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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필이지만 선조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4)
게시물ID : history_116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1
조회수 : 92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9/14 10:40:46
 
왜란의 와중에 벌어진 선조의 무능함이 절정에 달했음을 말해줌과 동시에 신하들을 상대하는 그의 달리 표현하자면 편집증적인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코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을 들수 있겠습니다,

두 사건 모두 당시 민심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선조의 사건을 대처하는 방식을 통해 그가 평소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수 있습니다.

비교적 후자는 전자에 비하여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 다룰정도로 유명한 편이나 전자는 선조가 본격적으로 이순신등 전공을 세운 신하들을 견제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결코 후자에 비하여 유명하지는 않지만 덜 중요하지는 않을것입니다.
 

충청도 조도 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이 치계하였다. “전 교관(敎官) 유징(柳徵)이 와서 말하기를 ‘목천(木川)에 사는 교생(校生) 석경천(石擎天)이 「천안(天安)의 군기 감관(軍器監官) 송망기(宋望氣)·준기(俊氣)와 그의 아비 송흥수(宋興壽)가 도적에게 사로잡혀 갔고, 동군(同郡)의 유춘복(柳春福)·송연복(宋年福)·박순개(朴順介)도 도적에게로 들어갔는데, 어느날 이들이 나와서 동군 사람들에게, 적장(賊將)의 성(姓)은 이(李)인데 그 이름은 말할 수가 없고 현재 청계산(靑溪山)에 머물고 있으며 춘천(春川)·해주(海州)에 각각 1진(陣)씩 주둔하고 있는데 그 여당이 충청도에 산재하여 있고 또 1진은 전라도에 있는데 이달 1월 20일에 거사하려 하며 전라도에 있는 1진은 동궁의 행차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유인하였다. 」고 했다.’ 하였습니다.”

선조 실록 27년 기사
 
 
송유진의 난은 충청도 조도어사의 보고로 알려지게되었습니다, 보통 반란이라는게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에서 쉬운일도 아니고, 더욱이 유학이라는 기저 사상이 깔려있는터라 명분이 필요한터, 송유진은 이씨를 내세웁니다,
 
이래저래 이 씨라는 성이 참 좋은게 왕의 방계 혈족을 따지고 들어가면 사람들이 한둘도 아니라 명분이 없다고 감히 단언하기 어렵기에 신뢰성도 있고 더욱이 현재 선조의 즉위가 위로 수많은 계승 순위권자들이 존재했던터라 상당히 명분에 취약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노릴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습니다만 반란이 성공한다는 결론이 있어야 괜찮었던 것이지요, 네 당연하게도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반란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의병들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중략)
 
상이 이르기를
 
“악비(岳飛)가 용맹을 떨치는 것이 때때로 신(神)과 같았는데도 종택(宗澤)2312) 이 ‘그대는 적 몇 명을 대적할 수 있는가?’ 하니, 악비가 ‘용맹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도략(鞱略)을 알아야 적병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하므로, 종택이 ‘그대는 항오(行伍) 가운데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었다. 지금 덕령이 스스로 5∼6리(里) 밖에다 진을 치고 단기(單騎)로 돌입하여 짓밟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겨서는 안 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경성의 간세인(奸細人)이 도적과 서로 내통할 경우도 없지 않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하니, 충겸이 아뢰기를,“전번 해서(海西)의 도적 임꺽정(林巨叱正)의 말에 ‘우리 당여 가운데 1인이 정원의 사령(使令)이 되어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조정의 일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비록 미세한 공사(公事)라 할지라도 내가 반드시 직접 가지고 보겠으니 내관(內官)은 한 사람도 전독(傳讀)시키지 말고, 정원에서도 직접 처리하도록 하라.
 
(생략)
 
선조실록 27년 기사
 
 
(생략)
 
비변사가 아뢰기를,“삼가 충청 병사 변양준(邊良俊)의 서장을 보건대, 역적 송유진의 초사(招辭)에 드러난 사람에 대해 그 허실은 알기 어려우나 십분 계책을 강구하여 제때에 체포하여 빠져나가는 적이 없게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 이름이 노일개(盧一凱)라는 자는 아주 믿을 수는 없으나 담화할 즈음 그 아비가 천안 군수라고 하였다 하니 추포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급히 수탐하여 체포할 것으로 변양준(邊良俊)·이일(李鎰) 등에게 하유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보령(保寧)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산겸(李山謙)인 것 같습니다. 산겸은 일찍이 의병(義兵)에 투탁하여 거느린 군사가 자못 많았으나 한 사람의 왜적도 체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중국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개성(開城)에 와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말솜씨가 상당히 능란했다고 합니다. 그 뒤 호서(湖西)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산겸이 모집한 군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산속에 쌓아 놓은 군량과 무기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체포하면 뇌옥(牢獄)에 굳게 가두고 반복하여 단서를 추열(推閱)할 것은 물론 무기의 거처도 일일이 추문하여 수취(收聚)해다가 관군을 위하여 사용하게 할 것으로 아울러 하유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실록 27년 기사
 
