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52센티미터인 21살 체구가 작은 여자 사람이다. 어제 교대역 근처에서 키가 매우 큰 여자사람친구 하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사람친구 하나, 셋이서 길을 걷고 있었다. 건너편에선 할아버지 한 분이 오고계셨는데, 내 앞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까꿍!!!" 하고 외치신 후 가던 길을 가셨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앗 깜짝이야!!!!" 하고 소리지른 후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러자 친구들이 "왜 화를 안내?"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왜 화를 내라는거지? 나는 다치지도 않았고 피해를 입은 것도 없고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인데. 하하 이녀석들 파이터의 피가 흐르는군~ 하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것은 내게 있어 화낼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매 주 라고 하기에는 조금 오버이지만 적어도 한달에 한두번은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까꿍' 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지만, 길을 지나가다 보면 갑자기 내 팔을 잡았다가 다시 제 갈길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바로 앞에서 "왁!!!!" 하고 놀래키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꼬마야~" 하고 부르고선 눈마주치면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나만 겪는 일도 아니었다. 나의 단짝 친구들은 대부분 체구가 작다. 그리고 그들과 걷다보면 이런 일들을 꽤 자주 겪는다. 기억나는 일만 몇 개 적어보자면, 복실복실한 파마머리 친구는 길가다가 "우쭈쭈쭈 강아지야~"거리는 청년 무리를 만났고, 고등학교때 하교길에서는, 이건 좀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나와 친구들에게 가운데손가락을 보여주고는 도망가버린 오토바이 탄 2인조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러니까 이건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는 "오늘 어떤 할아버지가 나한테 까꿍! 하고 놀래키고 도망갔어" 라는 말은 "오늘 참새가 날아가면서 똥싸는거 봤어!" 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매일 있지는 않지만 너무나도 사소한. 종종 혹은 가끔씩 겪는. 사건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일상.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단 남자 사람 친구는 "나한테 그러면 시비거는거지. 싸우자는거 아니야" 했고, 여자 사람 친구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이것은 흔히 겪는 일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일상이었던 일이 남자 사람한테는, 키 큰 여자 사람한테는 너무 낯선 사건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가 마동석이었다면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내게 까꿍을 했을까? 마동석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남자 사람이었으면, 혹은 키가 큰(만만하지 않은) 여자 사람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러니까 이들 중에서 가장 '만만해보이는' '어린 년'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겪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만만해보이는 어린 년'이 겪어야 하는 일종의 '성차별'이라는 것마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중여고를 나왔고, 외동딸이기에 성차별을 직접적으로 느낀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대학교를 진학한 후에는 여자의 삶에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부당한 일이 있구나를 느꼈다. 술자리에서 친한사람 하나 없지만 "칙칙하다" 라는 이유로 일부러 남자만 있는 테이블에 앉힌다던가, "선배님 밥사주세요~" 하면 "너 같이먹을 친구로 여자애데려오면 비싼거 사주고 남자애 데려오면 김밥천국갈꺼야!" 라던가.
하지만 까꿍사건으로 깨달았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 인지조차 못할정도로 성차별은 나의 일상 속에 있었다. 지하철에서 할아버지들의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 속에서,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맛있지 거리는 '개저씨'스러운 술자리 속에서 조금씩 꿈틀대던 나의 페미니즘이, 정말 사소한 까꿍사건으로 퍼퍼퍼펑 생겨났다.
어제 나는 도서관에서 페미니즘 책을 빌렸다. 지금 그것을 읽고있다. 아직까지는 그냥 막연한 생각뿐이다. 페미니즘에 관한 강연 하나 들어본 적도 없고 아직 완독한 책도 없다. 아직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앞으로 배워야할 것이 많다. 하지만 어제 이후로 나는 말할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성차별에 대해, 부당한 사건들에 대해, 인권을 위하여 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