는 그리섬의 삐쩍 마른 몸과 달리 탄탄 했다. 그녀의 학창 시절은 그리섬과는 정 반대였다. 늘 1등을 놓쳐 본적 없었고 운동까지 잘하는데다 외모까지 출중해 그녀 옆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의 성격 역시 활달하고 붙임성도 좋아 언제나 칭찬만 듣고 자라온 그녀였다. 원래는 우주 비행사가 꿈이었던 그녀였지만 우주 항공에 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과학자가 되어야 갰다고 생각을 바꿨다. 처음 그리섬그 만났을 때 그녀는 적잖이 놀랐다. 늘 또래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던 그녀였지만 자기보다 5살이나 어린 그리섬의 천재성을 보고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보다 훨씬 앞서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것은 그녀에게는 정말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질투나 실망 보다는 강한 호기심과 동경에 가까운 것이었고 1년 넘게 같이 일하며 그 느낌은 점차 존경에 가까운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좋아요, 박.사.님 그 생각 잊으면 안돼요? 제가 가끔 가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메뉴에 있는 제일 비싼 샴페인은 무슨 맛일까 늘 궁금했거든요.”
그녀는 더 이상 덧붙이지 않고 다시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