(생략)
 
 
물론 의병의 이름아래 벌어지는 일들이 항상 옳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오인 사살도 적지 않았지만, 반대로 정말 의병의 탈을 쓴 도적들이 횡횡하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다만 이 경우는 경우가 확실하게 다른 것이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무능하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의병들은 왕실의 보위를 위해 일어난 병력들이고 그 바탕은 제승방략 체제에 따른 지방군들이거나 가산을 바탕으로 일어난 이들입니다, 결과적으로 반란의 결과물들은 반란 그 자체라기 보다는 전란의 이전에 치열하게 전개된 신권과의 신경전이 전란의 와중에도 벌어진 것이라 볼수가 있겠지요.
 
이쯤에서 끌려들어간 이 들을 살펴보자면, 김덕령은 광주 유생 출신으로 광해군의 명을 받아 봉기한 의병장으로 이 때 끌려들어간것은 아니지만 견제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산겸이라는 의병장을 설명드리자면 보령 출신의 서얼로 의병장 조헌 밑에서 종사하다 조헌이 패하고 죽자, 휘하의 장졸들을 규합하여 항쟁하던 사람입니다, 무예가 출중하여 중국에서 온 장수도 감탄을 그지 못했다고 하는데, 너무 잘나도 문제는 문제라는것은 군주제 아니 선조의 휘하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일겁니다.
 
결국 반란과는 무관한게 맞지만 별 전과도 안 세우면서 장악한 의병을 해산 시키지 않은 것이 의심스럽다는 죄목 하나로 추국을 받다 그는 그렇게 죽고 맙니다.
 
 
의병장(義兵將) 이산겸(李山謙)이 역적의 무고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역적과 대질한 결과 역적의 말이 꿀렸는데도 이산겸은 오래도록 구금된 채 풀려나지 못하였다.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이산겸이 의병을 장악하고 해체하지 않은 그 정상이 의심스럽다.”하여, 마침내 형추(刑推)하도록 명함으로써 형장 아래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
 
선조 27년 기사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선조 실록에서는 추국이 3월에 이루어졌지만 선조 수정 실록에서는 1월 1일의 기사에 사망했다고 나옵니다, 날짜의 차이는 있지만 1~3월 사이에 그렇게 사망했다고 보시면 될듯 합니다.)
 
반란이라는게 보통일이 아닌데다 전란의 와중에 벌어진 터라, 몇번을 파헤쳐도 모자람이 없는 것은 맞습니다만 송유진의 난은 너무나 지나쳤습니다, 오죽하면 추국청의 위관이 나서서 제대로 된 증거 하나 없이 너무나 많은 이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인다고 상소를 올리겠습니까?
 
평소 가까웠던 지인을 떠나 공연한 의심이나 소문, 예의상 한두 차례 오가던 사이까지 남녀노소 가릴것없이 닥치는대로 체포하여 추국을 가하니, 흉흉하던 민심이 어찌되었겠습니까? 말 그대로 전란의 와중이라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정도로 아수라장을 벌이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은 결국 2년뒤에 다시금 폭발하고 맙니다.
 
바로 이몽학의 난이었지요.
 
