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추운 오늘 장판속에서 뒹굴거리다가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끄적여보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편의상 경칭은 생략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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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 순수하고 호기심많은 아이가 살고 있었다. 아이의 눈은 초롱초롱한 별빛같았으며 끝없는 호기심과더불어 영특한 머리는 주위 어른들을 놀라게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화에서도 나오잖나. 악의는 없지만 세상을 혼돈으로 만들 문제거리를 단지 호기심때문에 풀어낸 사람. 이름이 아마 판도란가 그랬지? 하여간 판모씨의 딸 모도라양처럼 끝없는 호기심을 가진 아이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수순으로 시나리오가 짜여있었는지도 모른다.
될성부른잎은 떡잎부터 다르다란 속담이 있다. 그렇다고 세상일이 교과서적으로 돌아간건 아니었기에 아이는 국민학교2학년까진 그럭저럭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딱 거기까지였다는게 한계였지만 지금와서 돌이켜보건데 남들보다 조금 원초적으로 살아도 그리 불편한건 없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일이다.
그렇게 운명의 국민학교3학년이 된아이는 부모님이 부재중인틈을타 집안 방방곡곡을 누비며 온갖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있던도중 장롱속에서 두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하게된다. 아무것도 쓰여있않은 비디오테이프... 당시에는 뭔지 잘몰랐지만 적어도 테이프서랍장에 없는 테이프라는 점에서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본능적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아이는 아이에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 테이프가 뭐냐고? 살짝 풀린 슬픈눈을 가진 여배우의 열연이 돋보이는 예술영화였다. 그래, 엠마뉴엘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뭘 알겠냐싶다만 새는 자연스레 하늘을 날고 생선은 헤엄을 칠줄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부모님께 혼나는일이라는 것을 간파한뒤 테이프를 장롱속에 감추고 뛰는 가슴을 달랬다. 어릴적부터 많이 사고를 치고다닌탓에 혼날만한일에는 자연스럽게 감을 잡는, 이른바 후천적노력이 만들어낸 행동이었다.
그렇게 물꼬가 터지자마자 내가 한 일은 집안의 비디오(상당히 많았다. 대략 백개에 가까운 비디오가 있었음.)서랍장을 탐험하는 일이었다. 이는 굉장히 은밀하게 진행되었는데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안계신 시간을 노려야했기에 타이밍잡는 일이 쉬운건 아니었다. 또 어린이의 성숙상 당시에는 고급기술인 비디오의 조작도 힘겨웠다.
하지만 두드리면 열리는법,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나의 비디오컨트롤은 부족한 시간을 엄청난 집중도로 만회하며 나날이 일취월장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구석에서 보물 세 개를 발견했으니 각각 파라다이스, 프라이빗스쿨, 블루라군이었다. 뭐 영화의 내용이야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테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그당시 감동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을 찾은 광부를 넘어 성배를 찾은 원탁에 기사에 비할만큼 감동적이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라는 건 표면상이고 사실 조리돌림당하기 싫음...)
그렇지만 신화가 다 그러하듯 낙원은 마지막에 붕괴하기 마련이다. 나의 비밀스런 취미는 어이없게도 엠마뉴엘에서 나오는 음악을 휘파람으로 부르다 아빠가 눈치를 채시며 끝나게 된다. 아빠는 그래도 금쪽같은 핏줄인지라 때리시진 않았지만(어릴적에 할아버지께 엄청 맞으셔서 그런지 나에게 손을대지 않으셨다.) 조용히 테이프를 감추시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셨다.
당시의 내 심정은 '차라리 때리지.'로 압축할 수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께 반항하는건 한국사회에서 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격이니 무력한 당시의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낙원의 붕괴를 지켜봐야했다. 뭐 아빠도 차마 못 버리셨는지 몇년뒤 이사간 집에서 다시 찾기는 했다만...
아무튼 분서갱유에 버금가는 화를 경험하고 다른쪽으로 본능을 분출하기위해 돌파구를 찾던 나는 아빠의 서재에서 기묘한 낡은 책들을 발견하는데... 덕분에 옛날에 나온 세로쓰기 책들도 불편함없이 볼 수 있는 기술을 얻게된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 대해서도 쓰고 싶다만 오늘은 너무 추워서 장판속으로 돌아가야하니 패스하겠다.
다시 돌아와 그녀에 대한 정리를 하자면 시간이 훌쩍지난 지금도 나에게있어 엠마뉴엘부인역을 맡으셨던 실비아옹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과장 좀 보태면 내가 죽어 천국에 갔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면 기꺼이 지옥으로가서 그녀의 오른편에 앉고싶을 정도다. 뒤에 나온 피비양이나 브룩쉴즈여사도 포스는 있었지만 실비아 크리스텔의 그 몽환적눈에 비교한다면 빛이 바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도 가끔 생각날때면 이제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서 추억에 잠기곤한다. 그녀는 영화배우로서 이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았다지만 감히 말하건데 그 옛날 소년소녀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성모에게 누가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계획없이 무작정 써내린 글이라 두서도 없고 가독성도 떨어지는 졸렬한 글이지만 천국에 있을 그녀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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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네요. 이불속으로 들어가야겠어요.
다들 건강 잘 챙기세요~!
출처 |
나의 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원초적 기억력과 당시에 억지로 썻던 일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