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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해의 지배자, 해적왕 정지룡(3) ─ 새로운 바다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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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5
조회수 : 1063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01/22 22: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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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룡과 다가와 사이의 관계는 나중에 정성공의 이야기를 위해 남겨두고, 우선 둘 사이와의 관계하곤 상관없이 정지룡에게는 또다른 혼담이 들어옵니다. 이단의 조직내에서 정지룡에게 안(顔) 씨라는 여자와 관계를 맺을 것을 권한 것이었습니다.



안씨는 복건 출신으로 이단 패밀리의 일원이 된 안사제(顔思齊)라는 인물의 딸이었습니다. 즉, 이 결혼은 정지룡 내에서 조직내의 입지를 강화시켜줄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해보였기에, 정지룡이 이단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다면 반드시 해야만 했을 결혼이었습니다. 이 말은 정지룡이 안씨와 결혼하게 되면 다가와는(관계를 언제 맺었건) 정실 부인이 될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안씨 부인과의 관계에서 정지룡은 정세습, 정세도, 정세음, 정세은이라는 자식들을 두게 됩니다. 그러던 중, 네덜란드가 마카오를 손에 넣기 위하여 포르투갈인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생기죠.



이 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먼저 써놓은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그 글에서 언급을 했듯이, 이단은 이 과정속에 교모하게 줄타기를 하며 영국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네덜란드 인들에게도 사기를 쳤는데, 그 과정에서 통역으로 활약했던 인물이 정지룡이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일이 잘 안 풀리는데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가 업으면 대신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하기 마련인데, 네덜란드 인들은 이단과의 협상(을 가장한 사기)이 잘 안풀릴때는 정지룡이 통역을 이상하게 하는 탓이라고 하면서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정지룡은 네덜란드 인들이 어떻게 여기건 그들과 착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무튼 네덜란드 인들이 대만 정착에 성공하면서 이 일에 큰 힘을 썻던 정지룡의 조직 내 입지도 높아졌습니다. 정지룡은 곧 패밀리 내에 정지표, 정지호를 비롯한 형제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조직 내 영향력을 높이는데 주력했습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입양이 있습니다. 입양이라고 해도 전혀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을 가난한 농부 손에서 사들여 조직의 일원으로 만드는 반 인신매매 비슷한 일인데,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혹독한 대우를 겪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의 고통과 경험을 감수해내어 몇 안되는 최후의 한두명이 된다면, 마침내 그들은 진정한 양아들이자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지룡도 비슷한 방식을 취했고, 그리하여 정지룡의 양아들로 인정받은 인물이 정태(鄭泰) 입니다. 지금보다는 정성공의 시절에 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인데, 실제 진짜 정지룡의 인척들은 그를 오만불손하다고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1624년에는 정지룡의 아버지 정소조가 사망함으로서, 장남인 그는 고작 23세의 나이로 정씨 가문을 떠받들어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7명이나 되는 형제들은 모두 정지룡의 밑으로 몰려왔습니다. 형제가 이토록 많은것은 아버지 정소조가 부인을 세명을 두었던 것도 원인이고, 사촌형제나 의형제도 많았던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렵 정지룡이 모시는 상관 이단에게 곤혹스러운 시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계속 사기에 말려들던 네덜란드 인들이 마침내 이단과의 관계에 넌더리를 내면서 다른 통로를 찾아보았던 것입니다. 허심소(許心素)라는 인물이었습니다. 허심소는 본래 이단의 휘하에 있던 인물이지만, 독립해서 자신의 세력을 가지고 이단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중국산 비단과  상품들을 네덜란드에 공급해주었습니다. 



두번째로, 바보짓을 거듭하던 콕스와 영국인들이 마침내 일본 무역에서 손을 때버렸는데, 이 모습을 본 네덜란드 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영국인들을 쫒아내기 위하여 영국인들의 빚을 자신들이 탕감해주겠다고 권유했습니다. 당연히 콕스는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채는 70,000만냥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들과 이단 사이의 계약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이단은 네덜란드 인들로부터 돈을 쓸어담아야 합니다. 문제는,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이단에게 이 돈을 지불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이단과 교역을 하지 않더라도 허심소라는 훌륭한 대체 거래처가 있습니다. 결국 이단은 돈을 받지를 못했고, 재정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이단은 1625년 8월 12일 히라도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파란만장한 생에에도 불구하고 고령까지 살았습니다. 이단이 죽었으니 그 조직이 요동칠것은 자명한 일이었죠. 그리고 이단 사후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안사제 마저 곧 죽어버리고 맙니다. 네덜란드 인들을 비롯해서 모두가 이단의 조직이 어떻게 될지 우려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조직원들은 그 시점에서 산더미 같은 빚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정지룡은 이단이 사망할 당시 매우 값비싼 화물을 실은 선박 2척을 소유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것들을 판 자금을 정지룡은 유용하게 사용했고, 유언을 날조해 공개해서 이 두척의 선박을 정지룡 자신에게 귀속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단의 조직이 박살나고 10여명에 가까운 부두목들이 서로 적법한 후계자를 자처하고 독자적으로 교역을 하고 해적질을 하는 혼란속에서, 정지룡은 그 2척의 배를 발판삼아 선원을 모으고 사략함대를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배에 네덜란드 깃발을 세우고, 에스파냐 령 마닐라로 가는 항로를 지키고 있다가 지나가는 선박들을 무차별적으로 나포하기 시작한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리품을 네덜란드와 나누어 가졌는데, 그 덕택으로 네덜란드 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또다른 도움이 되었는데, 이 과정속에 그는 네덜란드의 근대식 전함을 부리면서 근대식 전함에 대한 이해도 많이 높일수 있게되었습니다.