충청도 홍산(鴻山)의 서인(庶人)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몽학은 종성(宗姓)의 서족으로서, 호서(湖西)에서 종군할 적에 조련 장관(操練將官)이 되어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우거하면서 선봉장 한현(韓絢) 등과 친교를 맺었다. 몽학은 어리석고 아무 재능이 없었으나 한현은 교활하고 일에 밝았다.당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을 가지고 군사를 배치하고 기량을 훈련시켰는데 한현은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모두 서인으로 응모하여 함께 선봉장이라 호칭하면서 어사 이시발(李時發)에 소속되어 호서의 군사조련을 관할하였는데 민심은 탄식과 원망으로 차 있었고 크고 작은 고을에 모두 방비가 없음을 보고 이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때 현이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洪州)에 있다가 우선 몽학을 시켜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내포(內浦)에서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을 정하였다.몽학은 무량사의 굴속으로 잠입하여 중들과 더불어 기치(旗幟)와 기장(器杖)을 만들었다. 호서의 풍속에 흔히 늘 동갑회(同甲會)를 만들었는데, 이에 그 패거리를 시켜 계(契)를 만든다고 선전하고 동네 어귀 들판으로 모이게 했다.【갑회(甲會)란 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동갑마다 깃발을 세우고 그 갑년을 써 놓으면 무리들은 각자 그 동갑을 찾아 모여 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몽학은 절에서 출병(出兵)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깃발을 세우고 걸상에 앉아 각(角)을 불고 북을 치면서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갑 모임 중에서 공모한 장정이 먼저 나와 칼을 뽑아 들고 무리를 데리고 달려나갔다. 몽학은 그들에게 속임수로 꾀기를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고 하니 모두들 좋다고 떠들면서 그를 따랐으며,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聖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와 속인을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의 청현직으로 가칭하니 사족 자제와 무뢰배들이 많이 그들에게 붙었다.그날 밤에 홍산현(鴻山縣)을 습격하여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영현은 무자년에 생원시에 장원하여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어 광해군(光海君)이 그에게 배웠으며 그 뒤에 지금의 관직으로 전직되었다.】 또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을【문과 출신이다.】 사로잡았다.
 
다 항복하여 몽학에게 붙으니 상빈(上賓)으로 대우했다.잇따라 청양(靑陽)·정산(定山) 등 6개 고을을 함락시켰다. 수령들은 모두 먼저 도망치고 아전과 백성들은 적들의 호령에 따랐고 술과 음식을 차려서 맞이하였으며 군사를 뽑아 그들에게 가세하였다. 이에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이어 군사가 수만 명에 달하자 소문을 퍼뜨리기를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과 의병장 곽재우(郭再祐)·홍계남(洪季男)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내응한다.’ 하니, 중외(中外)가 놀라 민심이 술렁거렸다.
 
 
선조 수정실록 29년
 
 
전주 이씨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이러한 흉흉해진 민심을 업고 당시 명망있던 의병장에 이름을 빌어 병력을 모아 무능한 조정을 대신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만든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화려하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안타깝게 끝나지만 실상은 참 어처구니 없이 끝나게 됩니다, 늘어난 병력을 통솔하지 못하고 의병장들의 이름을 빌어 간신히 이끌다, 이게 시쳇말로 말하는 뻥카라는 것을 깨달은 휘하의 장졸들에 의하여 그 목에 현상금이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된 이들에 의하여 죽음을 맞이하게되니 말입니다.
 
아무튼 이 이몽학의 난은 꽤나 파장이 컸습니다, 송유진의 난으로 의심과 경계를 키워나가던 찰나에 의병장들과 합류하여 진격하며, 안에서는 병조 판서가 내응한다는 것은 앞서 벌어진 임꺽정의 계책과 대동소이한데다, 이게 벌어진다면 당장 자신의 목이 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결국 선조는 의병장으로 명망이 높던 이몽학이 가장 가까이 한다고 추측해볼수 있던 김덕령을 추국하기에 이르는데, 앞서 설명한 선조의 히스테릭하다고 표현하는게 합당한 수준이라는 그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생략)
 
상이 이르기를,“김덕령을 따로 가두어 두었는가?”하니, 신점(申點)이 아뢰기를,“사가(私家) 한 칸에 가두었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별처(別處)에 가두어 두고 병조로 하여금 실한 군사를 더 배정하여 수직하게 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김덕령은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여러 역적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옛적부터 역적을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문서를 기다려 본 다음에야 다스렸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는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상황이 이러하니 반드시 살게 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차차 따져 물어 실정을 얻어내야 합니다.”하고,
 
윤두수(尹斗壽)는 아뢰기를,“이와 같이 큰 옥사는 비록 뒷날까지 기다리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니 우선 오늘 문초해야 합니다.”하고, 이기(李墍)3462) 와 유영경(柳永慶)3463) 이 아뢰기를,“이는 성상께서 재량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마는, 옥사의 사체로 말하건대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면 우선 후일을 기다렸다 하는 것이 무방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담령(崔聃齡)을 신속히 잡아와야 되니 즉각 선전관(宣傳官)을 내보내라.”하고, 또 이르기를,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 이빈(李賓)이 그를 절제(節制)하는 장수였는데도 또한 죽이려고 했었다니 그 죄 역시 크다.”하고, 또 이르기를,
 
“김덕령을 수직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긴밀하게 하라. 자진(自盡)하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된다.”하고, 또 이르기를,“김덕령을 내보내도록 하라.”하였다.
 
