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 지배의 폭력성과 일본군‘위안부’ 관련
■ 일 시: 2007년 11월 30일(금) 09 : 30~17 : 00
■ 장 소: 서울 프레스센터 회의실(19층)
■ 주 최 : 한국근대현대사학회
■ 후 원 : 동 북 아 역 사 재 단
기조발표 일본군 ‘위안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윤정옥(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11
제1주제 일본의 군 ‘위안부’ 문제 연구의 성과와 과제
발표 : 吉見義明(일본 中央大교수) ····················································17
토론 : 정태헌(고려대 교수)
《원문》···························································································43
제2주제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의 여성정책과 일본군성노예제
발표 : 강정숙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67
토론 : 서현주(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제3주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징집에 나타나는 식민지배의 폭력성
발표 : 윤명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87
토론 : 김부자(한신대 교수)
제4주제 동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에게 행해진 강제매춘(1942~1945)과
현재(1945~2007) 네덜란드 생존자의 증언
발표 : Esther Captain (네덜란드 Utrecht대학 연구원) ··························109
토론 : 장석흥(국민대 교수)
《원문》·························································································128
제5주제 대만의 일본군 위안소와 성폭력(1936~1945)
발표 : 朱德蘭(대만 中央硏究院연구원) ·············································149
토론 : 藤永壯(일본 大阪産業大學교수)
《원문》·························································································180
제6주제 조선인 노동력 동원에 나타나는 식민지배의 “폭력”성
발표 : 한혜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199
토론 : 박맹수 (원광대 교수)
PDF문서 전판 원본 입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시간날때 읽어보시던가 프린트하면 214p니 갖고 다니면서
출퇴근때 읽으시면 좋으실거같습니다.
그중 吉見義明(일본 中央大교수) 님이 발표하신 자료중 일부를 발췌합니다.
4) 인종차별(민족차별)과 계층차별(계급차별)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총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육군이
위에서부터 배치하는 ‘위안부’ 수는 병사 100명 당 1명이라는 기준을 갖고 있던 점은
가네하라〔金原節三〕육군성 의사과장의 업무일지나 다카마츠〔高松宮〕의 일기에
서 밝혀진 사실이다.15)
그러나 각지에 주둔하는 부대가 독자적으로 모집하는 경우도 많았고 원래 명부 조
차 남아있지 않아서 실제의 숫자를 추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중앙이나 파견군 차원에
서 명부를 만들어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1938년 11월에 육군성과 제21군
의 요구로 내무성이 5 부현(府縣)의 경찰부에 명령하여 업자를 선정, 모집하게 하여
중국 광동성(廣東省)으로 보낸 400명의 ‘위안부’의 경우, 내무성은 업자의 성명과 주소
는 보고하게 했으나 ‘위안부’에 관해서는 인원수만을 기록하면 된다고 하였다.16)
그래서 대체적으로 추정되는 인원수는 일정기간 감금, 강간당한 경우를 제외하면, 최저로
잡아서 5만 명 전후이며, 일정기간 감금되고 강간당한 이들을 포함하면 통상적으로
언급되는 숫자인 8만에서 20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실제의
인원수를 구체화할 수 있는 조사연구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또한 지역별 위안소의 숫자는 오키나와,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에서 행한 하야시
히로시〔林博史〕씨의 조사 등이 있는데17) 이와 같은 조사는 각 지역에서 더욱 이루
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주로 누가 희생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그 압도적 다수는 일본인 이외의 아
시아ㆍ태평양 지역의 여성이었다. ‘위안부’의 국가(민족)별 비율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도 곤란하나 어느 정도 추산은 가능하다.
1940년에 대본영 육군부 연구반이 정리한
「중일전쟁에서의 군기, 풍기의 견지에서 관찰한 성병에 관하여〔支那事変ニ於ケル軍
紀風紀ノ見地ヨリ観察セル性病ニ就イテ〕」
를 토대로 살펴볼 때, 전지에서 새롭게 성병에 걸린 일본군 병사의 ‘상대녀’의 비율이
거의 ‘위안부’의 비율을 반영하고 있다고한다면
조선인은 51.8%, 중국인 36.0%, 일본인 12.2%이어서 압도적 비율은 조선인과
중국인이다.18)
만약 동일한 조사가 1942년에 이루어졌다면 동남아시아ㆍ태평양 지역
의 여성 비율이 상당히 높아질 것이다. 이 사실은 식민지ㆍ점령지 여성이 주로 희생되
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있었던 점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10% 전후의 일본인 여성에 관해서 살펴 보면, 외무성은 1920년대 이래 내지에
서 ‘가라유키상’ 등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내무성은 1938년2월 경보국장
통첩으로 예외 조치로서 일본군이 주둔한 중국 점령지에 한하여 매춘을 목적으로 한
여성의 도항을 묵인하기로 하고 만21세 이상으로서 현재 「창기 그 외, 사실상 추업(醜
業)에 종사하는」자의 도항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군의 강력한 요구를 수용한 것같다.
이러한 여성의 경우는 희생이 되더라도 할 수 없다는 의사표시가 이루어진 것으
로 보아야겠으나 실제로 「창기 그 외, 사실상 추업(醜業)에 종사하는」자라는 것은 공
인된 공창제나 묵인되고 있던 사창제라고 하는 사실상 성노예제도 아래 고통을 받고
있는 여성들이며 농촌이나 도시의 압도적 빈곤가정출신 여성이므로 명백한 계급ㆍ계
층차별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일본인 ‘위안부’는 피해자로서 나서는 자가 없다. 그 이유는 현재의
일본상황으로는 나서자마자 ‘매춘부’로 매도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본인 업자
의 조사와 더불어 일본인 전 ‘위안부’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사실을
규명하는 신중한 조사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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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관련...자료도 읽어보시면...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 정부가 ‘위안부’문제를 극동 국제군사재판이나
BC급 전범재판에서 추궁하여 여러 건의 ‘위안부’재판을 행했기 때문에 기록이 남게
되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들 재판자료나 재판 자체의
연구도 중요한데, 토타니〔戸谷由麻〕씨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관하여 네덜란드가
일본군에 의한 여성의 조직적 성적 예속을 광범위하게 입증하고자 하여 피해여성으로
서 아시아계여성을 선택했다는 점과 함께 그것이 <전쟁범죄>라는 주장을 역사상 처음
으로 확립했던 점 등을 논증했다.49)
하야시〔林博史〕씨는 군과 관헌에 의한 약취의
사례를 입증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증거서류를 다시 정리하여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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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위안부 관련애기라 모르시는 분들 읽어보시면 괜찮을거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