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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연재 - 2
게시물ID : history_116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15
조회수 : 99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9/16 02:42:23
2. 일어나는 프랑스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미국 독립파



─재정 파탄과 명사회의의 소집

저번 화에서 프랑스 혁명이 어떤 배경 속에서 잉태되었는지를 보았다면, 이번 화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시발점이 된 것은 프랑스의 재정 파탄 문제였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세계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3대 근대 초 혁명(영국, 미국, 프랑스)이 모두 재정 문제로부터 폭발했다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여러모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무언가를 가진 자들이 일으키는 혁명은 항상 그런 법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 프랑스의 재정은 루이 15세 때부터 이미 파산 직전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 절대군주정이라는 것이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드는 체제일 수밖에 없거든요. 지난 화에서 말씀드린 궁정과 대귀족들의 사치도 엄청난 수준이었지만, 군대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8세기 말은 본격적인 2차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와 생산력이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다가, 당시의 상비군은 전부 직업군인이었기 때문이죠. 물론 지금도 모병제 중인 나라는 많지만, 이미 말했듯 생산력의 수준이 다른 데다가 이 시대의 상비군은 심심찮게 전쟁에 나가 부상당하거나 죽어 돌아와 보상금을 타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사람들입니다. 안 그래도 휘청댈 수밖에 없는 이 재정에 결정적인 치명타를 날린 것은 미국 독립전쟁에의 참전이었는데, 여기서 프랑스는 20억 리브르를 지출했던 것으로 산출됩니다. 740리브르가 8파운드짜리 금괴 한 덩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실로 어마어마한 지출입니다.

이렇듯 밑빠진 독에 부어지는 물처럼 사라지는 돈을 어떻게든 부여잡기 위해서 앙시앵 레짐의 역대 재무대신들은 정말 갖은 인고의 노력을 다합니다. 관직을 팔고, 새로 관직에 들어오는 관리들이 예치하는 보증금의 액수를 늘리고, 왕족들의 생활비를 다소 절약하고, 징세청부인(*)들로부터 앞으로 걷을 세금을 미리 받는 수법도 씁니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이었던 네케르는 자신이 작성한 재정보고서에 가공의 잔여액을 기입하여 채권자들로 하여금 신뢰를 갖고 너무 빠르게 상환을 요구하지 않도록 하기도 합니다. 요새 말로 하면 분식회계죠. 그리고 이후 이 보고서는 귀족들의 반란 과정에서 탄핵의 대상이 되어,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심대한 역할을 한 분식회계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부채 총액은 이미 45억 리브르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지출을 줄이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으니 결국 최후의 수단은 수입을 늘리는 것, 즉 세금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세입 총액은 이미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1억 4천만 리브르가 늘어 있었고, 전국 각지의 고등법원들은 세금과 관련한 명령의 등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등재권에 대해선 전 화 참조). 게다가 이 세금이라는 것도 당시엔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어서, 귀족들은 세입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인두세를 면제받았고 경계도 불명확한 행정지역의 종류에 따라 세율이 다른 세금도 많았습니다. 중세 시대의 사인(私人) 계약에 기초한 법률도 많아서, 도시별로 세금을 일시불로 내는 지역이나 예전에 선불로 완납하고 면제받는 지역 혹은 완전 면제받는 지역 등이 깔려 있었고, 소금세는 심지어 소금 산지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다르기까지 했습니다.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특권 투성이의 세입과 도저히 막을래도 더 이상 막을 구석이 없는 지출 사이에서, 1786년 8월 20일 당시 재무대신이었던 칼로느는 루이 16세에게 더 이상 자신은 손 쓸 방도가 없음을 선언합니다. "더 이상 과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경제개혁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취해야만 할 유일의 방도… 단 하나의 수단은 국가기구 안에 있는 일체의 부정한 요소들을 개혁함으로써 국가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제 개혁안을 준비하는데, 개혁의 골자는 기존의 소득세가 수입에 대한 현금세였던 것을 토지 소유에 대한 현물세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평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고 있던 인두세와 소금세를 완화하기로 했죠.

하지만 이러한 내용의 개혁안을 궁정과 대립하고 있는 고등법원이 호락호락 등재해 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등재를 지원해줄 귀족들의 승인을 받기 위해 1787년 루이 16세는 약 한 세기만에 명사회의(assemblee de notables)를 소집합니다.