이러는 과정 속에 네덜란드 인들은 정지룡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점점 올리게 되었고, 정지룡 본인의 해적 사업도 호황을 맞게 됩니다. 1626년에 이르면 네덜란드 인들에게 28,000만 냥에 달하는 도자기를 선물해주었고, 9척의 선박을 추가로 지원해 주기도 하는데, 이 말은 정지룡이 그 정도 지원을 해주어도 무리가 없을만한 대 세력이 되었다는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정지룡은 대만 ─ 복건 루트라는 수익성이 높은 루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루트를 장악하고 있는 허심소를 밀어내야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둘은 이제 대결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고, 동시에 해적이라는 오명을 벗어볼 방도가 없을까도 궁리했습니다. 그들 모두 부하들의 신망을 얻고 있고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지만, 명나라 정부 입장에서 보면 해적이자 밀수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1627년 둘은 동시에 똑같은 기회를 잡게 됩니다. 숭정제의 사신이 동일한 내용의 임무를 가지고 정지룡과 허심소에게 도착한 것입니다. "명나라 정부에게 도전하는 해적들을 물리쳐라" 는 것입니다.

 

 

 

명나라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했습니다. 양측 선단이 서로를 괴멸시키거나 최소한 살아남은 한쪽의 군사력이 약화되거나 하는게 목적이었는데, 일본측 기록으로는 당시 서한이 서로 바뀌어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정지룡에게 "악명 높은 해적 정지룡을 없애라." 라는 서한이 전달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지룡은 천연덕스럽게도 굳은 표정으로 비장하게 대답했습니다.

 

 

"신명을 당해 정지룡을 잡아다 바치겠나이다."

 

 

 

물론 자신을 사로잡아 조정에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정지룡이지만, 최소한 명 정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정지룡은 일단 의도대로 움직여주어서, 하문으로 모든 함선을 이끌고 허심소를 기습 타격했습니다. 승리자가 어느쪽이 될지, 네덜란드의 선원들은 이 모습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서양 선교사 - 팔라폭스(Palafox)라는 인물 - 기록에 따르면, 정지룡은 직접 상대편 함선에 뛰어들어 적병의 목을 베는 용맹을 발휘한 끝에 마침내 승리자가 되었고, 허심소는 전투 중에 사망하고 맙니다. 허심소가 사망함과 동시에 그의 세력과 부하들은 정지룡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이제 정지룡은 이전보다도 더 거대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하게 말해, 그 시점에서 그는 남중국해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명나라 조정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습니다. 정지룡은 이제 건드리기조차 힘든 괴물이 되어있었고, 뜻밖의 사태에 지방 관리들은 발뺌을 하면서 어물어물거리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러는 동안 정지룡의 세력은 더더욱 커져만 갈 뿐이었습니다. 

 

 

복건 도독을 비롯한 명나라측의 관리들은 정지룡에게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접근해서 (자신들도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 무리의 해산을 권했고, 정지룡이 (형식적으로 나마) 이에 동의하면서 "점차 해산시켜 나갈것"을 약조해 양측의 미묘한 긴장관계는 어느정도 풀렸습니다. 명나라 조정은 1628년 무렵 정지룡에게 초무(招撫))라는 벼슬을 주었는데, 이 이름을 바탕으로 정지룡은 자신에게 거스르는 해적들을 "국가의 승인 아래 합법적으로" 떄려 눕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Ming_Chongzhen.jpg

숭정제

 

 

사실 정지룡에 관련된 문제는 당시의 명나라 조정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숭정제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사태는 악화일로를 겪고 있었고, 만주족의 발흥은 가공할 수준이었으며 대기근은 절망적이었고 반란군은 벌떼처럼 늘어만 갔습니다. 이렇게 다량 발생한 유민들을 정지룡은 이단이 그랬던 것처럼 부지런히 대만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그러던 중, 네덜란드의 새로운 대만 총독이자 일본 대사로 피터르 누이츠(Peter Nuits)라는 인물이 부임해 오게 됩니다. 그는 젊었고, 또한 오만했고, 경험도 일천했으며 하는 일은 문제 투성이 뿐이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삽질과 문제만 해도 한회의 분량은 될만하기에, 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계속 하겠습니다.

출처 http://cafe.daum.net/shogun/MqaT/17
원작자님의 요구가 있을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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