신시(申時)에 국문을 파했다.
 
선조 실록 29년 기사
 
 
덕령은 여러 날 동안 갇혀 있었고 상은 혹시 변이 일어날까 의심하여 옥문을 굳게 잠글 것을 명하였고 의금부는 건장한 군사 1백여 명을 동원해서 굵은 밧줄로 묶어둔 다음 밤낮으로 에워싸고 지키기를 마치 많은 적군을 방어하듯 하였다.
 
수백 번의 형장 신문에 드디어 정강이 뼈가 모두 부러졌는데도 조용하게 스스로 변론하며 말씨가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신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계사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삼년상의 슬픔을 잊고 하늘에 사무친 원수에 격분하여 모자간의 정을 끊은 채 상복을 바꿔 입은 다음 칼을 짚고 분연히 일어나 여러 해 동안 종군하였지만 아직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해서 충성도 펴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효만 하였습니다. 죄가 이에 이르렀으니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지금 목숨이 다하게 되었으니 다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신이 모집한 용사 최담령(崔聃齡) 등이 죄 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라고 했을 뿐 시종 다른 말이 없이 죽었다.
 
선조 수정 실록 29년 기사
 
 
 
선조의 이러한 행각은 그가 다른 뜻이 있어서 벌인 것은 물론 아닙니다, 순전히 그의 정치적인 신념, 그리고 여지껏 해왔던 신권에 대한 공작 등이 어우러 벌어진 일들이었지요, 더욱이 전란이 벌어진 와중에 통제가 될지 안될지 장담을 할수 없어 보이는 무장한 수천 수만의 민병들을 보면 그가 신권을 대해오던 시각에 비춰볼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한 국가의 지도자 이며, 지금은 전란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두 차례의 반란으로 그는 이순신을 비릇한 공신들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더욱 공고히 다졌지만 그 상황에서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 행하여할 행동은 신뢰가 아닐까 합니다.
 
공신에 대한 신뢰말입니다, 토사구팽도 상황이 있는 법인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와중의 선조에게는 그러한 경중을 따질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원균과 선거이를 서로 바꾸는 일을 어제 경연(經筵)에서 아뢰었습니다. 오늘 다른 대신의 의논을 들어보니, 원균이 이미 군율을 범하여 지금 추핵(推覈) 중에 있으므로 병사의 직임으로 바꾸는 것은 사체에 온당치 못하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답하기를,
 
“군율을 범했다고 말한다면 유독 이순신만은 군율을 범하지 않은 사람인가.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의 죄가 원균보다 더 심하다고 여겨진다. 원균을 병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그 주장을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참작해서 시행하라.”하였다.
 
선조 실록 27년 기사
 
이순신에 대한 관념을 버리고 이 기록만 본다면 딱히 틀린게 없어 보입니다만 문제는 공과입니다, 이순신은 여지껏 수없는 공을 세워 실록에 이름을 올린 공신이었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원균은 이후의 행적들은 제쳐두고 본다면 평범한 장수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이순신과 불화가 직접적으로 언급될 정도로 굉장히 서로간에 충돌이 잦았던게 특이한 점이었으나, 선조의 원균에 대한 총애는 이루 말할수가 없었습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충청 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사람됨이 범람(泛濫)하고 게다가 탐욕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5∼6월에 입방(入防)한 군사를 기한 전에 역을 방면하고 그 대가로 씨콩을 거두어 다 농사(農舍)로 실어 보냈습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은 자가 잇달고 앓다가 죽는 자도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철원 부사(鐵原府使) 심원해(沈源海)는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용렬합니다. 환자곡(還上穀)의 수효를 속여 보고하여 사사로이 사용하였으며, 소를 잡아 민간에서 재리(財利)를 꾀하였습니다. 심지어 형을 위해 경내에 집을 경영하고 전토를 널리 차지하기까지 하였으니 듣고 보는 이들이 경악하고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봉산 군수(鳳山郡守) 박응인(朴應寅)은 전에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에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한이 없고 비용이 너무 과람하여 길가의 거읍(巨邑)이 탕진되어 텅 비게 하였으니 체차(遞差)하소서.”하니, 상이 답하기를,“원균의 사람됨은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선조 28년 기사
 
사헌부가 원균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연달아 아뢰니, 상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선조 28년 기사
 