(*): 정부 대신 각 지방의 세금을 걷는 일을 맡아 했던 사람. 걷은 세금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받았기 때문에 그 징세 행태가 악랄하였으며 민중들의 원한을 사게 됨. 유명한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이 일을 하다가 혁명 중 처형당한다.



─반항적인 귀족들과 호응하는 평민들

명사회의에 소집되는 '명사'란 각 도시나 주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인물들을 말합니다. 왕족과 대신 또는 원수 7명, 고등법원의 원장이나 검사장 33명, 주교 11명, 고문관 12명(군대의 그 고문관 아닙니다), 삼부회징세주 대표 12명, 대도시의 시장이나 고문 등 총 144명이 1787년 2월 22일 베르사유에 모이게 되죠.

이들을 맞이한 칼로느는 현재 프랑스가 처해 있는 재정 상황과 비합리적인 행정을 설명하고 개혁안의 대강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들은 명사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왜냐면 분명 불과 4년 전에 나온 네케르의 재정보고서에서는 수입이 지출보다 많은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거든요. 이들은 정확한 예산서와 회계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고, 칼로느는 곤경을 피하기 위해 네케르의 분식회계 사실을 폭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족들은 격분하여 네케르와 칼로느를 소리높여 비난하고, 책과 팜플렛을 찍어내며 궁정과 대신들이 얼마나 비양심적으로 일해 왔는지를 프랑스 전역에 알리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혁명 초기의 중심인물이 되는 미라보 백작은 칼로느의 주식투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칼로느는 어떻게든 자신을 방어하고 귀족들의 꿍꿍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습니다.

사실 이 명사들이 정말로 투명한 행정 같은 데에 관심이 있어서 이 난리를 피운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귀족들의 특권을 축소시키려 하는 개혁파 대신을 몰아내기 위해 수를 쓴 것일 뿐이었죠. 또한 이 난리를 통해 증세를 위해 필요한 조치에 대한 주도권을 잡아, 절대군주정에 의해 빼앗겼던 각종 중세적 특권을 회복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라파예트처럼 진심으로 나선 사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게다가 아직 사태는 평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데까지 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칼로느의 개혁안은 부르주아의 입맛에 맞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아직 대체로 무관심했고, 대중에게 이 사태의 심각성이 알려지는 데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칼로느는 귀족들의 압박에 의해 해임되고, 루이 16세는 그 해 5월에 브리엔느라는 새로운 재무대신을 임명합니다. 이 자는 나름 똘똘한 데가 있었는지, 궁정이 자기 뜻대로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선 귀족과 부르주아의 암묵적 동맹을 깰 필요가 있음을 직시했죠. 이 때문에 그는 제 3신분(부르주아를 비롯한 평민)이 제 1신분(성직자)과 제 2신분(귀족)을 합친 것과 같은 수의 대표자를 갖는 주의회를 창설하고, 부역을 금납제로 바꾸며, 개신교도의 공민권을 회복시키고, 특권계층에게 부동산세를 부과할 의지가 있음을 내비칩니다. 명사들은 당장에 반항했고, 브리엔느가 제시한 개혁안을 대부분 기각시켜 버립니다. 당시 프랑스 제도 상 이렇게 되면 답은 하나, 삼부회 소집 뿐이었습니다. 역사가 알베르 마티에는 이 때 삼부회가 즉시 소집되었더라면 궁정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개혁의 진지한 의사를 확인시켜 귀족을 분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브리엔느는 명사회의를 그냥 해산시켜 버리는 최악의 방법을 택합니다.

명사회의가 사라지자 귀족들은 이제 법원을 중심으로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각지의 고등법원들은 브리엔느의 새로운 개혁안을 등재하지 않았고, 파리 고등법원은 브리엔느가 부과한 인지세 등재를 거부하면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7월 16일 파리 고등법원은 다시 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했으나, 왕은 8월 6일 어전법정을 통해 이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삼부회 소집이 귀족들의 주요한 요구사항이 되면서 서서히 평민들도 이에 호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의 법원들과 부르주아들은 파리 고등법원의 파리 추방에 대항해 복귀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베르사유에 벌떼처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인기를 등에 업은 고등법원들은 신이 났고, 그 해 11월 왕이 요구한 4억 2천만 리브르의 부채 승인을 다시 거부하며 삼부회 소집을 요구했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니 아무리 겁많고 둔한 루이 16세라도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는 1788년 4월에 주동자 고문관들을 체포하고 사법제도 개혁에 대한 명령을 재가합니다. 이 개혁안에 따르면 국왕이 주재하는 전권법원(Cour pleniere)이 고등법원을 대신해 왕의 명령을 등재하게 되고, 고등법원 관할 하에 있던 다수의 사건들을 신설될 대법원으로 이전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 특별법원을 폐지하고 형법상의 사전심문과 수사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 요소를 철폐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이 좀 일찍 이루어졌다면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지지를 등에 업고 사법귀족들을 분쇄할 수 있었겠습니다만... 이미 사태는 단순히 사법귀족의 특권에 관한 것이 아니게 되어 있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고등법원들은 위의 개혁안에 미친 듯이 날뛰며 각지 구석구석에서 사보타주를 선동했습니다. 그들은 법원에서 파업을 일으켰고, 새로운 대법원의 설치를 방해했으며, 건의문과 위협적인 판결을 남발했고 시위를 부추겼습니다. 이제 슬슬 부르주아들도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공업적인 주였던 도피네 주에서는 1778년 6월 7일 그르노블 시가 봉기하여 지붕의 기왓장을 뜯어 군대에게 던져 몰아내고, 7월 21일엔 자발적으로 제 3신분 회의를 결성하기까지 합니다. 베아른 주와 브르타뉴 주에서도 반항하는 고등법원을 폐쇄하는 군대에 맞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전국적인 저항은 대규모 군대 투입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기본적으로 귀족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진압에 소극적이었고, 무엇보다 문제였던 것은 고등법원의 파업으로 인해 군대에게 지급할 돈이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브리엔느는 국고의 지불 중단을 선언했고, 루이 16세는 굴욕을 삼키며 그를 파면하고 과거 분식회계 스캔들로 내쫓았던 네케르를 다시 데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789년 5월 1일에 삼부회를 소집한다는 것 역시 결정 사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겨우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제 3신분의 독립과 들끓는 프랑스

위에서 보신 바와 같이 귀족들은 왕의 폭정을 빌미삼아 부르주아 계급 및 자신들이 다스리는 농민들을 선동하고, 일부러 그들이 왕의 대리인들에 대항해 싸우도록 사슬을 느슨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삼부회 소집이 확정되면서 특권계급과 제 3신분 사이에는 새로운 균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약간의 납세를 대가로 과거의 정치적 특권을 되찾을 생각에 가득한 특권계급과 이 기회에 영국식의 입헌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평화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갈라진 두 세력을 각각 귀족정치가(aristocrates)와 애국파(patriotes)라고 부릅니다.

두 세력의 충돌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이미 애국파의 활동은 점점 위협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시민으로서의 평등과 대의정치의 원칙을 담은 팜플렛들은 이제 귀족정치가들에게 지옥의 속삭임처럼 보였죠. 애국파 역시 왕의 전제정을 귀족의 과두정으로 바꾸기 위해 자신들이 행동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굳건히 인식하게 됩니다. 이들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 것은 삼부회가 어떤 방식으로 소집되어야 하느냐의 문제였는데, 이것은 삼부회가 원래 백년전쟁 직후 소집된 지극히 중세적인 회의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족정치가들은 삼부회가 마지막으로 열렸던 1614년과 마찬가지로 모든 행정구역에서 각 계급별로 한 명씩의 대표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애국파는 훨씬 많은 수를 가지고 있는 제 3신분의 대표가 더 많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788년 9월 파리 고등법원은 삼부회가 과거의 방식으로 소집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렸고, 애국파는 이것을 귀족들의 결정적인 배신으로 간주하여 격렬히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고등법원을 장악하고 있는 사법귀족들이 부당한 입법활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사법관직의 매매와 세습을 규탄했습니다. 결국 파리 고등법원은 12월에 해당 판결을 취소했고, 제 3신분의 대표 수를 두 배로 늘리는 것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권계급의 귀족정치가들은 자신들이 이용한다고 생각했던 천한 것들의 반란에 당황하여 태도를 바꾸고 왕 옆에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3신분의 대표수를 늘리고 행정구역의 납세액에 비례하여 대표수를 결정하기로 하긴 했지만, 여전히 투표를 개인별로 할 것인지 신분별로 할 것인지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고등법원이 고삐를 풀어놓은 무질서는 이제 특권계급과 제 3신분 사이의 갈등으로 번졌습니다. 귀족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장악한 주의회를 방해하도록 하인들을 보냈고, 대학생들은 대로에서 시위대를 공격했습니다. 브장송에서는 고등법원이 삼부회 소집에 대한 양보를 비난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로 군중이 법관들의 집을 약탈했는데, 군대는 이들을 제지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문필가 말레 뒤 팡은 "공개적인 논쟁은 양상을 달리했다. …이제 그 논쟁은 제 3신분과 그 밖의 양대 신분 간의 전쟁이다."라고 썼습니다.