사헌부가 원균의 일을 연달아 아뢰고, 또 아뢰기를,“면천 군수(沔川郡守) 이여온(李汝溫)은 사람됨이 교사(巧詐)하여 도임한 이후 백성을 구휼하는 데에는 뜻이 없고 오직 명예 구하는 것만을 일삼아 은밀히 호족(豪族)들과 결탁하여 헛되이 치성(治聲)을 떠벌이고, 심지어 속임수로 상언(上言)하여 관계(官階)의 승진을 도모하려고 서울에 사람을 보내는데 백성에게 양식을 거두기까지 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매우 무상(無狀)합니다. 파직하소서.”하니, 답하기를,“원균의 일은 따를 수 없다. 이여온은 이미 포장(褒奬)하고서 도리어 논박(論駁)하니 사체에 손상됨이 있다. 일시의 비방과 칭찬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선조 28년 기사
 
 
비변사와 사헌부에서 연달아 원균은 아니라고 다른 인물은 몰라도 지금 이순신의 자리에 앉힐 인물은 아니라고 그렇게 피를 토하듯 외치지만 선조의 마음은 이미 닫혀있었습니다, 이 것만 본다면 단순한 무능이었지만 전란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기를 생각해본다면 또 그의 행적을 생각해 본다면 딱히 틀린게 아닙니다, 네 전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본디 신권과 왕권은 서로 공생하는 것이 불가하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아니라고 할때는 그 만큼의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선조에게는 이미 신하라는 것은 함께 국정을 운영해 나가는 파트너가 아니라, 철저하게 신권을 통해 자신을 위협하는 주적에 불과했습니다.
 
문제는 누차 이야기하였지만 지금은 전란이 벌어진 와중이고, 그렇기에 공신에 대한 박대와 더불어 대체카드를 준비한다는 늘 선조에게 좋은 결과를 안겨준 이간책의 결과는 참혹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A급 공신을 대체할 신료가 늘 A급일수는 없었고, 지금은 단 한차례의 실수도 국가를 파탄내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하옥시키라 명하고, 원균(元均)으로 대신하였다.이보다 앞서 평행장(平行長)과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서로 통하여, 요시라(要時羅)가 그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그가 말한 바가 마치 가등청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해서 우리 나라는 그걸 믿었었다. 이때에 왜적이 재침을 모의하면서 우리 나라의 수군을 꺼려했고, 그중에서도 더욱더 순신을 꺼렸다. 이에 요시라를 보내서 말하기를 ‘강화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실로 가등청정이 주장하고 있어서이다.
 
만약 그를 제거하면 나의 한이 풀리게 되고 귀국의 근심도 제거될 것이다. 모월 모일에 가등청정이 어느 섬에서 잘 것이니, 귀국에서 만약 수군을 시켜 몰래 잠복해 있다가 엄습하면 결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응서가 이로써 보고하니, 상이 황신(黃愼)을 보내 순신에게 비밀히 유시하였다.
 
그러나 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戰艦)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거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가등청정이 과연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 왔다가 그대로 서생포(西生浦)로 향했는데, 이는 실로 행장과 함께 작은 군사로 우리를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을 들어 순신을 하옥시켜 고신(栲訊)하게 하고, 마침내 전남 병사(全南兵使) 원균을 통제사로 삼았다.
 
선조 수정실록 31년
 
 
상이 이르기를,“지난해 한산(閑山) 싸움의 패배에 있어 수군(水軍) 제장들에 대하여 즉시 공(功)과 죄(罪)를 가려내어 법대로 처리했어야 했는데도, 아직까지 고식적인 습관에만 젖어 위엄을 밝히는 교훈을 보여줄 생각을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의 죄도 바로잡지 않고 한 사람의 공도 포상을 하지 않고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진 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자는 것에 불과한데,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비록 한백(韓白)4008) 이 장수가 되더라도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도원수마저도 대수롭잖은 일로 보아 한 명의 교위(校尉)라도 목을 베어 군율(軍律)을 크게 진기시키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삼군(三軍)으로 하여금 죽음을 영광으로 삶을 치욕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권징(勸懲)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산 싸움에 대하여 실시한 권징은 과연 어떠한가. 이 일은 여느 심상한 일이 아니니 서둘러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점점 오래되고 나면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주장(主將)으로서 절제(節制)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적들로 하여금 불의에 기습을 감행하도록 하여 전군(全軍)이 함몰되게 하였으니 죄는 모두 주장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각 장사들의 공죄(功罪)에 대해서도 신상 필벌을 행하여 군기(軍紀)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윤두수(尹斗壽)가 그렇게 아뢰게 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 실록 31년
 
 
 
 
방법을 잘못 대입한 까닭에 무능 했던 전란의 시기는 이 글로 마치고 다음 글은 그 이후의 짧은 행적에 관해 논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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