더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경제위기였습니다. 하필 삼부회 대표 선출기간에 프랑스 섬유 산업은 영국과의 통상조약으로 인해 고용을 줄일 수밖에 없었고, 1788년의 식량 수확은 평년작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었습니다. 굶주린 대중에게 사제들은 설교단에서 삼부회의 소집과 그것이 타파하고자 하는 제도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대중은 이제 삼부회에서 부당하므로 없애겠다고 하는 각종 세금을 통해 쌓아 올려진 영주의 창고를 주목했습니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1789년 3월부터 각지에서 군중들은 곡물창고를 개방하고 곡물의 운송을 중단시키며 곡물가격을 마음대로 고정시켰습니다. 파리에서는 4월에 큰 벽지공장이 약탈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삼부회 소집 준비 시기를 통해 프랑스 인민은 아주 독특한 정신적 재창조를 경험합니다. 이들은 과거 수백 년 동안 오직 짓밟히고 빼앗기는 것 외엔 국가라는 것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사제가 이제 우리가 이 나라의 세금과 제도에 대해 조언하게 되었다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브리엔느가 창설했던 주의회, 군의회, 농촌의회는 약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부르주아와 농민들을 불러 모아 각종 공적 업무를 경험해 보는 기회도 제공했습니다. 이들은 드디어 왕이 자신들을 굽어살피기 시작했다고, 비로소 그 동안의 비참함과 부정은 끝장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왕의 뜻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비참하게 하던 모든 것을 끝장내는 것이 국가 최상층의 의사와 일치한다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대담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단순히 몇몇 세금만을 겨냥하는 것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또한 잘 반영되어 나타난 현상이 바로 각종 팜플렛과 인쇄물들의 범람이었습니다. 체포와 구금, 고문에 대한 공포 속에 숨어 있던 문필가들이 일제히 구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의 포문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명의 법률가, 사제, 학자들이 수천 종의 팜플렛을 작성했고, 이것들은 살롱과 저택에서뿐 아니라 오두막집과 교회당, 다락방에서도 읽히게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시에예스의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 역시 이 시기에 작성되어 발표된 것입니다. 이러한 문필가들은 자신의 저술을 인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진정서로 대신 작성하는 일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아르투아 제 3신분을 대표하여 아라스의 구두수선공 조합의 진정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습니다. 제 3신분은 예비 회합을 조직하고, 통신과 교류를 위한 거점을 마련하며, 프랑스 가장 벽지의 가장 천한 사람들의 청원까지도 하나하나 문서화시키면서 앞으로 다가올 삼부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들끓는 소용돌이 속에서 각 지역은 어렵게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합니다. 귀족들은 귀족정치가에 속하는 소수의 제 1신분(주교 이상의 고위사제들)과 다수의 제 2신분(대부분의 귀족들), 그리고 애국파에 속하는 다수의 제 1신분(평사제들)과 소수의 제 2신분(몇몇 자유주의적 귀족들)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제 3신분은 아주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아직 자신들 안에 존재하는 분열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법률가들과 사장들을 중심으로 대표를 선출했습니다. 3~4월 두 달에 걸쳐 소집된 이 대표들은 예정된 1789년 5월 1일, 베르사유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현대 세계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은 이제 두 달 남짓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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